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돈나 ㅣ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7
오쿠다 히데오 지음, 정숙경 옮김 / 북스토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마돈나』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이다. 한여름 더위를 웃으며 날리는 데는 오쿠다 히데오의 책이 제격인데, 어찌 하다 보니 시기를 놓쳤다. 올여름 심장 쫄깃하게 만드는 스릴러물도 읽지 않았고, 복날이라고 딱히 보양식도 먹지 않았으니 깔깔 대며 웃을 수 있는 이 책으로 피날레를 장식할 수밖에.
『마돈나』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다루는 소설이다. 이렇게 쓰고 반란이라 읽으련다. 다섯 편의 주인공은 각기 다른데 직급은 한결같이 과장이다. 평사원과 간부급 사이에 낀 중간관리자를 통해 사회의 모순을 짚어보려는 심산이지 싶다.
첫 편은 표제작인 「마돈나」다. 주인공은 42세의 영업3과장인 오기노 하루히코다. 하루히코는 결혼 15년 차로 변변한 연애도 못해보고 직장 동료인 노미코와 사내 결혼을 했다. 사랑조차 못해본 자신의 처지가 딱해서인지 아니면 사랑에 대한 한풀이인지 부하 여직원을 자신도 모르게 좋아한다. 지금껏 3번이나 상상 연애를 했다. 물론 그 연애는 늘 적당한 때에 깨졌다.
어느날 센다이 출신의 4년 차인 구라타 도모미가 자신의 부서로 오게 된다. 본인의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서는 제발 자신의 이상형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상형이 오고야 말았다. 그때부터 철딱서니 없는 상상 연애가 속도를 내며 진행된다. 그뿐인가. 눈치 없는 부하 직원과 라이벌도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하 직원과 하루히코의 암투는 극에 달하고 마침내 육탄전까지 벌어진다. 다음날 아침 둘은 엉망인 얼굴로 회사에 온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셨는지 그녀의 진짜 미소를 보게 되는 일이 생긴다. 훤칠한 키에 하얀 치아가 멋진 싱그러운 젊은 사원의 등장을 통해. 하루히코는 자신에게 부인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씁쓸해 한다. 소심한 중년의 일탈이 재미있다.
「댄스」는 45세의 영업 4과장인 다나카 요시오가 주인공이다. 요시오는 현재 고2 아들과 대립각을 이루고 있다. 아들은 대학도 가지 않고 댄서가 되겠다며 엄마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한다. 세상이 어떤 곳인데, 저런 철없는 소리를 하다니. 요시오는 그 생각이 날 때마다 기가 차고 화가 치민다.
집안 일만 이러면 견딜만한데 직장은 한 술 더 뜬다. 직장은 직장대로 그를 구석으로 몰고 집안에서는 아내까지 가세해 아들 편을 든다. 그에겐 설 자리가 없다. 조직과 가정 어디에서도 쉴 곳이 없는 40대 남자의 애환에 가슴이 짠해진다. 한데 웃긴 건 또 뭘까.
「총무는 마누라」는 출세 코스를 달리고 있는 40세의 온조 히로시가 주인공이다. 간부가 되려면 현장에서 빠져 내근하는 것이 근무하는 회사의 관례다. 회사의 룰을 따라 히로시는 서무계 과장으로 간다. 가보니 서무계만이 아니라 총무부까지 엉망진창이다.
능력 제일주의자인 히로시는 내부의 문제를 규칙에 따라 처리하려 한다. 그러자 부서에서 난리가 났다. 부하부터 시작해 전임 과장, 직속 부장 등 사내 연결된 온갖 사람들이 줄줄이 그를 만나러 온다. 결국 백기를 들고 마는 히로시. 부정을 알고도 묵인하는 조직의 구태의연함과 암묵적 관행이 은근 소름 돋게 한다.
「보스」는 여상사를 모시게 된 44세의 다지마 시게노리의 이야기다. 자신이 차기 부장이 될 줄 확신하고 미리 축하까지 받았건만 조직은 중도 채용자인 하마나 요코를 담당 부장으로 보낸다. 신임 부장은 빈틈 없고 합리적인 상사로 사내 여직원들의 우상이다.
그녀는 엄마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한 치의 모자람 없이 맡겨진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낸다. 이른 출근과 정시 퇴근, 접대문화의 전향은 시게노리의 재밋거리를 다 빼앗아간다. 시게노리는 호시탐탐 상사의 헛점을 노리지만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결국 원치는 않지만 그도 그녀를 자신의 존경할만한 상사로 받아들이게 된다. 일본 조직 문화의 낙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우리는 어떤지, 일본보다 더하지는 않은지 궁금해진다.
「파티오」는 토지개발회사의 과장인 45세의 스츠키 노부히사가 주인공이다. 야심 찬 프로젝트임에도 계획대로 되지 않아 골칫거리로 전락하게 된 주상복합단지가 이야기의 주된 공간이다. 미래형 도시라며 그렇게 광고를 했건만 주말이 되면 이곳은 유령의 도시로 변한다.
그때 멋진 노신사를 보게 된다. 파티오의 한적한 공간에 앉아 책을 읽는 노신사. 그를 볼 때면 자꾸 시골에 홀로 계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는 세상사에 흥미를 잃은 듯하고 누나가 수시로 방문해 돌보고 있다.
아버지를 못 본지도 벌써 6개월이나 됐다. 당일 다녀올 수 있는 거리지만 자꾸 미루고 있다. 아버지와는 변변한 대화조차 나눠 본 적이 없다. 어느날 노신사에게 용기를 내 말을 건내지만 그를 경계하고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노부히사는 타인과 거리를 두지 않은 자신의 경솔함을 질책한다. 그러다 며칠 뒤 근방에서 노신사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통해 아버지와의 거리도 좁히게 된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짐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 남에게 부담이 되는 걸 어느 누가 좋아하랴. 그러나 사람의 손길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이 책은 우회하여 전한다.
물질적으론 풍요로우나 조금 비루해진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마돈나」는 피로회복제 같은 책이다. 조금 늘어진다 싶으면 고삐도 죄고 강약과 완급을 조절해 독자의 콧구멍을 절로 벌렁벌렁하게 만들면서. 하지만 저변의 씁쓸함도 읽혀져 고달픈 삶을 사는 누군가의 자화상을 주인의 동의 없이 본 느낌이다.
조금은 쓰고 피곤한 세상, 심각한데 웃기고 엉뚱한데 쓸데없이 진지해서 읽는 이를 조물조물 주무르는 『마돈나』로 이 여름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 안녕, 여름아. 내년에 다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