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길에 난데없이 두 명의 인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나타난다.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일까. 작품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들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그들은 어떤 것에 대해 사고를 하기보다는 뒤죽박죽 섞인 말들을 내뱉음으로써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페이지는 휙휙 넘어가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초점이 없으므로 독자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사이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번번이 이어지는 망각 속에서 제대로 된 결말도 없이 줄기차게 반복되는 대화의 진행은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이다.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이 난사되는 대화를 지켜보면서 도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작가 자신이 그와 같은 대답을 한 이상 관객들 사이에 물음은 끊이지 않았고, 그 해답 역시 물음만큼이나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164쪽)˝
그런 그들에게도 딱 한 가지 분명한 목표가 존재한다. 책의 제목처럼 그들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1막과 2막의 이틀 밤 동안 ‘고도‘를 애타게 기다려 보지만 끝내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전갈을 전하는 한 소년만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찾아올 뿐이다. 우리가 본 건 두 번의 헛걸음뿐이지만, 사실 이 기다림이 언제부터 진행되어 왔는지 알 수 없다. ‘고도‘가 누구인지 또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극이 진행되는 내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혹시라도 ‘고도‘가 올까 봐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맹목적으로 간절하게 기다리는 ‘고도‘란 누구일까. 아니,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 또한 우리는 영영 얻을 수 없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 자신도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가 구원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에스트라공‘의 대사처럼 그들은 모래밭 한가운데서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 묻혀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온 거지 같은 인생을 살았다. 척박한 삶이 어디에서 기인했고 어떻게 해야만 또 언제 끝날지를 알 수 없는 가운데서 ‘고도‘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희망을 저버리면 나무에다 목을 매는 길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므로 ˝고도에 대한 정의는 구원을 갈망하는 관객 각자에게 맡겨진 셈이다.(164쪽)˝
이 시대의 청년들은 이전보다 더 질이 낮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후로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상황이 조금도 진전되지 않으니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가 닥치면서 청년 세대뿐만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가 ‘고도‘를 기다리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고도‘를 기다리게 만들면서도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포조‘를 통해 ˝우리 시대가 나쁘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우리 시대라고 해서 옛날보다 더 불행할 것도 없으니까 말이오.(51쪽)˝라고 전한다. ‘고도‘는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누군가이자 무엇이었고, ‘고도‘가 나타나는 완벽한 현재를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도래하지 않을 ‘고도‘를 기다려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두자고.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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