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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인 개가 짖을 때

정일근


묶인 개가 짖는 것은 외롭기 때문이다
그대, 은현리를 지날 때
컹! 컹! 컹! 묶인 개가 짖는다면
움찔거리지도, 두려워 물러서지도 마라
묶여서 짖는 개를 바라보아라, 개는
그대 발자국 소리가 반가워 짖는 것이다
목줄에 묶여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세상의 작은 인기척에도
얼마나 뜨거워지는지 모른다
그 소리 구원의 손길 같아서
깜깜한 우물 끝으로 내려오는 두레박줄 같아서
온몸으로 자신의 신호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묶인 개는 짖는 것이다
젊은 한때 나도 묶여 산 적이 있다
그때 뚜벅뚜벅 찾아오는 구둣발 소리에
내가 질렀던 고함들은 적의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불빛 같은 신호였다
컹! 컹! 컹! 묶인 개가 짖는다면
쓸쓸하여 굳어버린 그 눈 바라보아라
묶인 개의 눈알에 비치는
깊고 깜깜한 사람 사는 세상 보아라

 

 

 

 


정일근 시집,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문학사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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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작은 인기척에도/ 얼마나 뜨거워지는지 모른다"는
시인의 말이 엄살이 아니란 걸 안다.
그러나 젊은 한때, 그때 내게 들려오던
뚜벅뚜벅 발소리에 대해 나는 적의에 가득차 짖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컹컹컹 적의에 가득차 짖었다하여
내 눈빛이 젖지 않았었다고는 믿지 마라.
젖은 눈으로 흘러내리는 세상
흘러내리는 증오가 사랑이 아니었다고,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라고는 믿지 마라.

믿지 마라. 외롭다고 짖는 개를
믿지 마라. 젖은 눈으로 쳐다보는 개를
믿지 마라. 쓸쓸하게 굳은 눈으로 언제라도 앙 물어댈 수 있는 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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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06-11-2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배 한갑이 남았다는 계산이 어긋나고 똑 떨어졌을 때,
너무 따뜻해 보이는 창밖 햇빛에 손 내밀었을 때. 기대를 묵살하는 차가움.
그런 오후 2시에 읽는 이런 시..

waits 2006-11-2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감한 오후 2시였군요. 잘 지내시나요? ^^;;

rainy 2006-11-23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갑엔 그래도 초록색이 두어장 있고, 창밖이 번쩍 차가울만큼 집안은 그다지 춥지 않고, 이런 시의 신호에 반응할 만큼은 아직 살아 있고.. 이 정도면 잘 지내는 거죠? 브리핑을 보니 님도 오랜만에 좀 올리셨네요^^ 이제 거기로 읽으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