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를 리뷰해주세요.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9년 6월 어느날 페터 바이스의 연극 <마라, 사드>의 감동과 전율이 혹시나 공기 중으로 흩어질까 공연장을 나온 나는 숨을 한껏 들이쉰 채 하늘을 올려다 본다. 연극의 감동때문인지 서울의 탁한 공기마저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 공연장에서 보았던 현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의 등장까지도 이해가 될 정도로 어쭙잖은 아량마저 생긴다. <마라,사드>는 1808년 7월 13일에 15년 전, 그러니까 1793년 마라의 영면의 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드 사드의 연극이다.(혁명가 마라는 1793년 7월 13일 욕조 안에서 14일 프랑스 국민회의에서 연설할 원고를 쓰고 있던 중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암살되었다) 연극에서의 배우들은 샤량통 요양원의 환자와 수감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실제로는 같이 있을 수 없었던 마라와 사드가 서로 혁명에 대해서 논쟁을 하기도 한다. <마라, 사드>의 극중극은 1808년 7월 13일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것으로써 1808년은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1세로 집정한 지 4년이 지난 해이다. 이제 부르봉 왕조는 프랑스 혁명으로 무너지고 황제 치하에서 적어도 겉으로는 혁명의 슬로건이었던 자유, 평등, 형제애가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지만, 이 연극은 황제 치하에서도 민중의 처지는 크게 변한 것이 없으며 정체와 이데올로기는 기득권자들의 이익과 불이익의 문제인 것이지 민중들과는 큰 상관이 없음을 비판하고 있다. 2009<마라,사드>의 연출가 박근형은 "페터 바이스는 우리와는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그를 2009년 바로 이곳에 끌고 온 이유는 시대와 환경이 변해도 인간의 속성 속에 있는 그 무엇은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다. 연출가 박근형이 말한 것처럼 원작자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태어나 세계대전을 두번 겪고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나라에서 살았다. 그럼에도 그가 써내려간 연극 속의 상황과 대사들은 소통의 부재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한국 사회의 거울로써 섬뜩할 정도로 충분하다.  

 

너무나도 시기적절하게 6월에 대한민국에서 페터 바이스의<마라,사드>가 공연 되었고, 최규석의 <100도씨>가 출판되었다. 1987년 6월10일 아침 대한민국에서는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째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육사 11기 동기인 친구 노태우의 손을 치켜올려 권력승계의 절차를 밟은 '민정당 제 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이었으니 잠실체육관에서 전두환과 그의 친구인 노태우가 두 손을 마주 잡고 만면에 웃을 띠며 자신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군중들을 앞에 두고 꽃가루 세례를 받고 있었다. 같은 시간 비록 정치색 종교는 달랐지만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 를 주최하기 위해 모인 민주헌법쟁취운동본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날 저녁 6시에 사람들은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6월 항쟁의 막을 열었다. <100도씨> 작가 최규석은 항쟁의 막이 올랐을 때를 열번째 쳅터에 <100도씨>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100도씨의 뜨거운 열기는 노태우를 텔레비젼 카메라 앞으로 끌어냈다. 텔레비젼의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과 함께 구속자 석방과 김대중씨의 사면 복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지금까지는 6월 항쟁의 사회적인 기록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100도씨>를 6월 항쟁의 개인적인 기록으로 본다면? 

가난한 노동자집의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영호. 어릴 적 영호는 반공 웅변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반공소년이다.( 나도 반공소녀로 자랐다;;) 텔레비젼에서 데모하는 학생들을 욕하는 아버지 옆에서 영호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법관이 되길 바라시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심히 공부하여 드디어 1985년에 대학생이 된다. 나쁜 사상에 빠진 친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리라 결심했던 영호는 텔레비젼 속의 시위자들이 빨갱이 폭도가 아님을 알게 되고 자신을 위해 학업을 포기한 누나와 가족들을 생각해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자 한다. 하지만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권력이 빚어낸 현실은 영호를 더이상 방관자로 남겨두지 않는다. 또 한명의 개인적인 6월 항쟁의 참여자, 영호마더 장옥분여사. 산사람에게 밥 한끼 지워주었다는 죄목으로 부모를 잃고 아들 영호의 구속으로 전두환군사정권의 부당함과 비민주적 행태에 눈을 뜨고 어머니로써의 아들 응원을 넘어서(p.110~117은 최고!!)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한국의 민주화역사에 이름없는 참여자로 기록된다.이외에도 개인적인 참여자로 장남이어서 현장에서의 투쟁을 포기하고 같이 싸우지는 못하지만 같이 슬퍼해 주는 영호의 형, 산업체 부속고교에 입학해서 생활비를 버는 누나, 아버지... 뭐...딱히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가 있다거나, 급진적인 사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날 1987년 6월 10일의 참여자들은 쳅터 10의 마지막 페이지의 그림처럼 딱히 누구라고 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이었을 뿐이다. 



100도씨의 뜨거운 열정으로 이루었던 6월 항쟁이 있은 후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2009년 대한민국의 민주사회는 1987년에 민주사회에 비해 과연 성장된 모습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을까? 2009년 6월 민중의 혁명을 주제로 한 <마라, 사드>연극은 공연되지만, 부당한 강제철거에 공권력과 공권력의 힘을 빌린 용역의 폭력이 버젓이 행해지고 노동자가 집단해고 되고 광장은 전경버스로 성을 이루고 일반시민들은 열을 이루고 이동하는 전경들때문에 거리를 거니는 것조차 불편함을 느끼고 이를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내 앞에서 걸어가는 사복경찰 커플을 보면서 1987년의 백골단의 모습이 겹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오버랩인가.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1808년 프랑스, 1987년 대한민국과 마치 기름종이를 대고 따라 그리는 그림처럼 딱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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