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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아메리카나> 는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묘사하자면, '이페멜루' 와 '오빈제' 의 어린 사랑과 불가피했던 이별, 이후의 애틋한 재회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전작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디치에 소설에서 사랑이란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녀는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시련들에 더 집중한다.
"말썽꾼, 별종" 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이페멜루'에게는 '오빈제'라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네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어. 너는 무얼하든 네가 하고 싶어서 하지, 남들이 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따라하지는 않을 사람으로 보였거든." 이렇게 말하던 차분하고, 이성적인 오빈제는 이페멜루가 스스로를 좋아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1권 앞부분에서 다루어지던 건 그들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에서 잦은 파업으로 대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닐 수가 없게되자 이페멜루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더 잘 살아보고자 떠난 미국에서 그녀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나이지리아에서는 당연시 여겨지던 자신의 피부색때문에 끊임없이 차별을 당한다. "미국에 오기 전가지 나한테 문제가 있어야 하는 줄도 몰랐"던 이페멜루는 "이민자의 불안"을 가지고 있고, 고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더니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 되었다.
전에 이화여대에서 들었던 강의에서 작가 아디치에가 자신이 문제로 삼지 않던 자신의 피부색이 미국에 가서는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녀의 경험이 책에 반영된 것 같다. "저는 인종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왔어요. 한 번도 스스로 흑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미국에 와서 흑인이 됐죠." 이페멜루가 언급하는 흑인에는 여러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비미국인 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국인 흑인 등 우리가 분류하는 '흑인' 이라는 집단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페멜루가 보기에는 분명히 다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흑인'이라는 주제 안에서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이페멜루가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다. 사실 한국인으로서 외국에 나가 지내도, 지금은 방탄소년단 등의 이유로 조금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을 '아시아인'으로 묶어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분명 비슷한 점이 존재하고, 문화적으로 닮아있지만 우리는 엄연히 다른 사람들이고, 서로를 보기에 우리는 너무도 닮지 않았다. 절대 '아시아인' 이라는 카테고리 하나로 묶어 모든 문제에 대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피부색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같게 취급당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외치는 이페멜루에게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안에서도 개개인이 너무나도 달라서, '한국인'을 어떤 사람으로 정의해야 하는지 어렵다. 그러니 '흑인', '아시아인' 이라는 분류로 각각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묶어버리는 것은 편리하기는 해도,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자루에 담긴 그들은 백인들이 주류로 차지하고 있는 사회에서 절대 어울리지 못하고, 계급에서도 최하층을 차지한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고, 불편을 감수하는지는 이페멜루가 소설 속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잘 드러난다. "때때로 미국에서는 인종과 계층이 동의어다.", "그가 보기에 내 외모는 그 위풍당당한 저택의 주인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공적 담론에서 '흑인' 이라는 집합 명사는 '가난한 백인'과 곧잘 짝을 이룬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업신여겨지고, "놈들은 벌써부터 애한테 낙인을 찍고 싶어 해."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이유없이 범죄자 취급받으며 살아간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그들은 "투명인간"이고, 사람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늘 애써야만 한다. 부당한 위치에 서면서도 그들은 "인종 차별에 대해 화를 내선 안 된다". 미국인들이 흑인이 인종차별에 대해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미국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책에서 '이페멜루'가 제기하던 생각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조금 놀라웠던 것은, 비슷한 불행 속에서 고통받는 흑인들끼리 "미국식 악센트라는 놀라운 업적 때문에" 누구는 존경하고, 자신은 영주권이나 시민권으로 미국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만하며 같은 동족을 모른 척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한국인들도 외국에 나가서 살면 제일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누구 보고 잘못 되었다고 손가락질 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흑인으로서 부당하게 당하는 일들에 대해서 꼬집으면서, 작가 아디치에는 흑인들이 머리를 관리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릴랙서'라는 것으로 대부분의 흑인이 머리를 곱게 펴다가, 독한 화학성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이페멜루는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연의 머리를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이페멜루가 회사를 그만둘 때 또 다른 흑인인 '마거릿' 양이 "아가씨 머리도 문제였던 것 같긴 하지?" 라고 물을 때, 흑인들이 자신이 가진 예쁜 머리카락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릴랙서로 꾹꾹 눌러담는 것을 ,당연히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 점이 화가 났다. 아예 문제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응당 그래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아갈수록 아랫사람들이 피해를 봐야 한다. 어른들이 '원래 그런 거야' 라고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말해준다면,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어린 애들이 어떻게 나서서 고치려고 할까? 흑인들의 머리 모양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아디치에는 사회가 당연하게 강요하는 것들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하느님이 제게 주신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다는 사실" (난 비록 종교를 믿지 않지만,) 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아디치에가 강연해서도 말했듯, 단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메이크업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코르셋을 입어야 한다는 건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 뿐이지,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증은 없다. 사회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천은 늘 어렵지만)
그토록 그리웠던 고향에 가서 적응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들을 나이지리아를 무시하는 걸로 메우는 '귀국인'들의 행동도 흥미로웠다. 그들은 고향 음식을 외면하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다닌다. 날리우드(나이지리아 영화)를 비판하는 말들을 늘어놓고, 나이지리아가 가진 문제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이페멜루가 이후 이 귀국인 모임 '월드 나이지리안 클럽'에 대해서 남긴 글이 주목할 만 하다. "마치 라고스가 뉴욕처럼 되려고 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것처럼 라고스가 뉴욕과 다른 점에 대해 불평" 한다고 그들을 평했다. 나이지리아는 나이지리아 만의 길을 가는 것이고, 절대 뉴욕과 같을 수 없다는 지적이 '헬조선' 이라면서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나로서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글귀를 읽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우리는 다른 국가들과 같은 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 좋아 보이는 국가에 가도 그들이 가진 문제점이 분명히 있고, 그곳의 사람들도 거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우리나라도 나름대로의 길을 일구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나이지리아에 대해 불평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네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이페멜루의 모습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니 잘난 척 그만하고 이곳의 삶의 방식이 그냥 그렇다는 것을, 모둠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어쩐지 대한민국이, 서울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최선이라고 살아온 삶을 내가 너무 무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아디치에의 작품인 만큼 페미니즘에 관해서도 빼놓을 수 없다. "자기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규정짓고 의존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불구가 되어 눈에는 절박함을 담은" 여자들에게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보낸다. 소설 속에서 그녀들이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무시하기에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에서 있던 강연회에서 결혼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방식이, 자신이 하는 일들이 다 좋은 남편을 찾기 위한 일로 치부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던 아디치에의 말이 떠올랐다. 메이크업이나 옷으로 자신을 예쁘게 치장하는 것도 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던 아디치에의 당당함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소설 속에서 언급 되었던 것은 여성의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남자들도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둘러입는 갑옷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강요하는 차라던가, 집이라던가.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던간에 우리가 결혼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고, 누군가의 선택을 위해 그토록 애를 써야 한다니 왠지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부담감에 짓눌려 결혼을 포기하는 90년대생들이 늘어나는 것만 보아도, 이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소설 <아메리카나>를 통해서 어떤 집단에 성급하게 분류되어 차별받거나 무시 받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기대야만 자신의 지위가 나아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결혼 이외에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서러움을 겪고 있을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나의 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인종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소시켰다고 칭찬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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