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면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 있었다. 매년 읽어야지 하다가 11월이 지나가 버리면 왠지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책꽂이에 고이 모셔두었던 책, 바로 한스 에리히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이다. 도대체 늦어도 11월에는 뭘 하겠다는 것일까? 광고 문구를 못 본 것은 아닐 텐데도 오늘에서야 뒤표지의 광고 문구를 보고 뜬금없이 ‘아!’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까의 그 감탄사는 그런 경험이 없는 탓에 안타까운 감탄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겨우 몇 페이지의 글을 읽었을 뿐인데도 밑줄은 사정없이 그어진다. 요즘 내가 외로운 걸까, 아님 한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내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좋을 만한 남자를 아직 만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쓸쓸한 가을이 더욱 쓸쓸해진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나는 책, 바로 『마담 보바리』다. 『늦어도 11월에는』과 비교해본다면 조금 다른 과정을 겪고 있지만 결론은 같다. 어느 시대라고 할 것 없이 그렇다. 그리고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처럼 ‘통속적인’ 소설의 결말은 항상 비극적이라는 것이다. 로맨스라고 말하기엔 마담 보바리의 결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어느 부분에서는 살짝 추한 느낌이 들 정도로 통속적이다. 허나 마리안네의 경우엔 그것과 좀 다르다. 비록 비극적인 결말이 되고 말지만 그들은 진정 서로를 위하고 사랑을 했다. 즉 불륜이 아니라 로맨스인 셈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대표할 만한 문구인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가 이해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현실이 아닌 소설 속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는 인색하다. 절대로 해피엔딩을 만들어주진 않는다. 아니 어쩌면 독자들이 그걸 거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 마저 해피엔딩이면 그게 뭐가 흥미로울 것인가. 비극적이어야만 그 사랑이 절절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래서일 것이다.
『마담 보바리』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책이다. 비슷한 설정이지만 또 다른 결말을 말하는 『비틀거리는 여인』, 안정되고 평안한 결혼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며 비틀거리는 여인을 그냥 나둘 남자는 없다. 또 절대로 외간 남자에게 몸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세스코에게 있어 몸을 허락한다는것은 자신의 남은 삶을 그 남자에게 거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삶은 세스코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술술 풀려나갈 수 있을까? 돈 많은 부잣집 며느리, 부족할 것이 없을 듯해 보이지만 언제나 늘 그렇듯이 외로운 아내. 그런 까닭에 미시마 유키오 역시 플로베르와 마찬가지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현실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그들은 과연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일탈이었을까?
달콤한 로맨스를 담은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으나,『늦어도 11월에는』는 오히려 불륜과 비극적인 결말을 다룬 책들만 떠올리게 했다. 제목이 주는 야릇한 느낌으로 잡은 책. 책을 다 읽고 다른 책을 떠올렸다면 달라졌을까? 그건 읽고 난 후에 고민해봐야겠다. 어쨌거나 “늦어도 11월에는” 『늦어도 11월에는』을 꼭 읽어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은 나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