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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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지극히 평범했다.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 전부였으니까. 성적과 친구와의 사소한 다툼을 제외하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 어른이 되어 누구나처럼 결혼하고 아이 낳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사는, 동화 속 같은 삶이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처럼 평탄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대학에 실패하는 순간까지였지만 그럼에도 지방 작은 도시에서의 삶은 그랬다. 주변의 친구들도 다 그만그만했으므로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아이는 소설이나 드라마에 존재한다고 믿을 만큼 순진했었다. 그래서 아마도,   

꽃의 나라》(연재 명: 남쪽 역으로 가다) 연재가 시작되었을 때, 한창훈 작가의 시작 말에서 ‘시민사회 구성원의 덕목’이니 ‘미움의 힘’이니 하였어도 그저 단순하게 자신의 삶이 조금 투영된, 고교 시절의 이야기를 하려나보다, 했다. 고등학생의 생활이라는 게,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음직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성장소설이란 늘 그랬으니까.  

소설은 열일곱 살의 소년이 고향인 항구를 떠나 큰 도시로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도시로의 진학은 가정폭력의 주범인 아버지 곁을 떠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늘 화난 얼굴로 눈치를 보게 만든 아버지, 그 아버지 곁을 떠나 큰 도시로 온 첫날, 소년은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다며 좋아한다.  

“아버지와도 그랬다. 
얻어맞을 각오를 했지만, 처음으로 내 주장을 드러낸 게 이 도시의 고등학교로 가겠다고 말한 거였다. 아버지는 가족을 보이는 곳에 두고 싶어했기에 나를 항구의 고등학교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것이 그의 통제방법이었다.
앞에만 서면 입이 얼어붙곤 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그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작이 어렵지 한번 시작하자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말이 연이어 나왔다.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뭐 그런 식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멀리 가야 했기에 뒤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항구의 고등학교에 관련해서 들려오는 몇몇 미덥지 못한 소문과 이 도시가 이른바 교육의 도시로 이름나 있다는 점이 도움이 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허락을 했고 나는 보는 눈만 없다면 백 미터쯤 허공에 떠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의 해방감 이면엔 또 다른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맞은 이유라면 ‘단 하나, 멀고 낯선 곳이기 때문이다. 군대처럼’. 추첨이었지만 폭력의 횟수와 강도가 전국 3순위 안에 든다는 고등학교, 다른 곳에서 제적당한 아이들까지 모두 받아주었기에 학교에는 바보 아니면 깡패인 아이들로 바글거린다는 곳. 그 학교에서의 생활은 이미 예정된 폭력이었을 거다. 매를 들어야만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란다고 생각하는 교사에겐 어떤 이유에서든 매가 날아왔고, 학교 내 폭력조직은 그나마 대응할 수 있는 조직으로 들어가면 맞지는 않았다.  

가정폭력, 이어지는 학교와 사회폭력까지, 언뜻 느끼기엔 무거운 주제이지만 고통스러움 속에서도 유머는 늘 존재하듯이 소설 속 한창훈 작가의 위트는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의 넋두리에 낄낄거리고, 동네 건달 진구와 벙어리 여자의 묘한 관계에 호기심이 동하며, 고향 친구인 영기와 진숙의 순수한 사랑을 부러워하는 인호와 소년의 행동에 웃음이 나온다. 또 건들거리는(!) 박정화와 키스를 해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찬 소년의 엉뚱한 행동에서 열일곱 살, 소년의 생활도 여느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래, 열일곱 살 소년의 삶에 폭력의 물이 들었다고 해도 누구나 다 똑같아, 라고 생각할 무렵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참혹한 폭력이 다가왔다.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군인들은 뛰어내리자마자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먼저 회사원과 중년 남자들이 얻어맞고 나자빠졌다. 중국집 배달부는 배달통과 함께 넘어졌다. 자전거 바퀴가 허공에서 돌고 우동 국물이 쏟아졌으며 뒤이어 머리통이 깨졌고 군화에 짓밟혀 다리가 부러졌다. (…) 언니의 손을 잡고 가던 소녀가 넘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녀를 일으켜세우는 언니의 어깻죽지를 군인이 곤봉으로 때렸다. 언니는 소녀 위로 넘어졌고 다른 군인이 자매를 밟고 넘어갔다. (…) 한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뒤통수를 쳤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감싼 손에서 붉은 피가 떨어져내렸고, 그 속에 동그란 눈알이 들어 있었다.“ 

자국의 군인이 아무 죄도 없는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이라면 자국의 군복을 입은 저들이 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가르쳐주는 이도 없이 시민들은 맞고 죽어야 했다. 소년은 꿈속에 들어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꿈을 드디어 꾸고 있다고.  

연재를 하는 동안 조금씩 폭력에 물들여가는 소년을 보면서도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몰랐다. 그저 학교 폭력과 연관된 이야기이겠거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2부로 넘어가면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일은 오래 전의 일이고, 그동안도 몰랐던 일은 아니었지만 인호 아버지의 말처럼 내가 경험하지 않았고 ‘죽지 않았’으니 ‘레크리에이션’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그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지. 마치 내가 살았던 시대가 아닌, 오래 전 역사를 공부 하듯 그렇게 넘기고 말았던 일이었다. 한데 이토록 생생하게 내 눈앞에 그때의 상황이 재연되면서부터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그리고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아니, 난 그동안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구나. 

한창훈 작가는 매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주인공처럼 우리는 가정과 사회의 폭력은 피하기도 하고 합의도 하면서 적응해나가지만 무자비한 국가의 폭력을 만나면 철저하게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연합뉴스) 

꽃의 나라》는 그런 소설이다. 그때의 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겐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전해 위로를 주고, 그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와 같은 사람에겐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고는, 있으라고, 말해준다.  

책을 다 읽은 후 소년이 그곳에서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니, 어차피 일어난 일이었으니 친구가 죽고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직접 보면서 받았을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살아왔을까, 마음이 아팠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국가의 폭력을 볼 때마다 소년은, 그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또 어떤 심정일까? 

오월은 꽃이 피는 계절이다. 유난히 흰 꽃들이 많이 핀다고 한다. 이제 그 꽃들을 보면 그 아름다운 봄에 피지도 못하고 쓰러져간 소년과 소녀들이 생각날 것 같다.  

"사람만이 먹이나 환경과는 상관없이 같은 종족에게 이런 상처를 남긴다. (...) "하지만 그것을 사람의 특징으로 삼는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겠니? 그러니 사람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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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8-26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아주 소문난 깡패학교였습니다.
선배나 동급생들의 폭력도 심했지만, 선생님들의 폭력도 장난아니었죠.
학교에서는 비교적 조용하고 모범생이었던(밖에서는 안그랬단 얘기죠! ^^)
저도 걸핏하면, 아무런 이유없이 맞곤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니,
전경들이 두들겨 패고,
군대를 가니 고참들이 두들겨패고,
사회인이 되고나니 용역깡패들이 두들겨 패고!

댓글 달면서 생각해보니 참 많이 맞고 살았네요.

readersu 2011-08-29 10:45   좋아요 0 | URL
어이구, 만만찮은 감은빛 님!
꼭 읽어보세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