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색인종에 관한 문제는 단 한 번도 끊이질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살아간다. 도서 『니클의 소년들』은 인권의 측면에서 과거의 폭력적인 기억들이 지금도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란 예감을 주는 작품이다. 흑인 소년 ‘엘우드‘는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독자들이 ‘부트 힐‘과 같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소년들의 시신들, 그러니까 부정당한 진실들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에서 우리는 타국의 사람에게 놀라운 몰입도를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엘우드‘와 ‘니클의 소년들‘의 이야기는 몇몇 사람들의 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엘우드‘가 ‘마르코니‘ 씨에 대한 모욕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듯이 우리는 ‘니클‘의 이야기를 마치 우리의 경험처럼 받아들인다. 『니클의 소년들』은 동양인으로서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우리가 세상에 분노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어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부모를 매개체로 과거와 연결되어 있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잘못된 세상에 대항해야만 한다. ‘엘우드‘나 작가 ‘조지 오웰‘의 믿음처럼 ‘인류애‘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다.

흑인 차별의 집약체, ‘니클‘

흑인의 인권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던 때 ‘엘우드‘에게 급작스러운 시련이 닥친다. 그는 믿기 어려운 이유로 감화원인 ‘니클‘에 배정된다. ‘니클‘은 흑인 노예 해방 운동 이후에도 흑인들이 노예처럼 살아가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집약해 놓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규칙과 규율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은 점도 시대 상황과 닮아 있다. 외부에서 보는 모습과 다르게 ‘니클‘에서는 백인과 흑인을 가르는 기준이나 아이들의 상벌체계 등이 불명확한 시스템상에서 운영된다. 교내에서 아이들은 심지어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식사가 부실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은 갖은 폭력에 노출되어 사회로 나간 이후에도 ‘니클‘이라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 ‘니클‘의 아이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인종차별과 가난에 시달려 왔다. ‘니클‘의 아이들 중에서 ‘엘우드‘는 상황이 좀 나은 편이었다. 주전부리를 싸 들고 면회를 와 주는 할머니 ‘헤리엇‘이 있었고, 다른 아이들은 생계를 꾸리는 일에도 벅찬 시간에 흑인 인권 보장을 위한 시위에 참여한 경험도 있었다. ˝책에는 나오지 않는 현실(137쪽)˝을 알지 못했던 ‘엘우드‘는 집요하게 ‘니클‘의 현실을 고발하고자 시도했다. 친구인 ‘터너‘는 ‘엘우드‘가 곁눈 가리개를 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아이들을 ‘니클‘로 밀어 넣고 방치하는 모든 어른들의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법이 바뀐다고 해도 과거를 답습하려는 사람들이 대를 통해 이어지는 이상 가난과 차별은 아이들을 놓아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터너‘ 등의 소년들은 장애물을 가로지르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가며 나름의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엘우드‘처럼 무식하다 싶을 만큼 우직하게 장애물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결국엔 돌파구를 만들어 낸다.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가 왔다

‘엘우드‘가 존경하던 ‘킹 목사‘는 흑인 시위 참가자들이 끝내는 ˝오랫동안 억압당한 끝에 그냥 현실에 안주하며 멍해져서 그 현실을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침대로 여기고 잠드는 법을 터득한 검둥이(196쪽)˝로 변해버린다고 말했다. ‘엘우드‘는 ‘킹 목사‘를 무척 존경했으므로 망가진 상태에서 벗어나 ‘니클‘을 없애고자 한다. 하지만 거대한 사회 시스템을 한 명의 개인이 붕괴시킨다는 것은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탈출이 아니라 졸업을 해서 ‘니클‘을 나가더라도 ‘니클‘의 아이들은 ˝경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불구가 되어 절룩거리며, 정상이 되는 방법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209쪽)˝ 더군다나 하나의 ‘니클‘이 붕괴된다 해도 또 다른 ‘니클‘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있었다. ˝백인의 아들들이,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기억하는 한(240쪽)˝ ‘니클‘과 같은 감방들은 ˝품행 교정이 필요한 버릇없는 녀석들이 나타나기를.(240쪽)˝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에 ‘니클‘, 또는 ‘리치먼드 호텔‘이 있었다는 사실은 희미해져 간다. 차별과 폭력의 땅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니클‘과 ‘리치먼드 호텔‘은 과거의 이름으로 몇몇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기억 전부가 소멸되기 전에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가 왔다, 고 ‘니클의 소년들‘은 말하고 있다.

미소를 지으며 너를 속여 텅 빈 것을 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네게서 너의 자존감을 뺏어가는 사람도 있다. 너는 자신이 누군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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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성 직업인의 경험을 귀담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직장에 몸담고 있는 여성을 찾아내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부모 세대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여성에게 있어서 출산과 육아로 인한 퇴직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여성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회고록은 여성 직업인에 대한 우리의 절박한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 그녀는 종군기자로서 숱한 위험에 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그녀는 사진을 찍는 자신의 일을 통해 전쟁의 진실을 폭로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에 집요한 열정을 쏟는 사람 중에서도 ‘린지 아다리오‘는 경탄할 만한 수준이었다. 분쟁지역에서 극도의 공포와 공황상태를 겪고 난 이후에도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을 보였고, 더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어 그 지역들이 가진 부조리와 인권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자 했다. 자신을 몰아세워 가며 살아온 그녀의 생애로 인해 우리는 여성으로서, 또 여성 직업인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내가 애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 했던 모든 일들을 그리워했다. 심지어 이전에는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던 것들까지. 이를테면 자유라든가. (95쪽)

분쟁지역을 취재하기 위해 수 주간 집을 떠나있는 경험은 ‘린지 아다리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종군기자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숱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직업이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동료들의 비보를 접하면서 ‘린지 아다리오‘는 현재의 평화로운 삶을 소중히 하게 된다. 물론 그런 삶이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의 생활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꽤나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지구 한 쪽에서 끝나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토록 사치스러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직업과 사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토록 밀접하게 연결된 직업과 일상 사이의 고리는 ‘린지 아다리오‘가 잠시도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떠돌면서 사진을 찍도록 부추겼다. ‘폴‘이나 아들 ‘루카스‘ 등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만 하는 시간들, 급작스럽게 불어닥치는 죽음들, 그리고 직업과 일상 사이의 불균형 등으로 그녀는 직업인으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꼈지만, 절대 그만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열정을 갖고 있는 일을 통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알맞은 때에 알맞은 장소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린지 아다리오‘가 자신의 젊음을 온통 쏟아부었던 사진 찍기는 결국 그녀가 원하는 변화들을 이끌어낼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남을 돕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전쟁의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녀 본인을 넘어서서 그녀의 삶을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미래 세대의 열정이 존속될 것이므로 우리는 사소한 변화들을 꾸준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보다 더 안전하고 쉬운 형태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선택이고, 일상에서 최전선에 서 있는 수많은 다른 여성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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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길에 난데없이 두 명의 인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나타난다.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일까. 작품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들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그들은 어떤 것에 대해 사고를 하기보다는 뒤죽박죽 섞인 말들을 내뱉음으로써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페이지는 휙휙 넘어가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초점이 없으므로 독자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사이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번번이 이어지는 망각 속에서 제대로 된 결말도 없이 줄기차게 반복되는 대화의 진행은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이다.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이 난사되는 대화를 지켜보면서 도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작가 자신이 그와 같은 대답을 한 이상 관객들 사이에 물음은 끊이지 않았고, 그 해답 역시 물음만큼이나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164쪽)˝

그런 그들에게도 딱 한 가지 분명한 목표가 존재한다. 책의 제목처럼 그들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1막과 2막의 이틀 밤 동안 ‘고도‘를 애타게 기다려 보지만 끝내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전갈을 전하는 한 소년만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찾아올 뿐이다. 우리가 본 건 두 번의 헛걸음뿐이지만, 사실 이 기다림이 언제부터 진행되어 왔는지 알 수 없다. ‘고도‘가 누구인지 또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극이 진행되는 내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혹시라도 ‘고도‘가 올까 봐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맹목적으로 간절하게 기다리는 ‘고도‘란 누구일까. 아니,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 또한 우리는 영영 얻을 수 없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 자신도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가 구원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에스트라공‘의 대사처럼 그들은 모래밭 한가운데서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 묻혀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온 거지 같은 인생을 살았다. 척박한 삶이 어디에서 기인했고 어떻게 해야만 또 언제 끝날지를 알 수 없는 가운데서 ‘고도‘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희망을 저버리면 나무에다 목을 매는 길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므로 ˝고도에 대한 정의는 구원을 갈망하는 관객 각자에게 맡겨진 셈이다.(164쪽)˝

이 시대의 청년들은 이전보다 더 질이 낮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후로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상황이 조금도 진전되지 않으니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가 닥치면서 청년 세대뿐만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가 ‘고도‘를 기다리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고도‘를 기다리게 만들면서도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포조‘를 통해 ˝우리 시대가 나쁘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우리 시대라고 해서 옛날보다 더 불행할 것도 없으니까 말이오.(51쪽)˝라고 전한다. ‘고도‘는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누군가이자 무엇이었고, ‘고도‘가 나타나는 완벽한 현재를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도래하지 않을 ‘고도‘를 기다려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두자고.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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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적인 권태로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 일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짧은 질문 하나에 왠지 마음이 침울해지고, 정말이지 오만가지 방법들이 머릿속을 흘러간다. 그중에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에서 비롯되는 설렘도 있을 것이다. 25살의 수습 변호사인 ‘시몽‘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폴‘의 인생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간의 돈을 벌었고, 오래된 연인 ‘로제‘도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 탈진 상태에 이르러 있었던 ‘폴‘에게 어떤 것도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런 그녀 앞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시몽‘이 나타난다. 난데없이 나타나 ‘브람스‘를 좋아하냐고 묻는 ‘시몽‘의 앞에서 ‘폴‘은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브람스‘는 하나의 음악을 넘어서서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57쪽)˝기 때문이다. 뒤늦게 발견된 생의 반짝임을 ‘폴‘은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망설이며 ‘시몽‘을 외면하려는 ‘폴‘에게 ‘시몽‘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53쪽)˝ 이 대목에 이르러서 나는 일상에 쫓겨가며 지하철 안으로 자신의 몸을 욱여 넣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익숙한 삶에 질려버렸으면서도 수많은 것들을 붙잡지 않은 채로 흘러가게 둔다. 어딘가 ‘폴‘의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는 그러므로 ‘시몽‘을 이대로 지나가게 둘 수 없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 동시에 잔인해질 수 있(102쪽)˝는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입방아를 찧어 대겠지만, ‘폴‘이 그랬듯 나는 ‘시몽‘을 일생일대의 기회처럼 감각하고 있다.

‘시몽‘과의 관계는 ‘폴‘에게 욕망에 쫓겨 이리저리 쏘다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의 ˝그녀는 하나의 얼굴, 하나의 생각을 찾아 헤맸다. 요컨대 하나의 대상을 찾아서.(141쪽)˝ 하지만 격렬한 젊음은 빠르게 막을 내리고, 오랜 후에도 유일무이한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아내기 어렵다. ‘폴‘은 ‘시몽‘을 통해 잠시나마 그녀 안의 젊음을 그러쥘 수 있었다. 모래처럼 그것들이 빠져 나가자 그녀는 이전보다도 더 늙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난 늙은 것 같아…….(150쪽)˝ 여기에서 ‘늙다‘라는 형용사는 나이와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노년‘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 더 이상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는 때˝. 작가 ‘사강‘은 ‘시몽‘이라는 캐릭터를 활용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이 듦을 체감한다. 우리가 생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와 상관 없이 우리는 눈앞의 누군가를, 혹은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는 때, 즉 우리 안의 ‘브람스‘를 더 이상 듣지 못하는 때에 노년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돌아와 이번 소설의 제목을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로 읽기 시작한다. 문장의 끝에는 응당 물음표가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왠지 생뚱맞게 ‘...‘가 삽입되어 있다.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이 문득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부탁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브람스‘는 때로 우리가 사랑해 마지 않는 어떤 상대이고, 또 우리가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일상적인 순간들이다. 즉 작가는 우리가 노년을 유보한 채로 우리만의 ‘브람스‘를 오래도록 느끼며 살아가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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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순히 주제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인들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p. 9

심보선 시인은 서문에서 ‘동시대인들의 삶‘과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 글쓰기의 원천이라고 밝혔다. 그건 자신의 글쓰기가 어떻다 하는 주장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게 세상과 하는 약속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와의 다짐을 지키려는 듯이 그의 글 안에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추상적인 개념어˝가 아니 보통의 ˝입에서 터져 나온 육성이요, 일상의 고통으로부터 터져 나온 파열음(p18)˝을 기록한 이 작품은 망각의 동물이었던 나를 일깨우고, 영혼을 낭비하지 않도록 돕는다. 다른 독자에게도 나와 같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심보선 시인은 시를 쓴다. 그리고 장르로서의 ‘시‘는 종종 타인의 질투를 야기한다. 다른 글쓰기에 비해서 길이가 짧아서 그 정도라면 ˝나도 사실은 저렇게 할 수 있는데, 딱 한 발짝만 내디디면 되는데.(p181)˝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짧은 글 안에는 사소하면서도 결코 사소해질 수 없는 어떤 삶들이 담겨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원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존재 자체로서 불법˝ 취급을 받는다. 심보선 시인의 글쓰기는 그런 사람들을 인지하고, 또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시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공통의 말이 되기를 소망˝한다. 문학을 읽고 쓰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를 향상시키려는 그의 문학적 소명은 헛된 꿈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인 자신이 말했듯이 지금 여기의 전쟁터 같은 삶을 떠올린다면, 문학을 논하고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좌절되기 쉬워 보인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짐, 움직임이다. 익명의 바통이다. 그리고 그 바통 위에는 ‘끝나지 않았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p37

우리는 더 나은 세상과 이를 향유하는 행복에 대한 질투심을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건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쥘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살짝이라도 발을 담글 수 있을까 싶은 신기루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으로서 희망에 관해서는 지독한 집착을 품고 있다. ‘헬조선‘과 같은 단어들로 세상을 비관하면서도 ˝끝나지 않았어˝라고 적힌 바통들을 발견하고는 꿈에 부풀고야 만다. 특히 한 세대 내에서 우리의 근본적인 고질병들이 해소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니 이것은 동시대인들을 넘어서서 세대 간에 이어지는 이어달리기다. 세대와 성별, 지위, 모든 것들의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는 하나의 조짐으로서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문학적인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급박하고 위태롭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하나하나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그러니 ˝익명의 바통˝을 이어받은 당신, ˝미래를 향해, 미래 너머를 향해 달려라.(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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