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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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정열적이고, 식물의 푸르름이 돋보이는 계절이다. <여름의 겨울>에는 아버지와 그의 분노만 없었다면, 영원히 생동감 넘치는 여름을 만끽하며 살아갔을 아이들이 있다. 패배감에 젖어 약자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일은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뎌내는 것과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가족 안에는 언제나 겨울만 존재하고, 끝을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위태로운 관계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 세상 밖의 계절과 관계없이 늘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생활을 지속해야 하는 가정은 흔하게 소설의 소재가 된다. 가정폭력의 위험에 노출된 사람이 현실 속에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다. 소설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은 대부분 남성에 의해서 행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여름의 겨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최종 방어선의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하지만 <여름의 겨울>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어머니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아버지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남편을 극복하지 못할 상대로 여겨 스스로 위기에 대항할 힘을 기르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는다. 공포에 짓눌려 자신이 속한 가족과 집이라는 공간이 세상의 끝인 것처럼 여기는 작품 속 여성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내가 읽은 작품들에서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묘사하므로, 어머니가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순응하게 되는 과정을 알아내고 싶었다. 어차피 평생을 남편의 그림자에 시달리게 될 테니, 물리적인 폭력을 감내할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집 밖에도 희망은 없으리라는 사실이 그녀들을 묶어두었을까.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좀 더 강인한 어머니가 될 수는 없었을까. 이 문장들을 적어 내려가면서도 조심스럽다. 나는 그런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으니까, 건방지게 구는 것처럼 보일 것만 같다.

하지만 <여름의 겨울>에서 '나'가 보인 태도를 고려하면, 여성 스스로 피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나의 희망사항이 완전히 그릇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포식자'와 같은 태도를 때때로 내보인다. 게다가 '영 교수님'의 부인인 '야엘'의 존재는 여성 간 협력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여성은 강력한 자아를 인식하고 휘둘리지 않기를 선언함으로써, 더 나아가 여성끼리의 연대를 도모함으로써 폭력이라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자신이 연약하지 않고, '포식자'로서의 자아도 겸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여름의 겨울>에서 피해자가 여성이었으므로, 나는 이 문단에서 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모든 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성을 넘어서서 우리 인류는 전부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협력을 강화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여름의 겨울>에서 아이들은 가정 폭력의 위험에만 노출되지 않았다. '나'와 동생 '질'은 정신적 고통이 가해졌을 때, 적절한 위안을 얻지 못했다. 또한, 동물들의 시체가 즐비한 방은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가족 간 끊어지기 쉬운 유대는 아이들이 안정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돌보기엔 부모가 각자의 문제로 지나치게 바빴다. 패배감에 젖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분노에 휘둘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부모로서의 자격이 부족해 보인다. 완벽한 사람만이 부모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부모로서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과 안정감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여름의 겨울> 속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어떤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까. 트라우마로부터 완전히 탈피할 수는 없었더라도, 못된 과거에 너무 얽매이는 삶은 아니었기를 바라본다. 제3자로서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한탄스럽다.

나는 먹잇감이나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정말로 살아 있고 싶었다.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존재로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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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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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사랑 없는 세계>는 식물과 요리라는 소재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영화 <식물도감>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도감>은 흔하지 않은 식물을 활용하여 따뜻하고 색다른 집밥을 만들어내는 데에 집중한 작품이다. 한편으로 식물 연구를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해낸 점이 도서 <랩 걸>과 닮아있다. 다른 두 작품을 단박에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식물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미우라 시온이 쓴 장편소설 <사랑 없는 세계>는 식물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연구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요리사의 시선에서 식물과 식물 연구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다. 식물 에세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방대한 양의 전문 지식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작가는 2~4장에 걸쳐 '모토무라'라는 캐릭터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그녀의 삶을 통해 연구자들의 애환과 기쁨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대학원을 거쳐 연구원 혹은 교수의 자리에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를 고민해야 하고,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식물 연구는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종목이다. '모토무라'를 비롯한 연구원들은 '알고 싶다'라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작업에 뛰어들었고, 명예나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 연구를 거듭한다. 이들도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욕구로 인해 흔들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식물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해 다시 금방 자신만의 궤도로 돌아온다. 작가는 '후지마루'라는 사람의 시선에서 연구원들의 삶을 조망하여, 그들의 끈기와 굳은 의지가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또한 실패로 끝난다 해도, 연구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려는 '모토무라'의 태도에서 인생에 관한 조언을 던지기도 한다. 예측이 가능한 길로만 나아가는 것보다 의외의 결과를 맞닥뜨리는 경우가 훨씬 즐거우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들의 관계에서 인간관계의 귀감을 발견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서로의 라이벌이지만, 서로를 지지하고 협력하며 함께 길을 나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가 '인생'이라는 주제를 함께 연구해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치환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후지마루'처럼 나도 처음에는 '모토무라'의 팀이 진행하는 연구가 생소했다. 온갖 메커니즘에 괜한 관심을 두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곧장 '모토무라'가 가진 앎에 대한 열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대학에서 다른 동기들과 달리 취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이유로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좋아하는 주제를 연구할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사랑 없는 세계>는 '모토무라'가 가진 식물에 대한 애정과 열의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눈앞에 있었지만, 여태껏 알아보지 못했던 세계를 그녀는 '후지마루'와 독자에게 펼쳐 보인다. 사랑이나 여타 인간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식물의 세계를 사랑으로 끌어안고, 또 그런 애정을 공유하는 '모토무라'의 연구팀을 지켜보며 새삼 세상에 쓸데없는 일이란 없고, 이를 속단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작가 미우라 시온은 매일같이 만지는 요리 재료 속에도 있었던 이 놀라운 세계를 감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책을 통해 보여주었다. 극적으로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그저 과묵하게 담담히 자기 몫을 살아내는 식물들로 인해 오늘을 인내하고, 우직하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취미든 일이든 사람이든, 사랑을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하고 거듭 생각한다
- P229

요리책에 쓰여 있는 대로 만들어서 예상한 대로의 맛이 나왔을 때보다, ‘이런 요리가 됐어!‘라고 의외의 결과를 만났을 때가, 설사 맛없는 게 만들어졌다 해도 더 즐거웠습니다. (...) 저는 ‘다음에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자‘라고 생각하면서, 심하게 맛없는 실패작을 우걱우걱 먹어버리는 쪽이에요
- P348

‘예정대로‘란 건 있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해도 따분한 일이다. 예정과는 다른, 뜻대로 되지 않은 길을, 그래도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방식으로 자신의 직감을 믿고 계속 나아갔기 때문에 지금의 이 발견이 있는 거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거다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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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의 완벽한 고백 브라운앤프렌즈 스토리북 1
이정석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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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들 정확한 이름은 알지 못해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중일까. '브라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갈색곰은 네이버에서 출시한 라인프렌즈라는 캐릭터 중 하나다. 카카x톡의 아성에 밀려 별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는 듯하지만, 대만이나 일본 등지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캐릭터의 외양적인 면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넘어서서 이들에게도 각자의 스토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BT21캐릭터의 제작과정 영상을 보고 깨달았다. 캐릭터가 대중의 삶에 더 깊숙이 파고들 수 있도록, 혹은 캐릭터들을 조합해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에 배경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름까지는 그렇다치더라도, 세세한 성격이나 과거까지 창작해내야 한다는 건 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브라운의 완벽한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더더욱. '브라운'을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면, 그가 대필 작가를 동원해 일상 에세이를 출간했다고 보면 되는건가(조크). '이정석' 작가가 쓴 이 책은 예상보다 훨씬 유쾌하고,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다. 페이지를 넘기자 갑작스레 등장하는 한 문장에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고, 울컥하기도 했다. 뭐랄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동생이 딱 한 마디로 내 뒤통수를 때린 느낌이다. 감히 단언컨대, 뭘 좀 아는 책이다.

이 책에서의 설정에 따르면 '브라운'은 무척 과묵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을 지녔다. 나도 늘 생각하던 바지만, 조용한 성격에는 뛰어난 장점이 있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며 사람들을 파악하는 일에 능숙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아서 과묵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를거라 생각하지만, 내 개인적 경험을 돌이켜보면(왜냐면 나도 과묵한 쪽에 속했으니까) 관계의 흐름이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마음 등을 타인보다 빠르게 알아차리곤 하는 것이다. 이처럼 둔감해보이지만 타인의 마음을 빠르게 캐치할 수 있는 '브라운'은 친구들에게 "따뜻하고, 포근하고, 소박한" 존재로 자리잡았다. 가끔은 거절에 능숙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명확하게 표현할 줄 모르는 성격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 브라운을 잘 이해하고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삶을 통과한다. 어떤 단점이든 커버해줄 수 있는 친구들의 존재가 이 책에서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상대를 위로하는 것이 특기인 브라운의 꿈도 "최고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라인 프렌즈 캐릭터에 대한 관심으로 <브라운의 완벽한 고백>을 구매한다면 최상의 만족감을 얻게 될 듯하다. 책의 절반이 캐릭터 삽화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가끔씩 위로가 절실해지는 순간에 이정석 작가의 허를 찌르는 문장이 필요해지는 때가 오면, 브라운을 찾아가주면 좋겠다.

무기력함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방 밖으론 단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할 것 같을 때, 방탈출 게임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 P61

어떤 마음은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
- P154

어쩌면 단점이라는 건 친구가 덮어주는 걸지도 몰라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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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 나태주 시집
나태주 지음 / 열림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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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동아리에서 시를 쓰곤 했었다. 세상이나 사랑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스스로를 퍽 어른스럽다고 여기며 살던 때였다. 당시에 내게 '시'라는 건 아무리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들과 심오한 문장들로 가득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시'를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레 중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어른들을 흉내 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여,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을 써내려던 어리면서도, 어리지 않던 시기의 내가 연상된다.

하지만 나태주 시인의 작품만큼은 늘 직관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어렵지 않은 단어들이 엮여서 마음을 단번에 툭 치고 들어온다. 나태주 시인의 글이 쉬우면서도, 사람들을 울리고야 마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해 시를 쓰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듣는 것만으로도 읽는 이에게 기분 좋은 설렘을 안기며,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나태주 시인이 노래하는 사랑은 시집을 잘 접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익숙한 <풀꽃 1>에서 빛을 발한다. "자세히 보아야/예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스스로 위로를 얻게 되거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특정 개인을 향해 읊조리는 듯했던 이전의 시들과 달리 인류애, 더 나아가 지구 자체에 마음을 쓰는 시들이 이번 작품에는 여럿 수록되어 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하던 사랑 시는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사랑을 거듭하면서도, 시인은 소유하려는 욕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사실 무언가에 애정을 가지다 보면, 자연스레 소유욕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아이가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태주 시인은 작품에서 사랑하되 거리를 두려는 인내를 발휘한다. 그저 보고 싶으니, 목소리만 좀 들어보자,라고 말할 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바람이 지나갈 정도로 선선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던 가수 양희은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나태주 시인도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할 때 사랑에서 비롯된 인간관계가 올바르게 지속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사랑을 쏟아내면서도, 상대가 자신의 자아를 찾을 수 있을 만큼은 배려를 한다는 점에서 나태주 시인은 진정한 사랑을 알고, 또 노래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는 나태주 시인이 등단한지 50주년이 된 해를 기념해서 출판된 작품이다. 1부에는 신작시, 2부에는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시, 3부에는 시인이 직접 고른 시들이 수록되었다. 300쪽 넘게 꽉꽉 채워진 시들을 읽으며, 시인의 성실함과 바래지 않은 순수함, 그 속에서 묻어나는 연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태주 시인의 시들이 간단해 보이지만, 50년 동안 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를 쓰기 위해 태어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들로 사람의 근원적인 감정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책의 표지에는 한겨울이 그려졌지만, 시에서는 가을이라는 소재가 빈번하게 활용된다. 가을도, 겨울도 쌀쌀하고 추운 계절이지만 그것들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한 쪽이 극복할 수 없을 듯한 쓸쓸함과 외로움을 선사한다면, 후자는 포근하고, 희미한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집은 겨울의 이미지와 많이 닮아있다. 그립지만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슬픔을 묘사하다가도, 현재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시인은 상기시킨다. 그래,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지금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작은 풀꽃들 하나하나에게도 관심을 두고, 인사를 건네야겠다 : "꽃들아 안녕! 안녕! (p179, <꽃들아 안녕)", "지구님 안녕!/나도 지금은 잠시 안녕하답니다(p146, <지구 소식>)". 사소한 인사 하나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인생의 충만함을 감지하는 것이 나태주 시인이 독자들에게 건네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내가 뽑은 명문장

"읽다 만 책 몇 페이지

마저 읽지 못하는 것

좋은 사람들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것

그 또한 아쉽고 안타까웠다"

(p276, <누워서 생각했을 때>)

-

딱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죽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주위의 공기가 싸늘해지면서, 무섭고 두려워졌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쉽게 공포를 조장하지만, 때로는 용기를 주기도 한다. 어차피 다들 죽음을 맞게 되기라는 생각을 하면, 제멋대로 살아도 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될지 모르지만, 종국에는 그들도, 그들의 기억도 사라질 테니까.

"행색이 초라한 사람 손에

들려진 등불일수록 더욱

멀리까지 비쳐짐을

제가 믿기 때문입니다"

(p249, <등불>)

이 작품에서 '등불'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시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행색이 초라한 사람'이라는 건 부정적인 감정들에 짓눌려 있는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종종 하는 생각이지만, 우울과 절망을 겪어본 자만이 타인의 슬픔에 더 잘 공감하고, 진정한 위안을 건넬 수 있다. 자신이 실패하고 나서야, 세상의 이면에까지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만큼만 남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잘 있겠지

잘 있을 거야

문득문득

네가 보고 싶어

(p77, <너 보고 싶은 날>)"

-

누가 보고 싶은지 알지 못하면서도, 막연하고 아득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너무나 힘들게 더디게 왔다가

너무나 빠르게 허망하게

가버리는 봄

우리네 인생에도

봄이란 것이 있었을까?"

(p199, <봄>)

-

봄이 되면, 동네에 벚꽃이 한가득 핀다. 분홍 잎들이 도로를 가득 메워 설렘을 안겨줄 수 있기를 날씨가 따뜻해지는 순간부터 고대한다. 하지만 꽃을 구경하던 즐거움은 1~2 주면 사라진다. 겨울이 오면, 그 자리에 벚꽃이 피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벚꽃길'이라는 팻말로 추억을 간신히 꺼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찬 바람이 부는 겨울에 그곳을 지날 때마다, 봄을 기다린다는 게 하잘것없고, 허망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아마 나는 벚꽃을, 봄을 또 애타게 기다리게 될 것이다. 매일 산책길로 나가 꽃이 세상을 나올 준비를 얼마만큼 했는지 지켜보리란 생각을 한다. 기간은 아주 짧지만 서도, 그것들이 내 마음에 남기는 따스함과 기대로 마음이 충만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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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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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아메리카나> 는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묘사하자면, '이페멜루' 와 '오빈제' 의 어린 사랑과 불가피했던 이별, 이후의 애틋한 재회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전작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디치에 소설에서 사랑이란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녀는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시련들에 더 집중한다.

"말썽꾼, 별종" 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이페멜루'에게는 '오빈제'라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네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어. 너는 무얼하든 네가 하고 싶어서 하지, 남들이 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따라하지는 않을 사람으로 보였거든." 이렇게 말하던 차분하고, 이성적인 오빈제는 이페멜루가 스스로를 좋아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1권 앞부분에서 다루어지던 건 그들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에서 잦은 파업으로 대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닐 수가 없게되자 이페멜루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더 잘 살아보고자 떠난 미국에서 그녀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나이지리아에서는 당연시 여겨지던 자신의 피부색때문에 끊임없이 차별을 당한다. "미국에 오기 전가지 나한테 문제가 있어야 하는 줄도 몰랐"던 이페멜루는 "이민자의 불안"을 가지고 있고, 고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더니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 되었다.

전에 이화여대에서 들었던 강의에서 작가 아디치에가 자신이 문제로 삼지 않던 자신의 피부색이 미국에 가서는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녀의 경험이 책에 반영된 것 같다. "저는 인종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왔어요. 한 번도 스스로 흑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미국에 와서 흑인이 됐죠." 이페멜루가 언급하는 흑인에는 여러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비미국인 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국인 흑인 등 우리가 분류하는 '흑인' 이라는 집단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페멜루가 보기에는 분명히 다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흑인'이라는 주제 안에서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이페멜루가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다. 사실 한국인으로서 외국에 나가 지내도, 지금은 방탄소년단 등의 이유로 조금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을 '아시아인'으로 묶어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분명 비슷한 점이 존재하고, 문화적으로 닮아있지만 우리는 엄연히 다른 사람들이고, 서로를 보기에 우리는 너무도 닮지 않았다. 절대 '아시아인' 이라는 카테고리 하나로 묶어 모든 문제에 대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피부색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같게 취급당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외치는 이페멜루에게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안에서도 개개인이 너무나도 달라서, '한국인'을 어떤 사람으로 정의해야 하는지 어렵다. 그러니 '흑인', '아시아인' 이라는 분류로 각각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묶어버리는 것은 편리하기는 해도,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자루에 담긴 그들은 백인들이 주류로 차지하고 있는 사회에서 절대 어울리지 못하고, 계급에서도 최하층을 차지한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고, 불편을 감수하는지는 이페멜루가 소설 속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잘 드러난다. "때때로 미국에서는 인종과 계층이 동의어다.", "그가 보기에 내 외모는 그 위풍당당한 저택의 주인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공적 담론에서 '흑인' 이라는 집합 명사는 '가난한 백인'과 곧잘 짝을 이룬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업신여겨지고, "놈들은 벌써부터 애한테 낙인을 찍고 싶어 해."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이유없이 범죄자 취급받으며 살아간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그들은 "투명인간"이고, 사람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늘 애써야만 한다. 부당한 위치에 서면서도 그들은 "인종 차별에 대해 화를 내선 안 된다". 미국인들이 흑인이 인종차별에 대해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미국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책에서 '이페멜루'가 제기하던 생각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조금 놀라웠던 것은, 비슷한 불행 속에서 고통받는 흑인들끼리 "미국식 악센트라는 놀라운 업적 때문에" 누구는 존경하고, 자신은 영주권이나 시민권으로 미국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만하며 같은 동족을 모른 척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한국인들도 외국에 나가서 살면 제일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누구 보고 잘못 되었다고 손가락질 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흑인으로서 부당하게 당하는 일들에 대해서 꼬집으면서, 작가 아디치에는 흑인들이 머리를 관리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릴랙서'라는 것으로 대부분의 흑인이 머리를 곱게 펴다가, 독한 화학성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이페멜루는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연의 머리를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이페멜루가 회사를 그만둘 때 또 다른 흑인인 '마거릿' 양이 "아가씨 머리도 문제였던 것 같긴 하지?" 라고 물을 때, 흑인들이 자신이 가진 예쁜 머리카락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릴랙서로 꾹꾹 눌러담는 것을 ,당연히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 점이 화가 났다. 아예 문제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응당 그래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아갈수록 아랫사람들이 피해를 봐야 한다. 어른들이 '원래 그런 거야' 라고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말해준다면,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어린 애들이 어떻게 나서서 고치려고 할까? 흑인들의 머리 모양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아디치에는 사회가 당연하게 강요하는 것들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하느님이 제게 주신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다는 사실" (난 비록 종교를 믿지 않지만,) 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아디치에가 강연해서도 말했듯, 단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메이크업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코르셋을 입어야 한다는 건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 뿐이지,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증은 없다. 사회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천은 늘 어렵지만)

그토록 그리웠던 고향에 가서 적응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들을 나이지리아를 무시하는 걸로 메우는 '귀국인'들의 행동도 흥미로웠다. 그들은 고향 음식을 외면하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다닌다. 날리우드(나이지리아 영화)를 비판하는 말들을 늘어놓고, 나이지리아가 가진 문제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이페멜루가 이후 이 귀국인 모임 '월드 나이지리안 클럽'에 대해서 남긴 글이 주목할 만 하다. "마치 라고스가 뉴욕처럼 되려고 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것처럼 라고스가 뉴욕과 다른 점에 대해 불평" 한다고 그들을 평했다. 나이지리아는 나이지리아 만의 길을 가는 것이고, 절대 뉴욕과 같을 수 없다는 지적이 '헬조선' 이라면서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나로서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글귀를 읽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우리는 다른 국가들과 같은 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 좋아 보이는 국가에 가도 그들이 가진 문제점이 분명히 있고, 그곳의 사람들도 거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우리나라도 나름대로의 길을 일구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나이지리아에 대해 불평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네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이페멜루의 모습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니 잘난 척 그만하고 이곳의 삶의 방식이 그냥 그렇다는 것을, 모둠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어쩐지 대한민국이, 서울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최선이라고 살아온 삶을 내가 너무 무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아디치에의 작품인 만큼 페미니즘에 관해서도 빼놓을 수 없다. "자기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규정짓고 의존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불구가 되어 눈에는 절박함을 담은" 여자들에게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보낸다. 소설 속에서 그녀들이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무시하기에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에서 있던 강연회에서 결혼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방식이, 자신이 하는 일들이 다 좋은 남편을 찾기 위한 일로 치부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던 아디치에의 말이 떠올랐다. 메이크업이나 옷으로 자신을 예쁘게 치장하는 것도 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던 아디치에의 당당함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소설 속에서 언급 되었던 것은 여성의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남자들도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둘러입는 갑옷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강요하는 차라던가, 집이라던가.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던간에 우리가 결혼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고, 누군가의 선택을 위해 그토록 애를 써야 한다니 왠지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부담감에 짓눌려 결혼을 포기하는 90년대생들이 늘어나는 것만 보아도, 이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소설 <아메리카나>를 통해서 어떤 집단에 성급하게 분류되어 차별받거나 무시 받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기대야만 자신의 지위가 나아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결혼 이외에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서러움을 겪고 있을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나의 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인종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소시켰다고 칭찬할 것도 없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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