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파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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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을 통해 백색의 서늘한 공포를 전해주었던 요 네스뵈가 짙은 분노를 안고 돌아왔다. '스노우맨'보다 더 방대한 스케일과, 독자를 놀리기라도 하듯 차분하고도 치밀하게 전개되는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을 한층 배가한채 말이다. 해리 홀레 시리즈 여덟번째 작품인 '레오파드'는 800쪽에 가까운 엄청난 분량임에도 잠시도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주요 등장인물만 해도 30명이 넘고 홍콩에서 노르웨이, 호주, 콩고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반 이상이 소설의 배경이 된다. 한 마리 표범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연쇄살인범의 상상할 수 없는 행보는 깊숙이 내려앉아 있고, 공포는 극대화되어 빠져져나갈 수 없는 덫처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거기에다 자신의 내면을 들려주는 살인범의 이야기는 한 통의 편지처럼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범인은 누구일까? 이제 그 여정이 시작된다. 

 

스노우맨 사건이 해결된지 그리 오래지 않아 또다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해결할 사람은 해리밖에 없다. 그러나 해리는 노르웨이에 있지 않았고, 군나르 하겐 경정은 해리를 데려오기 위해 홍콩에 카야 솔네스라는 미모의 여형사를 파견한다. 라켈과 올레그가 떠난 노르웨이로 해리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중병과 더 이상의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카야와 함께 비행기를 탄다. 지금까지 3명의 여자가 희생됐고, 그들 사이엔 별다른 공통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두 명은 혈중에 케타노메가 주입된 채 자신이 흘린 피가 폐에 들어가 익사했고, 다이빙대에서 목을 맨 한 명은 줄이 몸을 견디지 못해 목과 몸이 분리된 채로 죽었다. 그후 유력한 용의자로 암시됐던 엘리아스 스코그라는 남자가 자기 집 욕조에 등이 달라붙은 채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은 연달아 일어나 아델 베틀레센이라는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아델의 이름으로 르완다와 콩고를 다녀왔던 율리아나 베르니라는 여자 또한 시체로 발견된다. 

 

해리는 연쇄살인 사건의 해결사답게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범인을 추적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내부적으로 얽혀있어 그리 간단치 않다. 해리가 속한 강력반과 오슬로중앙범죄수사기구인 크리포스는 사사건건 부딪치고, 조직의 존폐가 걸린 문제라 군나르 하겐 경정과 크리포스의 미카엘 벨만 경정의 신경전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게다가 해리는 새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벨만에겐 타락한 경찰의 표본이다. 병원에 있는 해리의 아버지는 나날이 쇠약해지고 해리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보게 된다. 아버지는 해리에게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 달라 부탁하지만 해리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다. 

 

한편 살인범은 경찰을 놀리기라도 하듯 계속 흔적을 남기고 해리 또한 범위를 좁혀간다. 드디어 살인범이 누군지 알 것 같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크리포스가 낚아채가고, 벨만은 언론의 영웅이 되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견고히 한다. 벨만은 의기양양하게 살인범을 심문하지만 유력한 재벌의 사위감이라는 걸 알고는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위해 살인범을 풀어준다. 이번 사건에 해리가 꾸린 팀은 카야 솔네스와 비에른 홀름을 포함, 단 세명이었다. 그런데 해리의 움직임을 벨만이 알고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 여전히 사람을 믿는 자신에게 실망한 해리는 다시 알코올에 빠지고 사건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다. 

 

요 네스뵈는 각기 다른 밑그림을 여러 곳에 깐 채 이야기를 전개하며 좀처럼 실마리를 잡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편지를 통해 범인의 심리를 전해주고는 향후 행보까지 유추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함이 범인을 쉽게 잡는 것으로 연결되진 않는다. 정보를 흘리듯 알려주지만 그것이 함정이었음은 범인이라 예상했던 사람이 죽거나 잡히고도 여전히 범행이 현재형으로 진행된다는데 있다. 초반부부터 범인을 암시하면서도 계속적 변수를 주어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능력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작자적 자질은 아니다. 특히 '레오파드'에서 무엇보다 강하게 다가왔던 건 묘사다.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명확하게 잡히는 이미지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현장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정신이 들자, 그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하품을 하고, 코로 숨을 쉬었다. 다시 눈을 깜빡였다. 이미 말라버린 눈물 자국 위로 또 다른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는 목구멍으로 침을 삼킬 수 없었다. 입안은 버석하게 마르고 굳어 있었다. 양 볼은 입속의 물건 때문에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그 이물질은 그녀의 머리를 터뜨릴 기세였다........이젠 막다른 길이었다. 자신과 이 끔찍한 통증, 터질 듯한 머리뿐이었다. "철사는 손대지 마." 만약 철사를 잡아당기면 튀어나온 부분이 다시 들어가고, 그녀는 고통에서 해방될지 모른다.......

 

돌출되어 있던 구멍 안쪽에서 7센티미터 길이의 바늘이 튀어나왔다. 바늘 네 게는 그녀의 양볼을 뚫고 나갔고, 세 개는 부비강, 두 개는 비강, 두 개는 턱 아래를 뚫고 나왔다. 다른 두 바늘은 기도를 뚫었고, 하나는 오른쪽 눈, 하나는 왼쪽 눈을 찔렀다, 예닐곱 개의 바늘은 입천장 뒤쪽을 통과해 뇌까지 침투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다. 금속 공 때문에 턱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터라 상처에서 흘러나와 입안에 고이는 피를 뱉어낼 수 없었다. 피는 기도를 거쳐 폐로 흘러들어갔고, 혈액의 산소 흡수를 방해했다. 그리하여 결국 심장마비, 그리고 검시관들이 보고서에 뇌 저산소증이라 기록하는 증상으로 이어졌다. 즉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보르그뉘 스템 뮈레는 익사했다."

 

 

담담하고 차분한 상황 묘사는 살인 현장과 맞물리며 압축된 공포의 밀도를 증대시킨다. 그러나 '레오파드'에는 이것만 있지 않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를 각기 다른 삶들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패하거나 불완전한 듯 보여도 삶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요 네스뵈는 망가진 듯 보이는 해리의 가족사를 통해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속에 내재한 악이 과연 교화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도 연쇄살인범을 통해 제기하고 있다. 요 네스뵈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질문해야 근원적인 것들을 우리를 대신해 늘 물어왔다. 그랬기에 그의 소설이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레오파드'가 단순한 추리소설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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