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책들을 검색하다 작년 이맘때쯤 읽었던 [사회과학자의 글쓰기]라는 책이 품절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구해서 읽은 책이기에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금 떠들어 보겠지만, 이제라도 흔적을 남겨놓고 싶다는 갑작스러운 생각에 다른 책 몇 권을 더 엮어서 몇 자 적어본다.


이 책 [사회과학자의 글쓰기]의 부제는 '책이나 논물을 쓸 때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가?'이다. 제목이나 부제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런 무게감은 저자가 정해놓은 독자층에 내가 과연 끼일까라는 의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회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과학자는 더군다나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일반인인 나와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이 유효한 이유는
글쓰기 전과 글 쓴 후에 대한 이야기를 적절히 펼쳐 놓기 때문이다.



1. 글쓰기 전...

관심을 두고 둘러보면 글쓰기 관련 책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만, 글쓰기라고? 도대체 무슨 글쓰기지? 사실 다수의 책 제목들에서 보이는 '글쓰기'라는 것은 상당히 두리뭉실하다.(제목이 정말 '글쓰기'인 책들도 의외로 눈에 띈다. 왜 제목을 딱 세 자로 그렇게 지었는지는 정말 알 수가 없다.) 물론 두리뭉실하긴 하지만 다 맞는 말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일단 궁둥이를 붙이고 아무 글이나 막 던져보라는 거다. 사실 이 경우 글보다는 단어의 나열이라 볼 수 있지만, 어쨌든 복권을 사야 당첨이 되든 되지 않든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것을 흔히 '브레인스토밍'이라고 하는데 브레인스토밍에서 중시하는 것은 질보다는 양이다. 뭔가 하나 건져보자는 의도이다.

사실 글을 쓰고 싶다는 사람은 일단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갑자기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읽을거리들을 흡수하고 내보내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다. 즉 글쓰기는 뭔가를 즐겨 읽는 사람들의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궁극적 욕망이다.

[사회과학자의 글쓰기]는 욕망이 아닌 의무의 해소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대상은 글쓰기를 가끔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논리관계가 일목요연하니 구축된 그런 글쓰기를 말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글쓰기도 중요하지만 어떤 글감이냐 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 이전의 글감을 모으는 행위 또한 중요하다. 사실 이것은 논문을 써대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대중적 장르의 글쓰기를 하는 소설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가며 자료를 조사하고 그들의 글을 완성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쓴다'는 막연한 행위보다는 무엇을 사고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버무릴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우선 당신이 써 온 것에 관한 메모를 하고, 각각의 생각을 카드에 적는 것부터 시작하라. 원고에 적혀 있는 생각도 없애버리지 말라. 그런 생각들은, 그 순간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없을지라도, 여러 가지로 유용하다. 잠재의식은 당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 카드 뭉치를 파일별로 분류해라. 함께 묶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카드들은 같은 파일에 집어 넣어라. "함께 묶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구?" 그렇다. 당분간은 그 카드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너무 세심하게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당신의 직감에 따르라. 파일들을 모두 모아 놓은 다음 각 파일의 모든 카드 내용을 요약하는 카드를 만들어 각 파일 맨 앞에 놓아라. 맨 앞에 놓인 요약카드의 내용은 각 파일의 모든 카드에 적혀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일반화시킨 것이다. 이제 당신은 처음으로 자신이 해놓은 작업에 대해 비평을 시작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파일의 모든 카드 내용을 포괄하는 진술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내용이 잘 맞지 않는 카드들을 골라내고, 골라낸 카드들을 가지고 새로운 파일과 새로운 파일에 대한 요약카드를 만들어라. 그리고 나서 일반화된 카드들을 탁자나 마루바닥에 늘어놓거나, 벽에 핀으로 꽂아두어라...(중략)... 카드들을 어떤 순서, 아니면 아무 순서대로나 늘어 놓아라. 아마 당신은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이끌어 내는 일련의 순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한  세로줄에서 어떤 카드를 다른 카드 밑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좀더 일반적인 진술과 구체적인 사례 또는 하위 논의와의 관계를 물리적을 나타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중략)... 이러한 방식으로 아이디어들의 조직화를 실험하는 것은 흐름도에 의한 사고에서 어느 정도 정형화된다.

                          _하워드 S. 베커, [사회과학자의 글쓰기], 일신사, 103 ~ 105쪽

이 방식을 좀 더 확장하면 공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물론 일종의 공부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카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예로 외울 거 많은 법대 쪽이나 의대와 연계된 사람들이 많이 하는 공부법으로 알고 있다. 즉 '플레시카드'를 통한 암기쯤 되겠다.

어쨌든 이런 카드 모음 가지고 글을 쓴 대표적 작품이 그 유명한 '로버트 M. 피어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라는 작품이다. 이 책도 작년 이맘때쯤 읽었는데 리뷰를 너무나도 쓰고 싶었지만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철학 쪽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이 어렵기도 하고 매력적이기도 한 이유가 각도만 달리하면 다양한 장르가 담겨 있다는 것도 한몫한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크게 보면 하나는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기술이다. 단순히 철학과 과학기술이라는 이분법의 틀로 나눈 것은 내 지식의 부족함 때문이고, 이 책은 저자 경험의 응축이다. 이 책이 어렵기도 하고 훌륭하기도 한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고 경험했던 것들을 질Quality로 녹여버리는데 사실 질과 선, 철학과 과학기술은 명확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층적이고 패턴적이다. 깨지지 않는 패턴, 원자성이라 해도 좋다. 그 본질의 개념을 질로 표현했고, 이 질로 향하는 계단은 바로 내적 탐구에 기반을 둔 '선'을 말한다. 아니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계층의 체계로 사상과 기술을 논의하고, 물체를 구성하는 패턴을 하나씩 제거함으로써 최종의 '나사'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나사의 쓰임에 대해 이리저리 머리 굴려본다는 것. 이것이 책에서 에둘러 설명하는 질Quality의 하나이다. 아무튼 이 책은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다. 가격이 어마어마한 모터사이클을 멈추게 한 것이 작은 하나의 나사였다면, 그래서 이 모터사이클을 움직이게 하기 위한 사고의 영역은 더는 모터사이클이라는 매크로 영역에 있지 않고 나사에 집중되는 마이크로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결국 나사를 풀어 제대로 고치는 것이 바로 질Quality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사에 대한 본질적 의미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거시 영역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의 허식을 말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자인 '로버트 M. 피어시그'는 이런 추상적이면서 객체화시킨 글(엄밀히 말해 저자는 이 책에서 주체와 객체가 융합된 상태를 질의 하나로 보고 있긴 하다)을 인덱스카드로 묶어 내용을 적어나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재로서는 글을 쓰는 일 이외의 모든 난관이 극복된 셈입니다. 책의 전체적 윤곽은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15센티미터 크기의 인덱스 카드 약 3천 매를 사용하여 지난 12월에 완성해놓은 상태입니다. 문단 단위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고 철저하게 작업을 해놓은 상태지요. 구체적으로는 다섯 개의 개별적 윤곽을 잡아 놓은 상태인데, "사건," "인물," "관리 측면에서의 폭넓은 논의," "선 측면에서의 폭넓은 논의," "고원 지대"가 그것입니다. 이 다섯 요소들을 상당히 신중하게 서로 엮어나가고자 하는데, 이는 각 요소 상호간의 의미 강화 및 책 전체의 통일성 확보를 위한 것입니다.

                _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문학과지성사, 758쪽

이 내용은 저자가 출판사 편집장과 책으로 내기 위해 서로 편지로 이야기한 부분이다. 거의 이런 식으로 4년 동안 편지를 교환했다고 한다. 감은 잘 오지 않지만 12만 단어로 이루어진 초고를 완성했다.

2. 글은 어떻게 쓸까?

앞에서도 일종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한 무작위적 글쓰기에 대해 잠시 언급했지만, 일단 글을 쓰고자 할 때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서문(혹은 글의 첫 부분)에서 막히는 부분이다. 브레인스토밍을 했든 어쨌든 여러 가지 글감은 마련되었지만 눈에 띄는 시작을 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만 잘 뽑아 나와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고 쭉 글을 써내려가는 도중에도 글 자체에 드러난 시각이 좀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닌 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게 될 것이다. 계속 무시하고 쓰다 보면 자신이 쓰고자 했던 원 궤도에서 상당히 벗어나게 됨을 알 것이다. [사회과학자의 글쓰기]에서 저자는 그렇다면 서론을 나중에 쓰라고 권한다.

서론은 특별히 까다로운 방식으로 의도하지 않은 함축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에버렛 휴즈Everett Hughes는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 서론을 마지막에 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론은 글을 소개하기로 되어 있다. 아직 쓰지 않은 것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단 말인가? 너는 소개할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소개할 것을 먼저 쓴 다음에야 소개할 수 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여러 개의 다양한 서론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략)...  또한 사람들은 최초의 형식화가 함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학문적 저술에서 흔히 보이는 무의미한 문장과 단락으로 글을 시작한다. ...(중략)...  하지만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애매모호한 글로 시작하는 것이 사실상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탐정소설에서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 나가는 것처럼 사회과학자들은 증거가 되는 항목을 한 번에 하나씩 보여줌으로써 주장과 증거를 한꺼번에 요약해 주는 드라마틱한 결론 단락을 의기양양하게 제시할 때까지 독자의 관심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사회과학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모든 증거를 제시하기도 전에 결론을 내리는 것을 금하는 과학적 신중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략)...  나는 종종 코난 도일Conan Doyles과 같은 방식을 제안한다. 이 방식은 사회과학자들의 의기양양한 마지막 단락을 먼저 간단히 적는 것이다. 즉 독자에게 논의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모든 자료들이 최종적으로 설명할 것은 무엇인가를 먼저 말해 주는 것이다. ...(중략)...

                   _하워드 S. 베커, [사회과학자의 글쓰기], 일신사, 89 ~ 90쪽


본론부터 글을 써 내려가고 결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무리 짓고 그렇게 쓰면서 들었던 생각의 단편들, 정리된 파편들을 모아 글의 첫 부분을 장식한다는 말이다. 모든 글이 이런 식으로 할 수도 할 필요도도 없겠지만, 나름 장문의 글이나, 논리관계가 들어가는 글들 예를 들어 정치, 역사, 과학 쪽의 글쓰기는 아마 도움이 많이 될 듯싶다. 그런 글쓰기 하는 사람은 참조해도 좋을 부분이라 생각한다.

글감이 정해졌다고 술술 써지는 것은 아니다. 흔히 자신의 글은 독창적이고 싶은 심리적 재제 요인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심리적 요인은 우리와 같은 범인에게는 흔히 문체나 단어 구사력에서 독창성을 보이지는 않고 한마디로 자신만의 에피소드에서 독특함을 뽐내려 한다. 경험이 많으면 좋겠지만, 혹 경험이 없거나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쓸 때는 오로지 상상의 나래를 펴고 글을 써야 하는데 사물이나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물론 훈련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 학생들 가운데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미국에 관해 5백 단어 길이의 에세이를 쓰고자 했다. 그는 여학생이 쓸 법한 이 같은 글들이 발산하는 무기력한 느낌에 익숙해 있던 터여서, 아무런 시비도 걸지 않은 채 주제를 보즈먼으로 좁히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그녀에게 했다. 과제물 제출 기한이 되었지만 그녀는 에세이를 쓸 수 없었고, 그것 때문에 상당히 좌절한 상태였다. ...(중략)... 그는 난처해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방도를 찾지 못했다. 이제 그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을 해낼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침묵이 흐른 다음 기묘한 해결책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주제를 좀더 좁혀 보즈먼의 중심가에 대해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 이는 번개 같은 통찰력의 발동에서 나온 제안이었다. 그녀는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갔다. 하지만 다음번 수업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그녀는 정말로 비탄에 잠겨 그를 찾았다. 이번에는 눈물을 눈에 가득 담은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임이 명백해 보이는 비탄을 눈에 가득 담은 채, 그를 찾았다. 그녀는 여전히 이야기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략)... 화가 나서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제를 좁혀 보즈먼의 중심가에 있는 한 건물의 앞면에 대해 글을 써보도록 하게. 예컨대, 오페라 하우스의 앞면에 대해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 건물 위쪽의 좌측에 있는 벽돌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도록 하게." ...(중략)...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음 수업 시간에 출석해서는 몬태나주 소재 보즈먼 시의 중심가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의 앞면에 관한 5백 단어 분량 에세이를 그에게 제출했다. "길 건너편 햄버거 가게에 앉아서는 첫번째 벽돌에 대해 쓸 때쯤 글이 저절로 나오기 시작하여 글쓰기를 멈출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사람들이 계속 나를 놀려댔지요. 아무튼, 여기 이게 제가 쓴 거에요.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중략)...  그녀가 보즈먼에 대해 쓰고자 했을 때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던 것은 그녀가 들었던 것 가운데 되풀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그녀는 자기 스스로 참신한 눈길을 주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글을 통해 보인 것처럼 전에 사람들이 말한 것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주제를 벽돌 하나로 좁히는 순간 심리적 제재 요인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무언가 독창적이고도 직접적인 눈길 주기의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이 너무도 명백해졌기 때문이었다.

       _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문학과지성사, 341~343쪽

인용문 속 안경 낀 여학생이 글을 못 쓰고 헤매고 있을 때, 저자는 사물에 눈길을 주지 않고 있다고 화를 냈다. 모든 사실 하나에는 무한수의 가정이 있는데, 눈길을 주면 줄수록 그만큼 더 많은 것이 눈에 띈다는 의미이다. 그 후 벽돌로 시각을 좀 더 좁히라고 조언을 했고, 그제야 그녀는 글을 쓴 것이다. 저자는 다른 강의실에서도 엄지손가락이나 동전과 같은 주제로 글을 써서 제출하게 했고, 이런 작은 실험을 통해 학생들이 글을 쓸 수 있는 글의 양의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사소하지만 학생들 자신들은 이런 글은 남의 것을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일화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오르게 한다. '브라이언 피터슨'의 [창조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법]이라는 책이다.

창조적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일은 또한 당신의 카메라와 렌즈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에 따라서 '크게' 좌우된다. 배의 선장은 세계를 항해할 때 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순항하도록 만들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도에 아주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사용하는 렌즈는 당신을 새롭고 매혹적인 땅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지도와 같다. 사물을 볼 때 카메라와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는 지속적인 훈련으로 당신은 각 렌즈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각을 시각적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렌즈를 통해서 사물을 보는 일에는 더 멀리 보는 것과 더 가까이 보는 것 모두가 해당한다. 이런 훈련을 많이 하면 할수록, 당신은 점점 더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될 것이다. ...(중략)...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장면 한 장면 사진을 찍어나가면서 장면에 따라서 어떤 렌즈를 사용할 것인가를 전혀 망설이지 않고 알게 될 것이다....(중략)... 숲을 두꺼비의 시각으로 보는 것에 도전하기도 하고, 혹은 도심지 거리를 보도블록의 관점에서 보기도 하고, 당신네 집 뒷마당을 붉은가슴새 둥지의 시각으로 보려고 시도하기 시작할 것이다. 커다란 전나무 아래 누워서 방금 나무 위로 올라간 다람쥐의 시각으로 보라. ...(중략)... 이와 같은 구성은 봄이면 시의회가 차량통행이 잦은 길밑에 오리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작은 생태통로를 건설하는 것이 왜 중요한 일인가를 아주 극적으로 분명하게 말해줄 것이다.

     _브라이언 피터슨, [창조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법], 청어람 미디어, 11쪽


 글쓰기를 할 때는 대상을 특별한 각도로 보려는 노력 하지 않는 데에 비해 사진을 찍을 때는 다르다. 본능적으로 좀 더 자신만의 프레임을 만들려고 애를 쓴다. 말 그대로 누워서 찍기도 하고 높은 곳에 올라 좀 더 시야를 확보하려고도 애를 쓴다. 이 차이는 아마 도구가 있고 없음 때문일 듯싶다. 카메라라는 도구는 제한적이기에 부족함을 이기고자 하기 위함일 듯싶다. 물론 글쓰기 때에도 똑같이 누워서 대상을 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대상의 이면을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위의 인용문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마치 기계적인 방식을 습득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장면에서는 어떤 렌즈가 필요하듯이 직감적으로 렌즈를 바꾸는 절묘함이 몸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창조성 이면에는 습득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습득은 모방과는 다르다. 앞서 엄지손가락이나 동전의 주제로 학생들은 자신만의 글임을 확신했다고 나와 있다.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기계적 훈련에 따른 습득은 글쓰기에서 자신의 문체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리저리 대상을 틀어보면서 바뀌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환경과 대상 간의 연결고리가 된다. 이런 연결고리들이 그대로 문장에 드러나면 그것이 문체가 아닐까 한다.



흔히 문체관련 이야기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작가는 '김훈'이다. 김훈의 책 [바다의 기별]에서는 김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해서 남해안으로 내려왔더니 그 두달 전에 원균의 함대가 칠천량에서 대패해서 조선 수군은 전멸하고 남해에서 조선 수군의 깨진 배와 송장이 떠돌아다니고 그 쓰레기로 덮인 바다에 봄이 오는 풍경을 묘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략)...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놓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소설은 몽매해집니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의미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구별해서 끌고 나가는 그런 전략이 있어야만 내가 원하고자 하는 문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_김훈, [바다의 기별] 중 '회상', 생각의 나무, 140 ~ 141쪽

 저자는 사실 꽃을 정말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머릿속에서 무한수의 가정을 시도했다. 여기에서 그의 대상은 꽃이 아니라 '은'과 '이'라는 조사이다. 그는 이 둘의 조사를 놓고 각 음절이 가지는 심상의 깊이를 재었다. 그의 문체는 사진 찍을 때 쉽게 카메라 렌즈를 바꾸는 것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렌즈를 갈아 끼우려는 본능적인 언어 감각은 이미 그의 안에 쟁여져 있을 것이다. 감성을 담아내려는 그의 시각은 머릿속에서 이 렌즈 저 렌즈를 끼워 보고 있는 것이다.







3. 글을 쓴 후...

[사회과학자의 글쓰기]에서 글감 찾기와 더불어 가장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퇴고'이다. 이 책의 시작은 글쓰기에 관한 세미나 수업에서부터였다. 저자는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은 글쓰기 대신에 편집과 퇴고를 강조할 것이라고 언급한 부분도 있다. 사실 책에서도 퇴고와 관련된 부분이 부지기수다.
대학원 시절의 몇 년 동안, 나는 초기 원고들에 대한 우호적인 비평에 기반하여 퇴고를 일상화하는 매우 효율적인 글쓰기 습관을 형성했다. 그 결과 퇴고를 약점을 필연적으로 드러내게 하는 당황스런 작업이 아니라, 재미있는 낱말 맞추기 게임으로 여기게 되었다.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고, 나만의 문체를 실험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글을 서투르게나마 고치는 것도 역시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_하워드 S. 베커, [사회과학자의 글쓰기], 일신사, 150쪽

퇴고는 말 그 자체로서도 흥미를 떨어뜨리게 들리다. 어렵게 들리기도 하고. 퇴고 자체도 글쓰기에 포함되지만 전문적으로 글 쓰는 사람 아니고서야 퇴고는 단순한 선택사항일 뿐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오탈자나 검토할 뿐이지. 띄어쓰기조차도 찾아보자니 귀찮기는 마찬가지다. 저자는 퇴고는 단순한 타이핑이지 글쓰기와는 다른 단순한 육체노동이라며 오히려 글쓰기가 더 미칠 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1986년에 이 책을 썼는데, 퇴고 부분의 글은 컴퓨터를 이제 막 다루기 시작한 당시 시대적 환경을 담고 있어서 지금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퇴고를 습관화 해야 한다는 저자의 충고는 새겨들어야 할 듯.

퇴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복의 제거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합칠 수 있는 것은 압축해서 표현하는 것이 퇴고의 뼈대이다. 쉽지는 않다. 퇴고는 글쓰기가 이루어져야 될 수 있는 부분이므로 글쓰기에 없는 에너지까지 집중해야 할 판에 이미 고갈 되어버린 에너지를 쥐어짜며 퇴고에 또다시 눈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또한 퇴고는 일종의 '미니멀리즘'을 지향한다. 예전에 유명 영화 포스트를 미니멀리즘으로 각색하여 올린 것들을 보았다. 깎아내는 것은 내용이 아니다. 내용은 그대로 있다. 다만 용기 자체를 깎는 것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되, 구성을 보면 참신하다. 하지만 잘못하면 단조로울 수 있다. 아는 사람 눈에는 대단하게끔 보이지만 관심 없는 사람이 보면 단조롭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프로의 몫이고, 일반인들은 중복되거나 맞춤법, 띄어쓰기와 같은 것들을 다듬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바뀌면 안 된다. 내용이 바뀌면 다시 새로운 글쓰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퇴고는 새로운 작품을 하나 만들어낼 수 있겠다 싶지만, 어디까지나 우리같은 일반인에겐 마감의 영역일 뿐이다.


4. 궁극의 지적생활...


 이 글의 제목은 '글쓰기, 궁극의 지적생활'이다. 사실 모든 지적생활의 종착역은 글쓰기 내지 책 쓰기이다. 어떤 전문적인 일을 하여도 지적생활이라는 간판을 달기는 어렵다. 가령 변호사나 의사의 직업은 지적이긴 하지만 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종의 기술(혹은 기예) 개념이기 때문인듯하다.

글쓰기와 지적생활을 묶은 이유 또 한가지는 얼마전에 읽었던 책 때문이다. '와타나베 쇼이치'의 [지적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인데, 나에겐 별 감흥이 오지 않는 것이 내가 기대했던 내용과는 차이가 있거나 저자가 말하는 '지적생활'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글 앞부분의 내용과 상당히 일치한다. 글감을 모으는 생활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지적생활인 것이다. 일단 글감을 모으기에 앞서 책을 사라고 한다. 책을 가지고 있어야만 바로바로 현재 쓰는 글의 참고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고, 이것이 작품의 질과도 관계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책이 쓰인 때가 1976년이고(비록 2011년에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왔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환경은 영국의 제국시대 때에나 들어맞을 법하다. 식민지 건설과 강탈 무역으로 세계가 핍박하거나 받거나로 온통 바쁠 때이다. 제3계급이 전문적 지식과 부로 무장하여, 지위를 보장받고, 점차 엘리트층으로 부각되니, 넘쳐나는 돈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호기심 충족으로 때울 때이다. 지들끼리 모여 각자 임무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세계 곳곳의 여러 동,식물을 포함하여 미스테리한 것들과 사건을 수집할 때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말하는 '지적생활'은 마치 수입은 부모 재산과 채권을 통해 얻어 생활하며, 통신이 생략된 시기, 스마트하지 않은 세상 때의 이야기를 하는듯 하다. 사실 내용은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은데, 어쨌든 저자의 성향이 일본의 극우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책에 쓰여져 있는 분위기가 그렇게 풍긴다. 이 책에서도 저자는 지적생산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록카드 상자 활용법'등을 얘기하고 있는데, 앞서 말한 인덱스 카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자인 '와타나베
쇼이치'는 일제때의 위안부 자체를 부인한다는 인물이라는데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저자의 화려한 이력만을 앞세우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대놓고 지적생활을 언급하진 않지만, 한겨레 '구본준' 기자가 쓴 [한국의 글쟁이들]을 보면 글쟁이들이 어떻게 글감을 모으고 책을 쓰는 등 지적생활(?)을 영유하는지 잘 나와 있다. 여기에 나오는 글쟁이들, 정민, 이주헌, 이덕일, 김용옥, 이인식, 정재승, 주경철 등등 개인의 공부와 자료 수집, 글쓰기는 어떤 치열한 고생과 고민 끝에 나오는지 읽어둘 만 하다.









 요즘 구매해서 읽고 있는 책은 '윌리엄 암스트롱'의 [단단한 공부]이다. 처음에 이 책과 관련하여 관심 있는 키워드가 눈에 띄었으니 강유원과 인문학 공부법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역사야 그렇다 치지만 수학과 과학, 외국어 공부는 또 뭐지? 이건 뭐 의심이 가긴 했지만 일단 구매를 하였고 조금 훑어본 정도이다. 마침 '글 쓰는 법'이란 장도 있고 해서 이 글 맨 마지막에 이렇게 넣어본다. 내용에서는 글쓰기보다는 작문이라고 나오는데 좀 더 학구적인 표현이랄까? 의무적인 냄새가 배어있다. 글쓰기와 작문의 차이는 시간의 쓰임이랄까? 배분이랄까? 일단 글쓰기는 배정된 시간이 무제한이다. 한마디로 안 써도 된다. 하지만 작문은 마감이 있다. 그 마감도 하루, 이틀도 될 수 있지만 1시간 내지 2시간 짧게는 30분도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글은 논리적 사고 전개와 더불어 일종의 글쓰기 규약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읽어보면 딱히 작문이라기보다는 논문이나 과제와 같은 학교에서 필요한 글쓰기다. 보편적인 글쓰기 내용이 들어 있지만 그렇게 와 닿는 내용은 없다. 그래도 글 쓸 때의 필수적인 요건은 맞긴 하다. 학생들에게는 어쩌면 필히 사봐야 할지 모를 그런 책이지만, 오히려 어디 만화방 같은데 가서 예전에 KBS에서 했던 드라마 '공부의 신'의 원작인 [꼴찌, 동경대 가다!]가 재미와 동기부여 면에서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강유원 박사는 일종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지향하는 것 같은데, 이 책은 그런 것과 관련되어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부모나, 학생, 혹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동기부여가 약한 것이 흠이다.


( * 단순 학습관련이라면 예전 페이퍼 참조...) -->클릭 : [공부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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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0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20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1-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몇 권 담아갑니다. 아주 유익한 페이퍼 감사합니다. ^^

쿼크 2012-01-21 14:50   좋아요 0 | URL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2-01-25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25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