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엘 다녀왔어. 내년이면 열일곱 살이 되는 큰조카와 한 침대에 누워 불을 끈 채로 밤새 수다를 떨었지. 친구, 학교, 진로, 가족, 요즘의 관심사와 책 이야기 등등 그동안 쌓였던 얘길 나누느라 잠 잘 생각도 안했어. 하, 근데 말이야, 큰조카가 태어나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일곱, 세븐틴이라니! 감개무량하더군.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을까? 내가 열일곱 살이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때의 나는 어땠었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뭘 제일 하고 싶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어. 근데 이만큼 세월이 흐르고 보니, 제일 아쉬운 것은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는 것이더라고. 아마도 책하고 꽤나 친한(!) 직업을 가진 탓도 있고 주변에 온통 책, 책, 책이야기 하는 친구들밖에 없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몰라. 책 좋아하는 친구들은 어릴 때 나무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상상력을 키웠다는데… 그런 추억을 얘기할 때마다 할 말이 없는 나는, 어릴 때 나도 책을 열심히 읽었다면 어땠을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그래서 만약 지금의 ‘내’가 열일곱 살의 ‘나’에게 책 선물을 한다면, 어떤 책을 할까, 어떤 책이 지금의 나와 또 다른 삶을 살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 다섯 권, 바로 이 책들이야.
열일곱 살의 내게, 열일곱 살이 될 조카에게,
세상의 모든 열일곱 살에게도 선물해주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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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 책은 토머스 하디의 《더버빌가의 테스》야. 열일곱 살에 처음 《테스》를 읽은 친구는 그땐 '무자비할' 정도로 소녀의 편견을 가지고 《테스》를 읽었대.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최근에 《더버빌가의 테스》를 읽으면서 진심으로 테스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 아직은 어린 네가 비극적인 테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지금은 소녀의 마음으로, 나중엔 여인의 마음으로 읽어 보면 사회의 인습과 편협한 가치관이 한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 다른 느낌으로 알게 될 거야. 또 한 편의 서사시와 같은 문체와 그 당시 농촌 풍경을 묘사한 토머스 하디의 글은 10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도 읽히고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어. 고전의 힘이랄까, 그걸 모르고 자랐던 열일곱의 ‘나’에게, 그래서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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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책은 한창훈 작가의 《꽃의 나라》야. 이 책엔 열일곱 살의 소년이 나오지. 내가 이 책을 열일곱 살의 ‘나’에게 선물하려는 이유는 부끄러워서야.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하더군. ‘동시대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어쩜 넌 그렇게 모를 수가 있었냐.’ 고. 그 말이 날 많이 부끄럽게 했어. 열일곱 살의 나와 열일곱 살이던, 그곳의 소년.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한둘은 아니겠지만 무의식적으로 모른 척하진 않았을까, 생각했어. 어려서라고 말하기도, 몰랐다고 말하기도 미안한 일이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정치적이든 아니든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이 ‘무관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러니 열일곱 살의 너는 꼭 잊지 말기를 바라. 시대의 아픔과 사건들 속으로, 비록 직접 뛰어들어 참여하고 행동하지 못하더라도 관심만이라도 가지길. ‘사실’을 알려고 하는 태도만이라도 유지하며 살길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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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선물하고 싶은 이 책은, 어쩌면 열일곱 살의 ‘나’에게 가장 주고 싶은 책일지 모르겠어. 정영 시인의 《지구 반대편 당신》이라는 여행 에세이야. 시인인 저자가 지구 여기저기를 다니며 쓴 글을 모았어. 이 책엔 여행 책이면 으레 나오는 여행지의 정보나 관광지가 나오진 않아.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이 시인의 감성적인 글과 어울려 책을 덮는 순간, 어디든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열일곱 살은 꿈꾸기 좋은 나이. 이 책을 읽고 세상의 문을 열고 나갔을 때 경험하게 될, 보석과도 같은 순간을 꿈꿔보길 바라. (사실, 지금의 나는 세상의 문 앞에서 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제일 아쉽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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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책은 바로 정끝별 시인의 《시심전심》이야. 시는 마음을 읽는 거래. 시를 읽으면 왠지 차분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져. 좀 감상적이 되기도 하고 때론 압축된 짧은 시를 읽으며 가슴 아파하고 세상에 분노하기도 하지. 그동안 시를 어렵게 생각했었어. 아마 마음을 열고 시를 읽은 것이 아니라 공부를 위해 시를 먼저 접했기 때문일 거야. 은유로 가득한 시, 이해는커녕 오히려 시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한 요인인 것 같아. 그래서 시인의 말처럼 ‘무엇보다 ‘교과서에 실린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정말로 좋아할 수 있도록, 시의 맛과 시의 정신을 느끼면서 풍요롭게 ‘맘껏’ 상상하며 읽어내야 하는 일‘ 인 것 같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열일곱 살 땐 왜 이렇게 ‘친절한‘ 책이 없었을까, 아쉬웠어. 시인이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보다는 마음으로 시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그러면 훨씬 감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아, 이제 마지막인가. 이번엔 뜬금없지만 만화를 선물할게. 요시다 아키미의 ‘바다마을 다이어리’ 시리즈 세 권이야.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 《한낮에 뜬 달》,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 이 아름답고 따뜻한 만화는 열일곱 살인 너에게도 그대로 그 마음을 전해줄 거야. 자매가 없는 ‘나’는 분명 부러워하며 읽을 테지만, 네 자매의 평범하지만 소소한 일상을 들여다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지도 몰라. 살아 보니 인생이란 별 게 아니더라고. 뭐든지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더라. 그러니 항상 따뜻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좋겠어. 난 열일곱 살의 ‘내‘가 공부만 하고 교과서만 읽는 소녀가 아니길 바라니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인성이고 마음이라는 것. 어느 정치인만 봐도 알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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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섯 권의 책을 열일곱 살의 ‘나’에게 선물하면서 곰곰 생각해봤어. 정말 이 책들을 열일곱 살에 읽었으면 지금과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았을까? 물론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쨌든 책은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야. 책이 주는 정보와 지식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지. 열일곱 살의 ‘내’가 들으면 좀 재수 없는 말이지만 나이가 들어 보니 그렇더라. 어른들 말씀, 틀린 게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 책 많이 읽어. 난 세상의 모든 열일곱들이 항상 밝고 맑게 자라주길 바라. 그리고 많은 꿈을 꾸길 바라기도 하고 말이야.
그럼 이젠 안녕, 열일곱의 꿈 많은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