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다가 책 속의 책을 발견하는 일은 늘 재미있다. 글이 재미있으면, 그래서 그 책을 읽은 독자가 구입하고 싶게 만든다면 글을 쓴 작가로서는 독서진흥(ㅋ)을 위해 한 몫 단단히 한 셈. 또 책을 읽으며 책 속의 책을 다 찾아보는 독자 역시 용하다(나 같은 사람 꼭 있다^^). 물론 다 구입을 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기록해두었으니 기억하고 있다가 누군가 또 여기에 있는 책을 한 권 추천하거나 언급을 한다면 당장 사러 가겠지. 아무튼 아래의 책에서 나를 유혹케 한 책은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였다. 내용이 많이 언급되기도 했고 문장들이 아주 맘에 들었다. 한데 책이 없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리라!
아래의 글들은 강영숙 작가가 <라이팅 클럽>에 쓴 글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책만 달랑 올리기 뭐해서 그 책이 언급된 부분의 글들을 같이 실었다. 강영숙 작가의 책은 처음이었는데 맘에 들었다나^^; 나의 트윗 친구이기도 한(그래서 알게 된 작가였다-.-;; 그제야;) 그녀가 얼마 전에 <세설>을 읽고 싶어한다는 나의 글을 보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를 추천해주셨다. 오늘 그 책이 도착했다. 표지와 편집만 보고도 지금 난 그 책에 빠져들었다. 아, <세설> 주문해야쥐.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를 들고 다니면서 삼십이 되면 자살할 거라고 떠들었고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예수의 나이는 넘기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다. 어디 나만 그랬겠나! 유치하고 진지한 성품의 문학청년들은 사실 다 그랬다.
우리는 같은 책을 정해 같은 날부터 읽기 시작했다. 동성애자였다는 토마스 만이 쓴 <마의 산> 같은 난해하고 긴 작품들일수록 감상을 나누고 토론하기에 정말 좋았다. 우리는 그 소설의 공간인 황량한 결핵요양소 시나토리움의 단골 고객이었다. 우리는 늘 외국 문학 작품들만 선택했고, 말이 토론이지 무조건 훌륭하고 감동적이라고 추켜세우기 바빴다.
그때 내가 읽다 말고 탁자 위에 올려둔 책은 프랑스의 노동운동가이면서 철학자인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였다. 사실 뭘 알고 샀던 건 아니었다. 단발머리에 수척한 얼굴, 안경 너머로도 엿보이는 따뜻하고 선한 눈빛, 칼라 깃이 둥근 블라우스를 입은 저자의 모습이 매우 철학적이고 멋져 보여서였다. 책을 고르는 이유라는 건 특별한 게 아니었고 겨우 그런 거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언제 그런 인간이 있었는지, 그가 남긴 모든 아우라가 머릿속에서 통째로 사라진 뒤 어느 날 갑자기 그 손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미술사학자인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이라는 책을 머리맡에 두고 읽고 있었다. 책 끝의 부록인 _손을 예찬함_이라는 글을 읽을 때 글짓기 교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그의 손이 불쑥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소원은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주인공이 하는 말처럼 "더 이상 끔찍한 가난의 숨결"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그 소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난에 대한 통렬한 인식이 강도를 더해가며 드러났다. 나도 가난에서 조금만 벗어나게 된다면 앞으로 다 잘하겠다고 다짐도 했고 기도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걸 보면 세상의 그 어느 신도 내 기도를 듣지 못했던 것 같다.
내친김에 여관 갈 돈이 없는 가난한 연인들 사이에 "사랑을 나눌 우리들만의 방이 필요해"라는 말을 유행시킨 폴란드의 소설가 마렉 플라스코의 <제8요일>이라는 소설을 들고 다니기까지 했다. "방이 필요해, 방이 필요해"라고 떠들고 다니면 왠지 근사해 보였던 것 같다. 아무 대책 없는 청춘 남녀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방이 갖고 싶었다. '8요일'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날인 동시에 자신들이 사랑할 수 있는 날인 것이다. 두 사람이 바르샤바의 이곳저곳을 떠도는 며칠 동안의 사랑 이야기, 아니 세상과의 싸움에서 진 청춘 남녀의 이야기였다.
글쓰기 모드의 필요조건이라는 게 있을까. 금방 생각나는 건 일단 날씨가 너무 더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닥터 지바고>의 유리 지바고를 상상해보면 좋겠다. 날씨와 소설은 무가 뭐래도 상관관계가 있다. 그리고 너무 배가 불러도 안 되고 너무 배가 고파도 안 된다. 배가 부르면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배가 고프면 꼬르륵거리는 소리 때문에 글 쓰는 데 지중을 못 한다.
K와 내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었었나.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녀를 ‘울프 여사’라고 불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서름이 넘어서 읽은 <댈러웨이 부인>을 더 많이 기억한다. “꽃은 자신이 직접 사겠다고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로 시작되는 1920년대의 영국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꽃을 사기 위해 집을 나와 런던 구석구석을 걷고 또 걷는다.
R은 당당하게 말했다. “삼만 원만 갖고 나와.” 나는 소년원에 들락거리는 애들이 주인공이라는 <티보 가의 사람들>이란 프랑스 소설책을 사기 위해 모아두었던 돈을 꺼내 들고 종로로 나갔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R을 만나고 싶었다.
접수원이 뭔가를 기록하는 동안 눈을 돌려 그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책을 보았다. 책 표지는 요나의 고래 뱃속 같기도 하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 그림 같기도 했다. 굉장히 거친 판화 그림이었는데 책 제목은 <강철군화>였다.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작가인 잭 런던이 1908년에 발표한 소설이었다.
어쩌면 그즈음에 내가 빠져 있던 책이 시몬느 보봐르의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책 표지에 굵은 타이포로 찍힌 아홉 개의 글자는 사실 사람들이 볼까 봐 공공장소에 들고 다니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인간’은 한자로, ‘모두가’는 붉은 글자로 인쇄되어 있어서 굉장히 유치했다. 그냥 혼자서 술을 마실 때나 정독도서관 앞마당에 있을 때 보면 딱 좋은 책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가지 않아 나만의 긴장 푸는 방법을 찾았다. 그때까지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는 책, 아니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책 <돈 끼호테>를 읽는 것이었다. 나이 오십이 넘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거리로 나선 늙은 남자. 본명이 께사다인지, 끼하나인지 하는, 왠지 앞머리칼이 뭉텅이로 빠지고 하나도 없을 것만 같은 우스꽝스러운 남자가 등장해 온갖 해괴망측한 일을 다 벌이고 다니는 이야기였다.
“내 얘기 좀 들어볼래.” 김 작가가 한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파울라>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파울라, 엄마 얘기를 들어보겠니.” 그러나 파울라는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고 엄마는 딸이 깨어나길 바라며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누워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김 작가였지만 언젠가 잠결에 나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술에 취해 들어왔을 때 발로 이불을 걷어차며 이마에 손을 얹은 책 분명 그랬다. “야, 내 얘기 좀 들어봐.”
위의 글 인용은 모두 강영숙 작가의 <라이팅 클럽>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