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 빛과 색으로 완성한 회화의 혁명 클래식 클라우드 14
허나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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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클라우드 인생 여행단 12월의 도서에는 인상주의 화가 ‘모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모네‘는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나 대상의 물질성보다는 ‘감각‘과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다. 그는 대상과 ˝자신 사이에 있는 공기, 바람, 안개, 온도, 습기, 시간 그리고 빛 등의 요소들을 그리고자 했다˝. 한 가지 대상을 놓고, 시간이나 날씨,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여러 개의 캔버스를 바꿔가며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하나의 대상을 그렇게 오래도록 관찰해 그려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책 속에 등장한 ‘모네‘의 그림들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의 사물이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한 꾸준히 사물을 관찰하고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모네‘의 실력과 태도도 감탄스러웠다. ‘모네‘의 그림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으며, 인상주의의 특징인 간략한 붓질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것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세세한 특징들을 잡아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대상에게서 받는 인상만 잘 살릴 수 있다면, 정확한 그림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책 <모네>에는 이토록 놀라운 재능을 가진 화가 ‘모네‘의 혁명가와 같은 모습이 잘 드러나있다. ‘모네‘의 그림들을 여러 전시회에서 접해 왔지만, 저자가 지적하듯이 나도 그의 그림을 단순하게 ‘예쁜 그림‘이라고만 평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모네의 ‘예쁜 그림‘ 뒤에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힘겨운 노력과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 미술작품을 즐긴 적이 많았던 나는 ‘모네‘의 그림에서 아름다운 색감만을 포착했을 뿐이었다. 작가가 생존을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던 때도 있었고, 사회가 원하는 길과 다른 방향으로 가면서 빈곤과 냉랭한 시선들을 감내해야 했던 적도 많았으리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무심히 작품을 지나치던 이전의 모습을 버리고, 깊이 있게 작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장점이다.

‘모네‘가 인생의 굴곡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화가가 된 데에는 사람들의 조력이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미술을 하는 데에는 돈이 무척 많이 든다. 아무리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물질적인 어려움을 뛰어넘지 못하고 다른 일에 종사하게 되는 예술가들도 많다. 하지만 ‘모네‘에게는 고모 ‘르카드르‘가 있었다. 그녀는 ‘모네‘의 재능을 알아보고,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모가 없었더라면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 화가의 길이 좌절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었더라도 높은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갖은 고생을 어릴 때부터 해야 했을까. ‘르카드르‘와 같은 이들의 도움 없이 간절한 꿈을 안고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예술가들이 존경스럽다. 또한 ‘모네‘에게는 함께 인상주의를 이끌었던 동료들의 존재도 있었다. ‘르누아르‘, ‘마네‘, ‘세잔‘, ‘드가‘, ‘바지유‘, ‘피사로‘ 등과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같이 그림을 그리러 나가기도 하면서 그들은 미술사 속에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모네‘를 인정해주고 그림을 팔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뒤랑뤼엘‘도 빼놓을 수 없다.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세계에 대항해 신념을 지켜내고자 했던 동료들이 없었다면, ‘모네‘의 그림은 아주 작은 몸짓에 불과했을 것이다.

‘모네‘는 한 학파의 처음과 끝을 모두 지켜본 흔치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보통 누군가의 전기를 읽다 보면, 사후에 비로소 주목을 받아서 자신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이 적지 않다. 11월 인생 여행단의 목적지였던 ‘레이먼드 카버‘도 작품 <대성당>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오래지 않아 죽음을 맞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모네‘는 아주 행운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다른 유명인들의 삶과 달리 ‘모네‘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다정하고 좋은 ‘파파 모네‘였다는 점이다. 그는 밖으로 그림을 그리러 나갈 때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드넓은 자연으로 나가서 형제들과 뛰어놀고, 자신의 꿈을 향해 묵묵히 달려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추억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까. 자신의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정에 소홀하거나, 자신을 갉아먹으면서 예술혼을 불태우는 그런 예술가가 아니라서 ‘모네‘가 더욱 좋았다. 그래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프랑스‘, 특히 ‘지베르니‘에 가서 ‘모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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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 내려오다 -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어
김동영 지음 / 김영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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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울 만큼 평범한 나날들 속에서 사람들은 도피 방법으로 가장 먼저 여행을 떠올린다. 하지만 시간적, 물질적 제약으로 인해 원할 때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삶의 권태로움을 맛볼 때마다 여행 에세이나 가이드북을 집어 든다. 그리고는 마치 내일 당장 여행을 갈 것처럼 가고 싶은 지역들을 정해 놓는다. <천국이 내려오다>는 지금 당장 집을 박차고 싶게 만드는 책은 아니었다. 여행지의 아름다운 면만을 예쁜 사진으로 선보인다기보다 자신이 얻은 깨달음들을 차분히 적어 내려간 일기에 가깝다. 여행지만의 특색이 담겼다거나 너무 매혹적이어서 빨려 들어가고 싶을 만큼의 사진들이 없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어디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법한 일상적인 순간들이 가득하다. 작가가 만난 '천국'들을 함께 공감하기엔 시각적 자료가 부족했다. '천국'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소확행에 더 가까웠다. '천국'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평생 벗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황홀하고, 아름다운 곳이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국이라는 공간의 이상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른 기준을 갖고 있을 테니까, 하고 마음을 바꾸니 책을 받아들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이외에 기이하게 여겼던 부분이 또 있는데, 바로 각 장마다 끝에 '천국'이라는 단어가 담긴 문장이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참 제목에 걸맞은 문장들이다 싶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꼭 이런 문장들이 들어가야만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모든 여행에 좋고 나쁨이 있듯, <천국이 내려오다>에도 매력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일단 작가가 여행한 지역이 무척 다양하고 많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보통의 여행객들이 자주 찾지 않는 장소들을 다녀왔다. 게다가 가는 장소마다 사건이 터지기 일쑤였다. 우크라이나에 갔는데 마침 러시아랑 전쟁이 발발했다거나,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걸 지켜본 적도 있었다. 마치 여행 작가라는 직업에 온 우주가 나서서 보탬이라도 되려는 듯 에피소드를 만들어 주었다. 이런 불안정하고, 지쳐 쓰러질 만한 상황들 속에서도 '천국'을 발견해내는 작가의 긍정적인 에너지란 분명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성격이었다. 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 동안 작가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많이 겪어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모든 여행지에서 자신만의 천국을 찾아냈다. 물론 그것이 '여행'에서 그쳤기 때문이리라. 어찌 됐든 흔하지 않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남긴 이 기록들은 읽을만한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모험하는 저자의 모습은 내게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떠날 열정을 제공해주었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원하던 행복을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일깨워주었다.

작가는 <천국이 내려오다>에 일상적인 즐거움들을 기록해 두었다. 특별한 모험을 하는 경우보다 한국에서도 할 법한 일들을 하고, 느긋하게 여유를 누리는 때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소소한 일들도 독특한 여행지라는 배경 덕분에, 때로는 '여행'이라는 단어 때문에 훨씬 특별해졌다. 그리고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정한 배려와 한국에서는 좀처럼 누리기 힘들었던 여유도 작가의 여행에 한몫 거들었다. 예를 들어 파리에서 에스프레소에 크루아상을 곁들일 때, '김동영'작가에게 진짜 커피 맛을 알려주려고 열의를 보이는 프랑스 남성분들로 인해 보통의 하루가 한층 애틋한 추억으로 변할 수 있었다. 이 밖에 러시아 올혼섬에서 작가를 쫓아다니며 도움을 주던 검은 개도 일상적인 소재('개')가 '천국'이라는 상위 단계로 변모한 케이스다. 이처럼 별것 아닌 소재들이 여행이라는 효과를 입고 좀 더 각별해지고, 잊지 못할 기억으로 새겨진다.

이 책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다른 책들과 달리 함께 더 넓은 곳으로 떠나자!라고 외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한국의 포근한 집이 '천국'이었다고 말한다. 집 밖을 그렇게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늑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천국'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을 멀리 떠나보고서야 알아차리게 된다. <천국이 내려오다>는 그렇게 끝까지 뽐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지내고 있는 이 공간과 주변에 놓인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새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일상적이지 않지만, 작가를 따라 꼭 해보고 싶은 여행을 꼽는다면 히말라야 산맥을 오토바이를 타고 넘던 장면이었다. 아직 멀리 항해해 보지 않아서 다른 곳에 '천국'이 있으리라고 믿는 나는 작가의 모습을 보고 또 여행이 떠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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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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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섀넌 커크'의 <복수해 기억해>. 이 책의 소개 글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주저 없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영화나 책에서 납치극이 벌어지면, 대부분의 경우에 연약한 여성 피해자와 강력한 남성 가해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을 떠나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리 갖은 애를 써도 결국엔 자신의 한계만 깨닫고 만다. 그 피해자가 정부기관의 정예요원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복수해 기억해>는 이 모든 설정을 뒤집었다. 임신을 한 17살 소녀가 등굣길에 납치를 당했지만, 범인들은 그녀의 비상한 두뇌와 침착한 성격을 간과했다. 더군다나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증거를 흘리고 다니는 멍청한 가해자마저 여타 스릴러 소설들과 다르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임신부들을 납치해 아기를 적출하고 판매하는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에게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철저한 복수를 감행하는 '리사'의 모습이 <복수해 기억해>의 관전 포인트다. 해군 특수부대 출신에 물리학자로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와 승률이 높은 변호사인 어머니를 둔 '리사'는 오만하지만, 그것을 눈감아 주고도 남을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졌다. 마냥 경찰들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두뇌를 활용해 범죄자들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리사'의 모습은 이전과는 다른 짜릿함을 제공한다. 변호사이자 작가인 '섀넌 커크'는 자신의 장점을 잘 활용해 법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마음껏 유괴범들을 징벌한다. 적절한 때에 딱딱 맞아드는 우연들과 다 해결된 줄 알았는데 또 급작스럽게 조성되는 긴박감이 스토리에 흥미를 배가시킨다. 읽는 내내 영화로 만들기에 정말 딱인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구글링을 해보니까 2016년에 영화화에 관한 논의가 오가긴 했지만, imdb 사이트에는 정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영화가 제작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로 보면 정말 끝내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리사'라는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구석이 많기는 하다. 현실에서 스위치를 껐다 켜며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이나 폐쇄된 공간에서 온갖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 가해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다. 게다가 '리사'를 납치한 범인은 너무나도 허술했고, 그녀에게 주짓수를 가르쳐준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하지만 이런 흔치 않은 성격을 가진 캐릭터이기 때문에 더 매력 있고, 자꾸 빨려 든다. 개인적으로 범죄 영화를 보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자주 상상해 보는 편이다. 물론 영화관에서 편하게 앉아 눈으로만 그들의 움직임을 좇으니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불가능한 상황 설정이라 할지라도, 납치된 장소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어쨌든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상상이다. 작가 '섀넌 커크'는 질문으로만 가득했던 내 상상력에 '리사'라는 가상의 인물을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탈출하면 좋을지를 보여준다.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만 늘 그쳤었는데, 저자의 탈출 방법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복수해 기억해>는 유괴범죄의 피해자들에게 통쾌함을 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어릴 때 유괴를 당한 이후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동생을 둔 FBI 요원 '리우'가 등장하고, 임신한 몸으로 감금생활을 해야 했던 '리사'와 '도로시'를 비롯한 3명의 피해자들이 더 있었다. '리우'는 뛰어난 시력과 기억력을 가진 유괴범죄 전문 요원이다. '리우'와 '리사'처럼 비상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가하는 것은 단 한 번의 처벌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는 고통이다. 항상 트라우마를 떠안고 살아야만 하는 피해자들을 떠올리면, 이것만이 정당한 징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뿐만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리사'는 높은 승률을 자랑하는 변호사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적절히 거짓말까지 섞어가며 연루된 모든 가해자들에게 최고형을 받게 하도록 애쓴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피해자 혹은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변호사 어머니나 그녀에게서 보고 배운 법률 지식을 활용할 만한 능력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에게 '리우'와 '롤라'같은 전문 인력들이 제때에 당도해 목숨을 구해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이 '리우'와 '리사'의 존재는 범죄의 종류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제공한다. 또한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복수해서 범죄자들의 싹을 잘라 버리려는 '리사'가 정의 실현을 향한 하나의 도화선이 되어준다. 최근에는 연쇄적인 유괴 범죄에 관한 소식을 다행스

럽게도 들어본 적이 없는 듯하다. <복수해 기억해>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의 가족('리우' 요원), 아무것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피해자('도로시')의 모습은 모든 범죄에서 발견되는 장면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피해자들이 받은 만큼의 징벌이 가해자들에게도 내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당분간은 이토록 지적이고,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우며, 잔인하도록 통쾌한 소설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한결같이 무심하다는 이유로 나를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만약 누군가가 당신 아기에게 총을 들이대고 쏘겠다고 위협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고 싶다. 내 과학적 사고와 용기가 부럽지 않겠는가? 물론 당신도 당신만의 도구들이 있을 테고, 나름의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그러니 당신도 내 방법을 존중해주길 바란다.

현실의 끔찍함을 뇌리에서 차단하고, 오로지 육체로만 움직이는 것. 참전 군인들에게 물어보라. 다 나와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무언가를 기다릴 땐 만반의 준비를 하라." 무언가 기다릴 때는 정말로 넋 놓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벽돌 한 장, 모르타르 한 겹, 또 벽돌 한 장, 이렇게 차근차근 피라미드를 쌓아가면서 목표물이 내게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 좌우명을 되새기면서, 내가 기다리는 목표는 반드시 실현된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그 어떤 의심이나 물리학 법칙, 심지어는 시간이 나를 가로막는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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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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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구민 한 책 읽기'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부상으로 도서상품권을 얻었다. 받자마자 내가 책덕임을 증명하기 위해 서점으로 달려갔다. 처음으로 방문한 동네 책방에서 여러 책들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마땅히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 없어서 그냥 갈까, 했는데, 우연히 들었던 책 바로 밑에서 <사하맨션>을 발견했다. 책이 뒤죽박죽 정리되어 있어서 다른 책 밑에 이 책이 깔려 있었다. 비주류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조남주' 작가의 소설이라는 점에 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표지가 좀 더 남루했다면 좋았겠다. 글로우 효과도 넣지 않고, 양장 커버가 아닌 페이퍼북으로 바꾸고 싶다. 절망적인 '사하맨션'의 느낌이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이 뭐랄까, 나 좀 사달라고 홍보문구로 가득하지가 않다. 책 내부에도 평론은 없고, 추천사도 짧게 적혀 있을 뿐이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스타덤에 오른 '조남주' 작가가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된 듯한 느낌이다. 작가 이외에 아무것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에 쏟아진 몇몇 혹평을 보았는데, 나는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소설인 줄로만 알았는데, 읽다 보니 이건 추리소설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복선이 마지막 장에 가서야 발견된다. 소름이 오소소소 돋아났다. 이번에 영화화가 되어 큰 사랑을 받은 <82년생 김지영>처럼 어쩌면 이 책도 영화로 제작될지 모르겠다. 그만큼 생생하다. 눈앞에 장면들이 그려지고, 몰입도가 높은 작품이었다.<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도 그랬다.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독특한 상황-여러 여성들이 빙의되는 '김지영' 씨, 기존의 국가와는 형태가 다른 기업이 운영하는 '도시국가'-을 설정하는데, 그게 또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도 않다. 서로 다른 성격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지만 전부 여성들이 살면서 마주치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고, '도시국가'는 몇몇 지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모습을 드러낸다. 온전치 못한 주민으로 살아가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도맡으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사하맨션' 사람들은 그리 멀지 않은 얘기이기도 하다.

'주민'의 타이틀을 얻지 못한 이들은 할 수 있는 게 정말 하나도 없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늘 가난과 맞서야 하는 건 물론이고, 언제 국가에 의해 그들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예측할 수 없다. 실체가 불분명한 '총리단'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돌아간다. 한 쪽 모서리만 떼어주고 자신들을 못살게 구는 나라에 항의라도 하면 좋겠는데, 가진 게 없어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이들은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들의 삶이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주민'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즉 가진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넘쳐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뿐이다. 이런 무력하고 한숨만 나오는 '사하맨션' 사람들의 인생이 현 한국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대부분의 삶은 그래도 이렇게 극적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지만. 영 딴 판의 장소라고 말하기엔 소설에서 불쑥불쑥 내가 살면서 마주친 사람들이 급작스럽게 모퉁이를 돌아 튀어나온다.

"타운에서는 아기가 버려지지 않는다. 타운은 생명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누구라도, 심지어 사하라도 아무 조건과 부담 없이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며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다(243p)",라는 대목에서 우리의 현재와 다른 면을 가끔은 목격하기도 했다.

소설의 말미에 이야기가 살짝 급커브를 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주고 싶은 힌트는 이 소설에 등장한 '영감'의 대사 중 일부이다.

"거기 없었어. 따라가도 없었어. 그러니까 항상 진짜가 어디 있을지 생각해야 해."(p329)

사실 '진실의 추구'라는 주제는 여러 소설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주제에 도달하기까지 작가가 내놓은 이야기가 나름의 스릴을 가지고 있다.

소설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까 '국정농단 사태'가 문득 떠오른다. 모래알 같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뭉쳐졌고, '진실' 하나만을 바라며 달려들었다. 세상이 그 이후로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세대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변혁을 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소설을 완독하고 나면, 지금 내가 한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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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법 수업 -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한 천 년의 학교
한동일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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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법 수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한동일' 교수님의 저서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었던 <라틴어 수업>을 통해 교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진심으로 존경하는 어른들 중 한 분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책에서 교수님이 어떤 분인지 느낄 수 있다. 글은 말과 달리 여러 번 곱씹고 나서야 튀어나오지만, 그래도 개인의 전부를 가릴 수는 없다. 문장 전부에서 따뜻함이 느껴지고, 함부로 지적하는 어른이 아니라는 게 자연스레 보인다. <로마법 수업>을 주문하고 나서 <라틴어 수업>을 읽었던 때를 떠올렸다. 평소에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특히 여러 언어의 근간인 '라틴어'를 꼭 배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라틴어'는 구사할 줄 아는 사람도 몇 없고, 가르쳐주는 데도 당시에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창 아쉬워하고 있던 때에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가 그 책을 발견했다. 책이 열렬히 사랑받던 때에는 그저 지나치다가, '라틴어'에 관심이 생기고 나자 주저 없이 집어 들었다. 유명한 '라틴어' 구절 몇 개라도 외워보자 싶은 마음으로 꺼내 들었다. 그런데 <라틴어 수업>에서 내가 발견한 건 도리어 '한동일' 교수님이 건네는 조용한 다독임이었다. 카톡 프로필에 폼 나게 '라틴어'로 몇 자 끼적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그 책을 읽어봐도 좋다. 하지만 생에 대한 위로를 더 많이 얻게 될 것이다. 대학교 때 나는 늘 조급하고, 보이지 않는 위협에 불안을 느끼던 학생이었다. 빨리 무언가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런 내게 <라틴어 수업>은 그 수업 하나를 들으러 편입을 하더래도 가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수업이었다. 저자가 건네던 말들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뻔한 듯하면서도 '라틴어'로 건네기에 특별해서 좋았다.

"오늘날 우리가 로마법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단지 현재 법의 원천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로마법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바뀌지 않는 환경과 존재의 태도를 돌아보고, 법을 통해 역사를 인식하고자 함이지요. "(p201)

그러니까 '한동일' 교수님의 진정한 덕후로서 내가 <로마법 수업>을 건너뛰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의 이전 작품이 '라틴어'라는 희귀한 매개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구원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로마법'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다르지 않음을 보고, 더 나아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논의한다. 서양의 법이고,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번 수업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한동일' 교수님이 현재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문제들을 선정해 '로마법'과 '로마'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는 덕분에 시간의 간극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문제들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에 좌절하게 된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인권', '계급', '여성', '결혼','낙태' 등이다. 특히 '간통'이나 '낙태' 등의 문제는 한국 내에서도 서로 다른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법'의 지혜를 절실하게 갈구했다. 하지만 역시나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기가 어렵다. 세상은 절대 흑백논리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토의로 나름의 적절한 협의점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로마법 수업>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부분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각 장마다 서로 다른 주제를 설정해서 '로마법'을 공부하지만, 결국 "Homines nos esse meminerimus(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_키케로)"의 구절로 요약해볼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여겨야 한다, 고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로마법'을 통해 가르치려던 것이 '인간성'이었음을 에필로그에서도 알 수 있다. "로마법 수업은 인간학 수업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더욱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투쟁이자 꿈입니다(231p)",라는 구절에서 저자의 주장이 잘 드러난다. '법'이라는 과목은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는 일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냉정하고 날카로운 주장들이 오고 가는 수업인 줄로만 알았다. '라틴어'라는 생소한 언어에서 특유의 따뜻한 인간성을 드러냈던 '한동일' 교수님이 이번 책에서마저 주위를 살피고 배려할 줄 아는 시선을 가르친다. 내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책에서나마 이런 좋은 수업을 청강할 수 있다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에서도 실제 강의를 하듯이 글이 이어지는데,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또 다른 포인트는 에필로그 이후 등장하는 '로마사'와 '라틴어'에 관한 설명들이다. 깨알같이 적힌 글씨들에서 '한동일' 교수님의 강의에 대한 열정이 엿보인다. 학교를 다녔던 때에 이런 강의가 있었다면 교수님 사무실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했을 것 같다. <라틴어 수업>, 그리고 <로마법 수업>이라는 두 강의를 수강했으니 나도 교수님의 제자인 거라고 우겨보고 싶다.

+) 혹시 '이정명' 작가의 <밤의 양들>을 읽으려고 계획 중이거나, <밤의 양들>을 읽었지만 그 세계관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하는 독자가 있다면, <로마법 수업>을 참고해도 좋겠다. 본 책에도 '로마'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꼭 일부분을 집어내라면, 211-212p에 예수가 받았던 '십자가형' 편을 읽어보면 된다. 나는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덕분에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밤의 양들>은 좀 헷갈렸을 수도 있을 테니까. 참고사항으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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