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eadersu > 나의 가슴이 요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지만,
9월 15일 수요일, 상수 <이리카페>에서 장석남 시인의 낭독회가 있었다. 요즘 시심이 발동했는지 줄기차게 시들을 읽고 있는데, 우연히 집에 있던 그의 시집 『젖은 눈』을 읽으며 감동을 먹었더랬다. '아니, 이 시집의 시들을 왜 이제서야 읽은 거야?' 물론 그 전에도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아, 좋구나!'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땐 그 뿐이었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언제나처럼 시를 읽을 때 그때 뿐이었으니까. 한데 정말, 요즘은 시를 읽으면 마치 습자지에 물이 스며들듯 시들이 내 가슴에 스며들고 잉크가 번지듯 마음 속으로 그 시들이 번져 들어온다. 그런 것 같다. 시든 뭐든 다 때가 있나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는.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장석남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를 출간했다는 소식과 낭독회 소식이 들렸다. 여럿 시인의 낭독회를 가보긴 했으나 시인의 단독 낭독회라곤 올 봄에 있었던 이병률 시인의 낭독회가 처음이었기에 시심이 충만한(!) 이때 낭독회를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렇게, 낭독회를 가게 되었는데 좋더라. 시인의 목소리로 시낭송을 듣는 일은.
장석남 시인과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둘이서 말을 나눠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얼굴을 보면 아는, 그런 사이?(이건 어떤 관계인지 나도 모르겠다^^) 작년에 봤을 때보다 살이 쏙 빠져 있었던 것 같고(우연한 자리에서 너무나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다), 교수님이면서도 조금 어색해했던 것 같고, 하지만 낭독은 멋지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가 새 시집의 제목을 『뺨에 서쪽을 빛내다』라고 한 이유는 저녁 노을의 부끄러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거란다. 고향이 서쪽인 그는(인천 덕적도) 떨어지는 해를 보며 자랐는데 살아온 정서가 그 방향인지라 이 세상 살아가는 일이 부끄럽기도 하고 서쪽을 빛내야 하기도 하다는 것??(이런 제대로 듣지 않은 티가 나신다) 암튼, 난 그런 말보다 기억에 남는 말이 해질 녘의 붉은 빛이 서쪽을 향한 뺨을 빛나게 해준다는 말. 그런 의미. 그런 게 훨씬 좋다. 그래서 나도 가끔 해질녘에 공원을 돌며 뺨을 서쪽으로 비춰봐야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으니까(그딴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시인의 말이 남아 있지 않는 거-.-;)
대충 기억나는 말들은 이런 것,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막막하다. 영향 받은 시인은 모두인 것 같고 한때는 김수영의 흉내를 노골적으로 낸 적이 있다. 내 인생의 시는 없는데, 그렇다면 그 시를 '내'가 써 봐야야겠다. 사실 그는 자기가 쓴 시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기도 했기 때문이란다. 시 속의 '나'는 '내'가 지향하는 '나'라고 했다. 30대로 돌아간다면 그는 스님이 되고 싶다고 했고(문득 심정적으론 불교에 관심이 있다는 또 다른 시인이 생각났다) 집필 습관 따위는 없으며, 시란, 무언가를 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비춰 보는 거울인 것 같다고 했다.


역시 시인의 시 낭송은 듣기에 참 좋다. 소설 낭독도 나름 나쁘지 않은데 짧은 시를 읽어주는 그 강렬함! ㅎㅎ 좋았다는 얘기다. 아참, 이번 낭독회에는 '하이 미스터 메모리즈'가 나와 노래를 불렀다. 언젠가 북콘서트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는데 꽤 웃겼고 불러준 노래는 좋았다. 이날도 그는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기억에 남는 노래는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숙취' 풀어야 할 숙취는 없지만 이 노래는 재미있다.
이날 낭송한 시들은 「서쪽1」, 「부뚜막」, 「오막살이 집 한 채」였다. 새 시집을 읽지 않고 간 상황이어서 처음 들은 시들, 좋더라. 특히 마지막 「오막살이 집 한 채」는 정말 좋았는데, 낭독하는 모습 녹음하려다 그만 놓쳐버리고 말아 아쉬웠다. 그 시는 이런 내용!
나의 가슴이 요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지만 저렇게 멀리 있는, 저녁빛 받는 연(蓮)잎이라든가 어둠에 박혀오는 별이라든가 하는 건 떨게 할 수 있으니 내려가는 물소리를 붙잡고서 같이 집이나 한 채 짓자고 앉아 있는 밤입니다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 할지 사원이라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야 할지 여전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나의 가슴이 이렇게 떨리지만 떨게 할 수 있는 것은 멀고 멀군요 이 떨림이 멈추기 전에 그 속에 집을 한 채 앉히는 일이 내 평생의 일인 줄 누가 알까요


낭독회가 끝나고 사인을 받았다. 먼저 인사를 하니 알아보더라. 역시 말은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사이지만 얼굴은 아는 사이?!^^; 자신의 이름만 사인을 해주려는 시인에게 「맨발로 걷기」에 나온 "생각"과 관련한 문장을 써달라고 하니 급 당황해하는 모습이라닛! ㅎㅎ 그도 그럴 것이 앞에 있는 분들은 모두 이름과 날짜, 시인의 사인만 받았기 때문. 나는, 당황하거나 말거나(ㅋㅋ) 적어온 문장을 들이밀며 적어달라 했다. 사실은 가져간 다른 시집에도 적을, 다른 문장이 더 있었는데 너무!! 당황해하셔서 더 이상 받지 못했다는. 억지로라도 받을 걸 그랬나? 좀 아.깝.다.
사인회가 끝나고 어쩌다가 뒷풀이에 남아 드문드문 대화를 하다가 왔다. 그도 나도 얼굴만 알던 사이라(^^) 대화의 도마 위엔 엉뚱한 녀석들 셋! -.- 조만간 김중혁 작가와 같이 북콘서트를 한다고 하든데, 그것도 재미있겠다!
불을 끄면
불을 끄면 모두 눈을 달고 살아나서 무서웠지
눈 감았지
철이 들면서 불을 끄면
다 보이지 않으니 좋다,
웃음이 솟아도
눈물이 불쑥 와도
좋다,
그렇다가도
끝내 다시 불을 켜서 
한꺼번에 서른도 마흔도 또 쉰도 먹는 날이 있었지
불을 끄면
그대로 새벽 포구와도 같아져서
미끄러지는 미명들을 받아안고
맥박을 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