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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오늘로 나는 책읽기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정독을 안 하고 다독을 한다. 라는 그럴 듯한 핑계를 대며 일 년 동안 2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그런데 도대체 난 뭘 읽은 걸까? 생각해보면 나의 독서기는 순전히 now!! 바로 그 순간뿐이었다. 그 찰나적인 순간이 지나면 나는, 다 잊어버리고 만다. 그게 책읽기의 순서마냥,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처럼 깡그리, 싹, 다, 어김없이…….
그래도 정혜윤PD(어쩐지 PD라는 직함을 꼭 집어넣어야 이름이 완성 되는 것 같다;;)의 이 책『침대와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나만의 프라이드가 있었다.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밑줄 긋기와 옮겨 놓기도 열심히 했고, 책을 읽고 나면 잘 못 쓰는 서평도 읽은 티를 내기 위해 꼬박꼬박 썼으며, 친구들에게 책 읽은 표도 무진장 낼만큼 내고 다녔다. 그런데……정혜윤PD가 내 코를 완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도대체가 나는 무엇을 읽은 것일까? 『브루클린 풍자극』의 폴이 택시기사이면서 책을 좋아하는 박학다식한 남자라는 것은 기억이 나는데 체중이 20킬로쯤 평균치를 초과한 올챙이 배가 나온 남자라는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 읽어주는 남자』를 너무나 감명 깊게 읽고선 만나는 친구들마다 읽어보라고 권유했으면서도 '그'가 황달에 걸려 길거리에서 구토를 하다가 '한나'의 도움을 받은 것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를 쓴 실비 제르맹이 카프카의 단편 「석탄 통에 걸터앉아」를 인용하며 쓴 문장은 기억조차 없으며, 누군가에게 들은 셈으로 치던 제랄의 사랑고백을 나 역시 큰소리로 다 읽고 나서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렇게 멋진 문장을!!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왜? 말 그대로 좌절!!
그러자 이젠 얄밉기 시작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본 그는 대체로 잘 탄(?) 갈색 피부를 가져서 섹시해보였고, 산뜻한 헤어스타일은 문체에 드러나듯 통통 튀는 듯 했으며, 나보다 젊기까지 했는데(누군들 나보다 안 젊겠냐마는;;), 글마저 이렇게 예쁘고 질투 나게 잘 쓰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싶었다. 흥! 콧방귀가 나왔다. 그럼에도 글이 얼마나 예쁜지 말을 시켜보고 싶었다. 글처럼 말을 한다면, 그래서 글이 말이 되고, 말이 글이 되는 여자라면 난 내가 여자임에도 그녀를 사랑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찬 상영 중인 '인생, 그것은 단파 라디오였다'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트뤼포 걸과 그녀 사이에 끼여 우주로 날아가 보고 싶었다. 뭐 어쨌든;;(트뤼포 걸의 헌사는 또 어찌나 멋진지;;)
이제 백번 해도 소용없는 질투는 그만하고 책이야기나 해보자. 그의 책에 대한 호기심은 그야말로 다방면이다. 칼 세이건의 토성에서 우울을 이야기 하다가 수잔 손택의 에세이에서 발터 벤야민의 고백을 끄집어내고,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게 다예요』를 모든 문장에 넣어 복창을 하는가 하면, 『하이 피델리티』식의 리스트를 만들어 나도 어디 한번? 하고 따라하고 싶게 만든다. 쉼보르스카의 시를 읊다가 백가흠의 신문 단신 속 바탕화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다시 쉼보르스카의 시로 마무리 지을 줄 아는, 또 원본 책보다도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기도 한다는 정혜윤PD의 깊고 넓은 책사랑은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것 같다. 더구나 그는 시집은 시집대로, 인문은 인문대로 정혜윤식으로 만들어낼 줄 아는 마술사이니 그의 그런 재주가 책을 읽는 내내 부럽기만 했다.
이제 나도 그처럼 책을 읽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수박 겉핥기 같은 나의 책읽기를 이쯤에서 포기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다보니 12월이 끝날 무렵, 올해 읽은 책들을 죽 늘어놓고 난 올해 이렇게 많은 책을 읽었소! 하고 자랑질 할 꿈에 부풀었던 나는,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하는 깨달음만 얻었다.
어쨌거나 오늘, 그를 만나러 간다. 말을 글처럼 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내가 트뤼포걸과 그녀 사이에 끼여 우주로 날아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확인해서 뭘 어쩌자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불안하다. 정말 그가 말을 글처럼 하는 멋진 여자라면 나는 어떡하지? 상큼 발랄한 그의 젊음에 주눅이 들면? 아, 가지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