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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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사랑 없는 세계>는 식물과 요리라는 소재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영화 <식물도감>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도감>은 흔하지 않은 식물을 활용하여 따뜻하고 색다른 집밥을 만들어내는 데에 집중한 작품이다. 한편으로 식물 연구를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해낸 점이 도서 <랩 걸>과 닮아있다. 다른 두 작품을 단박에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식물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미우라 시온이 쓴 장편소설 <사랑 없는 세계>는 식물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연구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요리사의 시선에서 식물과 식물 연구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다. 식물 에세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방대한 양의 전문 지식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작가는 2~4장에 걸쳐 '모토무라'라는 캐릭터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그녀의 삶을 통해 연구자들의 애환과 기쁨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대학원을 거쳐 연구원 혹은 교수의 자리에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를 고민해야 하고,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식물 연구는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종목이다. '모토무라'를 비롯한 연구원들은 '알고 싶다'라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작업에 뛰어들었고, 명예나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 연구를 거듭한다. 이들도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욕구로 인해 흔들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식물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해 다시 금방 자신만의 궤도로 돌아온다. 작가는 '후지마루'라는 사람의 시선에서 연구원들의 삶을 조망하여, 그들의 끈기와 굳은 의지가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또한 실패로 끝난다 해도, 연구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려는 '모토무라'의 태도에서 인생에 관한 조언을 던지기도 한다. 예측이 가능한 길로만 나아가는 것보다 의외의 결과를 맞닥뜨리는 경우가 훨씬 즐거우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들의 관계에서 인간관계의 귀감을 발견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서로의 라이벌이지만, 서로를 지지하고 협력하며 함께 길을 나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가 '인생'이라는 주제를 함께 연구해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치환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후지마루'처럼 나도 처음에는 '모토무라'의 팀이 진행하는 연구가 생소했다. 온갖 메커니즘에 괜한 관심을 두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곧장 '모토무라'가 가진 앎에 대한 열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대학에서 다른 동기들과 달리 취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이유로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좋아하는 주제를 연구할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사랑 없는 세계>는 '모토무라'가 가진 식물에 대한 애정과 열의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눈앞에 있었지만, 여태껏 알아보지 못했던 세계를 그녀는 '후지마루'와 독자에게 펼쳐 보인다. 사랑이나 여타 인간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식물의 세계를 사랑으로 끌어안고, 또 그런 애정을 공유하는 '모토무라'의 연구팀을 지켜보며 새삼 세상에 쓸데없는 일이란 없고, 이를 속단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작가 미우라 시온은 매일같이 만지는 요리 재료 속에도 있었던 이 놀라운 세계를 감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책을 통해 보여주었다. 극적으로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그저 과묵하게 담담히 자기 몫을 살아내는 식물들로 인해 오늘을 인내하고, 우직하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취미든 일이든 사람이든, 사랑을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하고 거듭 생각한다
- P229

요리책에 쓰여 있는 대로 만들어서 예상한 대로의 맛이 나왔을 때보다, ‘이런 요리가 됐어!‘라고 의외의 결과를 만났을 때가, 설사 맛없는 게 만들어졌다 해도 더 즐거웠습니다. (...) 저는 ‘다음에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자‘라고 생각하면서, 심하게 맛없는 실패작을 우걱우걱 먹어버리는 쪽이에요
- P348

‘예정대로‘란 건 있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해도 따분한 일이다. 예정과는 다른, 뜻대로 되지 않은 길을, 그래도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방식으로 자신의 직감을 믿고 계속 나아갔기 때문에 지금의 이 발견이 있는 거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거다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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