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파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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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을 통해 백색의 서늘한 공포를 전해주었던 요 네스뵈가 짙은 분노를 안고 돌아왔다. '스노우맨'보다 더 방대한 스케일과, 독자를 놀리기라도 하듯 차분하고도 치밀하게 전개되는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을 한층 배가한채 말이다. 해리 홀레 시리즈 여덟번째 작품인 '레오파드'는 800쪽에 가까운 엄청난 분량임에도 잠시도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주요 등장인물만 해도 30명이 넘고 홍콩에서 노르웨이, 호주, 콩고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반 이상이 소설의 배경이 된다. 한 마리 표범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연쇄살인범의 상상할 수 없는 행보는 깊숙이 내려앉아 있고, 공포는 극대화되어 빠져져나갈 수 없는 덫처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거기에다 자신의 내면을 들려주는 살인범의 이야기는 한 통의 편지처럼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범인은 누구일까? 이제 그 여정이 시작된다. 

 

스노우맨 사건이 해결된지 그리 오래지 않아 또다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해결할 사람은 해리밖에 없다. 그러나 해리는 노르웨이에 있지 않았고, 군나르 하겐 경정은 해리를 데려오기 위해 홍콩에 카야 솔네스라는 미모의 여형사를 파견한다. 라켈과 올레그가 떠난 노르웨이로 해리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중병과 더 이상의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카야와 함께 비행기를 탄다. 지금까지 3명의 여자가 희생됐고, 그들 사이엔 별다른 공통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두 명은 혈중에 케타노메가 주입된 채 자신이 흘린 피가 폐에 들어가 익사했고, 다이빙대에서 목을 맨 한 명은 줄이 몸을 견디지 못해 목과 몸이 분리된 채로 죽었다. 그후 유력한 용의자로 암시됐던 엘리아스 스코그라는 남자가 자기 집 욕조에 등이 달라붙은 채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은 연달아 일어나 아델 베틀레센이라는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아델의 이름으로 르완다와 콩고를 다녀왔던 율리아나 베르니라는 여자 또한 시체로 발견된다. 

 

해리는 연쇄살인 사건의 해결사답게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범인을 추적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내부적으로 얽혀있어 그리 간단치 않다. 해리가 속한 강력반과 오슬로중앙범죄수사기구인 크리포스는 사사건건 부딪치고, 조직의 존폐가 걸린 문제라 군나르 하겐 경정과 크리포스의 미카엘 벨만 경정의 신경전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게다가 해리는 새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벨만에겐 타락한 경찰의 표본이다. 병원에 있는 해리의 아버지는 나날이 쇠약해지고 해리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보게 된다. 아버지는 해리에게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 달라 부탁하지만 해리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다. 

 

한편 살인범은 경찰을 놀리기라도 하듯 계속 흔적을 남기고 해리 또한 범위를 좁혀간다. 드디어 살인범이 누군지 알 것 같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크리포스가 낚아채가고, 벨만은 언론의 영웅이 되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견고히 한다. 벨만은 의기양양하게 살인범을 심문하지만 유력한 재벌의 사위감이라는 걸 알고는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위해 살인범을 풀어준다. 이번 사건에 해리가 꾸린 팀은 카야 솔네스와 비에른 홀름을 포함, 단 세명이었다. 그런데 해리의 움직임을 벨만이 알고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 여전히 사람을 믿는 자신에게 실망한 해리는 다시 알코올에 빠지고 사건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다. 

 

요 네스뵈는 각기 다른 밑그림을 여러 곳에 깐 채 이야기를 전개하며 좀처럼 실마리를 잡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편지를 통해 범인의 심리를 전해주고는 향후 행보까지 유추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함이 범인을 쉽게 잡는 것으로 연결되진 않는다. 정보를 흘리듯 알려주지만 그것이 함정이었음은 범인이라 예상했던 사람이 죽거나 잡히고도 여전히 범행이 현재형으로 진행된다는데 있다. 초반부부터 범인을 암시하면서도 계속적 변수를 주어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능력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작자적 자질은 아니다. 특히 '레오파드'에서 무엇보다 강하게 다가왔던 건 묘사다.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명확하게 잡히는 이미지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현장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정신이 들자, 그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하품을 하고, 코로 숨을 쉬었다. 다시 눈을 깜빡였다. 이미 말라버린 눈물 자국 위로 또 다른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는 목구멍으로 침을 삼킬 수 없었다. 입안은 버석하게 마르고 굳어 있었다. 양 볼은 입속의 물건 때문에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그 이물질은 그녀의 머리를 터뜨릴 기세였다........이젠 막다른 길이었다. 자신과 이 끔찍한 통증, 터질 듯한 머리뿐이었다. "철사는 손대지 마." 만약 철사를 잡아당기면 튀어나온 부분이 다시 들어가고, 그녀는 고통에서 해방될지 모른다.......

 

돌출되어 있던 구멍 안쪽에서 7센티미터 길이의 바늘이 튀어나왔다. 바늘 네 게는 그녀의 양볼을 뚫고 나갔고, 세 개는 부비강, 두 개는 비강, 두 개는 턱 아래를 뚫고 나왔다. 다른 두 바늘은 기도를 뚫었고, 하나는 오른쪽 눈, 하나는 왼쪽 눈을 찔렀다, 예닐곱 개의 바늘은 입천장 뒤쪽을 통과해 뇌까지 침투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다. 금속 공 때문에 턱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터라 상처에서 흘러나와 입안에 고이는 피를 뱉어낼 수 없었다. 피는 기도를 거쳐 폐로 흘러들어갔고, 혈액의 산소 흡수를 방해했다. 그리하여 결국 심장마비, 그리고 검시관들이 보고서에 뇌 저산소증이라 기록하는 증상으로 이어졌다. 즉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보르그뉘 스템 뮈레는 익사했다."

 

 

담담하고 차분한 상황 묘사는 살인 현장과 맞물리며 압축된 공포의 밀도를 증대시킨다. 그러나 '레오파드'에는 이것만 있지 않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를 각기 다른 삶들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패하거나 불완전한 듯 보여도 삶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요 네스뵈는 망가진 듯 보이는 해리의 가족사를 통해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속에 내재한 악이 과연 교화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도 연쇄살인범을 통해 제기하고 있다. 요 네스뵈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질문해야 근원적인 것들을 우리를 대신해 늘 물어왔다. 그랬기에 그의 소설이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레오파드'가 단순한 추리소설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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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왕눈이 아저씨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67
앤 파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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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때때로 '아이에게 부모는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해 보곤 한다. 아이의 입장에 서보기만 해도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어서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결코 작을 수 없는 존재다. 원컨 원치않컨 간에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가 이혼한다고 했을 때 아이가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어떤 상담학자는 부모가 싸우기만 해도 어린아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중, 고등학생 쯤 되면 그정도까지야 아니겠지만 그래도 꽤 불안하고 불행한 감정이 들 것 같다. 그런 이별의 아픔이 다 가시기도 전에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새로운 상대를 찾았거나 양 쪽 다 새로운 상대를 찾아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비록 이혼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합칠 거라는 기대를 아이들은 갖고 있다던데.......  

 

'하필이면 왕눈이 아저씨'는 그런 상황에 있는 아이, 키티의 이야기다. 키티는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여동생 주드와 살고 있고 아빠와도 간간이 통화하며 가족이 나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엄마는 밝고 명랑한 편이며 셋이 사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엄마에겐 현재 남자친구가 있는데 그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다른 남자친구와 뭔가 다른 것 같아 걱정이다. 전에 엄마가 만났던 남자친구는 친절하고 멋진 양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키티의 마음에 들었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 헤어졌고, 지금 만나는 나이든 아저씨는 쉰이 넘은 나이에 외모도 끌리지 않는데다 키티의 가족사에 끼어들고 있어 키티의 신경은 곤두서 있다. 제럴드 포크너, 일명 왕눈이 아저씨. 키티는 이 아저씨만 나타나면 좋았던 기분까지도 언짢아지려 한다. 한데 희안하게도 여동생 주드는 이 아저씨를 아빠처럼 따르고 있고 하다못해 고양이까지도 좋아한다. 

 

키티는 왕눈이 아저씨가 올 때마다 사사건건 무례한 행동을 한다. 그러나 아저씨는 때론 침묵으로, 때론 눈썹을 올리며 가만히 지켜보고 만다. 키티의 온갖 무례함과 장난에도 아저씨는 한결 같다. 주드에게는 신문의 경제면일망정 꾸준히 읽어주고, 엄마에게는 찬사도 해주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는 정직함도 가지고 있다. 키티는 아저씨에게 조금씩 마음을 여는 자신을 느끼고 있다. 어느날 키티네 가족의 핵반대 모임에 왕눈이 아저씨도 참석하게 됐다. 아저씨는 엄마를 힘들게 할 뿐 뻣뻣하기 한량없다. 늘상 있었던 모임이라선지 사람들은 시위를 마치 장난같이 대한다. 출동한 경찰들은 으례 있는 일인듯 빨리 끝나기만 바란다. 엄마는 시위를 빨리 끝내고 돌아가기 위해 범법행위를 하고 경찰차에 태워진다.

 

엄마가 없는 집에 왕눈이 아저씨는 마치 아빠처럼 아이들을 대한다. 패스트푸드는 안된다며 음식을 같이 하고 설거지는 주드에게 시킨다. 주드는 평소처럼 징징대며 어리광을 부려 빠져나가려 하지만 아저씨는 봐주지 않는다. 밤늦게 돌아온 엄마는 기분도 좋잖은데다 아저씨가 시위대 모임에 대한 느낌을 정확히 집어 말하자 상한 기분으로 다투고만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엄마의 소리를 다듣더니 조용히 나간다. 키티는 윗층에서 그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아저씨는 엄마와 결코 싸우지 않을 거라는 걸 믿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엄마와 아저씨는 한동안 만나지 않고 아저씨는 주드에게만 간간이 엽서를 보낸다. 드디어 엄마의 재판날이 돌아왔다. 키티는 아저씨가 법정에 가서 엄마를 지켜볼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아저씨는 엄마의 남자친구만은 아니었다. 주디도, 키티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 곁에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를 용납하는 것이 얼마나 쉽잖은 일일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런 일은 어른이 그 입장이 된다해도 결코 쉬울 수 없는 일일 터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른들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일을 항변도 못하고 받아들이고, 삭여야 하는 아픈 시간을 앤 파인은 넉살좋게 표현한다. 그녀는 키티의 아픔을 키티의 입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제 막 엄마의 재혼을 앞둔 같은 반 친구 헬렌의 반응을 통해 드러낸다.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는 시간을 통해 키티는 친구도 위로하고 자신의 상처도 치료됨을 느낀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아픔을 잘 치뤄낸 키티는 이제 자신이 조금 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앤 파인은 부모가 이혼한 아이들이 그토록 바랐을 부모의 재결합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다. 그녀는 초장부터 그런 기대를 갖지 못하도록 이야기 속에 아예 못을 박았놓았다.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한다면 동화같은 이야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낫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의붓 아버지가 이 책 처럼 다 좋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다 나쁜 사람도 아니다. 앤 파인은 의붓 부모에 대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두려움과 경계심을 어쩌면 이렇게 풀어주고 싶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잘 지낼 수 있도록, 마음이 힘든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어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덮었다. 뒷맛이 마치 박하향처럼 시원하고 개운하다. 부모의 이혼으로 마음이 힘든 친구들도 이 책을 통해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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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덕이 푸른숲 어린이 문학 28
임정진 지음, 이윤희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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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패는 조선후기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유랑연예인 집단이다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4, 5명의 연희자를 갖는 연희집단으로 일정한 거소(居所)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다. 서민들에게는 제법 환영을 받았으나 상류층에는 배척을 받았는데 이것은 남사당패가 숫동모와 암동모로 이루어진 남색사회였기 때문이다. 대략 40~50명이 움직이며 그들의 여섯 가지 놀이를 가지고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서민들만의 놀이를 벌였다. 남사당패는 전국을 돌며 공연해 왔으며 남사당패의 여섯 가지 놀이는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베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놀음)이다.

 

이 패거리는 특히 철저한 계급사회여서 맨 위에는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있고,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각 놀이 분야의 선임자를 뜻하는 ‘뜬쇠’가 있다. 뜬쇠 아래에는 ‘가열’이 있고, 가열 밑에는 초입자인 ‘삐리’들이 있다. 이 삐리들은 대부분 암동모 노릇을 하였는데 이들의 동성애 때문에,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기에 함부로 마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잘 보이는 높은 언덕 같은 곳에 모여 갖은 재주를 부렸고, 꼭두쇠를 보좌하는 곰뱅이가 마을 사람들과 협상을 하여 성사가 되면 비로소 마을로 들어가 놀았던 것이다.

ㅡ네이버 지식백과

 

동화책을 읽으며 어렵다고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남사당패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었던 것 같은데 실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책을 읽으며 곰뱅이쇠, 꼭두쇠도 낯설었지만 어름, 버나, 벅구등도 익숙치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도 우리 전래놀이에 대해 몰랐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남사당패는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단다. 내가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미안해졌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란 것이 남사당패의 구성과 그들의 세계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이런! 동성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있는 것인가? 아~머리 복잡하다. 

 

각설하고, '바우덕이'는 남사당패 최초의 여성 꼭두쇠에 대한 이야기다. 남사당패는 태생적으로 여성의 진입을 허락할 수 없는 집단이다. 그런 곳에 여자 아이가 들어가 꼭두쇠가 되어 대원군으로부터 당상관 정3품의 옥관자를 하사받게 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 아이는 어떤 아이기에 이런 일을 해냈을까? 지금도 여성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보이지 않는 장애물과 걸림돌들이 있는데, 19세기 말에 어린 여자 아이가 어떻게 그런 일을 이루었을까? 이 책은 그런 의문들을 내게 남겼다. 그래서 한 번 읽고 또 읽었다. 그건 아이의 보이지 않은 눈물과 가시밭길에 대한 내 예의였다.

 

바우덕이는 천애 고아다. 어미는 아비가 죽기 2년 전에 집을 나갔고 아비는 병이 들어 거동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바우덕이의 나이는 예닐곱 살 정도였다. 아비의 몸은 등창으로 생살이 썩어들어가고 있어서 곁에 있는 사람이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어린 것이 그런 아비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비의 친구인 곰뱅이쇠 덕기는 남사당패의 일 년치 놀이판이 접힌 후 늘상 하던대로 청룡사 요사채에 짐을 풀었다. 그 곳의 공양주 보살이 덕기에게 친구가 다죽게 생겼다는 기별을 한다. 덕기는 친구를 찾아 나서고 친구는 자신의 딸을 부탁하고는 그 날 새벽 죽음을 맞는다. 그 아이가 바우덕이다.

 
남사당패는 내일을 알 수 없다. 그런데다 금녀의 패거리에 어린 계집애를 데려오게 된 곰뱅이쇠는 앞이 캄캄하다.  그런 곰뱅이쇠의 마음을 아는 듯 바우덕이는 눈치껏 재빠르게 행동한다. 바우덕이는 기예가 없으면 이 곳에서 지낼 수 없음을 알고는 틈틈이 이것 저것을 어깨 넘어로 배운다. 계집아이의 암팡진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기예 중 가장 힘들다는 어름을 어느날 어름사니가 가르쳐준다. 눈을 감고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바우덕이는 몰랐다.

 

 

 

욕심을 내어 줄타기 연습을 하던 바우덕이 앞에 호택이가 나타난다. 호택이는 기예를 선보이다 인대를 크게 다친 오라비뻘의 사람이다. 남사당패에서는 자기 몸도 자기가 알아서 관리해야 한다. 몸을 다치게 되면 남사당패는 다친 사람을 버려두고 갈 수 밖에 없다. 피붙이보다 더 가깝게 지내지만 가족은 아니었다. 호택이가 지게에 지워져 보내졌을 때 바우덕이는 대금을 부는 이경화 앞에서 소리내어 울었다. 버림받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남겨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아이였기에 그 울음은 통곡이었다. 호택이 또한 뻣뻣하게는 굴었지만 바우덕이가 여동생 같았기에 먹고 사는 일이 보장되는 포목점으로 데려가려 온 것이었다. 그러나 바우덕이는 자신이 어름사니가 될 거라며 매몰차게 거절한다.

 

열 살 짜리 계집아이가 줄을 탄다는 소문은 전국에 퍼졌다. 이제 바우덕이는 사람들이 한번쯤 보고 싶어하는 예인이 되었다. 더이상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된 꼭두쇠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바우덕이를 추천한다. 그 길만이 남사당패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호구를 해결하는 일은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었다. 바우덕이는 열 다섯 나이에 남사당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담력이 있고 기예가 출중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우덕이는 줄을 탈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에 환호했다.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자신의 줄타기는 근심을 잊게 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줄 위에 섰다. 또한 줄 위에 서 있으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아야 했다. 왕의 아버지조차도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올려다 보아야했다. 바우덕이는 하늘을 쳐다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 볼 아비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동화의 결말은 이렇게 아름답지만 바우덕이는 스물 셋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병으로 죽은 그녀가 묻힌 곳은 개천가 어디라고 한다. 묻힌 장소를 몰라 오늘날 바우덕이의 묘는 가묘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바우덕이는 남들이 긴 시간을 살고도 해내지 못한 일을 마치고 갔기 때문이다. 천하다 무시하고 여자라 무시하던 그 시대, 그 환경 속에서 자신의 기예에 최선을 다했고, 나라가 인정하는 기량과 리더십을 바우덕이는 보였다. 짧고 슬프고 한 이 많은 인생이었지만 바우덕이는 남사당놀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백 년이 흐른 지금 이제 남사당놀이는 전세계가 인정하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바우덕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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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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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잡아보려 몸부림 친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레이스를 달리고 있는데 나는 아직 출발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방향성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진지한 고민 없이 나는 근심만 했고, 소신껏 살지 못하고 상황에 나를 맞추기만 했다. 그래놓고는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렸다. 변명과 핑계를 도피처 삼았던 나는 시간이 부담스러워 어서 가기만을 바랐다. 나는 시간을 방기했고 그 댓가는 혹독했다. 다 늦은 나이에 나는 출발선 상에 다시 서야만 했다. 제대로 된 생을 살려면 지나간 시간 만큼의 시간을 내 삶에 재투자해야 했다. 무언가를 알만한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건 고통스런 일이었다. 마치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의미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나를 만들어가는 시간은 무척 힘들었다.

 

시간이 세월로 덧입혀지자 그 힘들었던 시간의 힘으로 나는 다시 한 걸음씩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무언가를 다 이룬 사람처럼 지난 시간들을 잊고 지냈다. 어렴풋하다 못해 흔적도 찾기 어려워졌을 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열여덟 살 짜리 소녀 온조다. 온조의 아빠는 소방관으로 온조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불의의 사고로 급작스레 돌아가셨다. 온조는 그 일로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온조는 재정적으로 열악한 시민단체서 일하는 엄마도 도울겸 또 아빠가 못다한 시간까지 잘 살아내겠다는 마음에 '시간을 파는 상점'이란 인터넷 카페를 개설한다. 닉네임을 크로노스로 정한 온조는 몇 가지 조항을 달아 스스로 선을 긋는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나 옳지 않은 일은 받지 않고, 의뢰인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줄 수 있는 일, 그리고 시간이 돈이 될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일을 맡기로 한다.

 

온조는 '네곁에'란 의뢰인의 부탁으로 누군가가 훔쳐간 PMP를 제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을 비롯해, 자신의 할아버지와 함께 맛있게 식사를 해달라는 '강토'의 부탁들을 받는다. 온조는 덜덜 떨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책임감있고 성의있게 잘 처리한다. 그 일을 통해 혹여라도 생길지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막아내고, 붕괴된 한 가족의 아픔 또한 잘 보듬어 준다. 온조는 강토를 대신해 만나게 된 할아버지를 통해 크로노스의 시간이 어떻게 카이로스로 전환되는지를 배우게 된다. 시간을 통해 아픔이 조금씩 치유되는 과정은 온조에게도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온조는 그 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단순히 시각에서 시각 사이의 거리가 아니었다.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는 멋진 순간들의 연합이었다. 

 

온조는 그외에 천국의 배달부가 되기도 했고, 단짝 난주에게는 짝사랑 상대인 정이현에게 친구의 마음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도 되어주었다. 이런 마음 때문인지 온조의 인터넷 카페는 입소문을 타게 되고 온조는 불곰이란 별명을 가진 담임 선생님의 걱정도 듣는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온조는 담임 선생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엄마의 웃음이 잦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환경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엄마와 담임 선생님이 만나게 됐고, 엄마의 감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예감하고 마음의 준비까지 했건만 온조의 감정은 매우 흔들린다. 

 

그 나이 때 아이들에게 있을 수 있는 일들이 삽화와 같이 계속 이어진다. 아이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때문에 힘들어하고, 끊임없이 우정을 갈구하며, 이성을 향한 추제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행복하고도 애가 타는 경험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성장통을 동반했지만 결국 아이들을 성장케 했고, 후에는 생을 지탱해 나갈 자양분으로 자신안에 놓여지는 선물이 되었다. 시간 안에서 아이들은 방황하고 좌절하며 힘들어했지만 그 시간은 결코 피해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크로노스가 있어야 카이로스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나자 느슨했던 최근의 내 시간들이 떠올랐다. 일상의 작은 귀퉁이일 망정 의미로 변화시키 위해 애썼던 시간들은 사라지고 나태하게 변한 내 모습만이 여기에 있었다. 이 책은 내 안일함을 비추고 있었다. 잊고 지냈던 시간을 수면에 뜨게하고는 내 부패한 마음을 들춰내어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소리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내게 남겨진 순간들을 잘 채워나가는 시험이 주어진 듯했다. 시험을 잘 준비한다면 내게 멋진 선물이 될 터이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룬다면 카이로스는 사라지고 크로노스만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선택은 내게 주어졌다. 내 온 몸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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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언덕
한나 얀젠 지음, 박종대 옮김 / 비룡소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언제쯤이면 아프리카를 비극이란 단어와 결부시지키 않고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을 무섭게 흔드는 모든 것이 아프리카에 있었다. 내전과 살상, 기아와 에이즈. 그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비극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무차별로 죽이는 일이었다. 학살은 과연 인간이 어느 선까지 내려앉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명한 척도였다. 그러므로 그 선을 넘어서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서는 일이 1994년 르완다에서 생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마음을 나누던 이웃이 하루 사이에 살륙자로 돌변했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대학살은 인종 청소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를 냈다. 그해 4월부터 7월까지 100일 동안 80만명의 투치족이 죽었다. 투치족의 75%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 절망의 시간을 잔이란 여자 아이가 겪었다. 가족은 다 죽고 잔만 살아남았다. 대학살이 일어났을 때 잔은 8살이었다. 잔에게는 깔끔한 성격의 엄마와 진중한 성격의 아빠, 그리고 친구같은 오빠와 떼쟁이 여동생이 있었다. 집에는 집안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몇 있었고, 그들은 후투족이었다. 잔은 종족이 다르다는 것이 누군가를 죽이고 죽임을 당할 만큼 엄청난 일이라는 걸 몰랐다. 잔은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암살됐다는 소식이 들리던 날부터 설명할 수 없는 심상찮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불온한 기운은 삽시간에 후투족 사람들을 휘감았고 살해자와 피살자로 두 부족을 나누고 말았다.


비극의 날이 왔다.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피난을 가기로 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벌써 학살이 시작됐던가? 여자 아이가 달려왔다. 가까이 가보니 두개골이 갈라져 있었다. 이제 피를 보는 일이 흔한 일이 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잔은 엄마를 잃고 만다. 엄마의 참혹한 죽음을 잔은 근처에서 목격했다. 죽음의 빗금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살았고,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은 죽었다. 빠져나오고도 도망가다 붙잡힌 사람 또한 죽었다. 누가 누구를 지켜줄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알아서 살아야했다. 다행스럽게도 잔은 다시 아빠와 오빠를 만났지만 아빠는 얼마 못 가 끌려갔고 진과 함께 숨었던 오빠는 끌려가다 잔 앞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여동생은 엄마가 죽임을 당하던 비슷한 시간, 다른 곳에서 이미 죽었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었다. 믿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잔은 알았다. 죽음보다 더 두려웠던 시간이 지나고 투치족 반군이 진입하면서 잔의 목숨은 사선에서 비껴가게 됐다. 그런데 그때부터 마음이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반군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보살핌을 받았지만 잔은 말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다 아는 언니를 만나게 되고 잔은 독일에 있는 이모를 떠올린다.


이 책은 잔이 독일의 한 가정에 입양되고 난 후, 독일인 엄마와 나눈 이야기들을 엄마가 소설로 만든 책이다. 엄마이자 작가인 한나 얀젠은 잔의 슬픔을 통해 르완다의 아픔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르완다의 비극이 일어난지 벌써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적잖은 세월이 흘렀건만 살아남은 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흔적처럼 가지고 있다. 누구도 잔의 마음 속에 새겨진 고통을 지우개로 지우듯 지워낼 수 없었다. 그러나 잔이 자신의 깊은 상처를 말하고 그 시간들을 돌아볼 때 이미 희망의 싹은 돋아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있을 때 인간의 상처는 아물기 시작한다. 잔에게 독일인 엄마가 있듯이, 이 책은 내게 너도 잔같은 누군가에게 한나가 되면 어떻겠냐고 말하고 있다.  

 

사진출처: http://kk1234ang.egloos.com/2835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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