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
황숙진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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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어른들의 옛날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을 종종 들여다 봤다. 앨범 속에는 할머니의 언니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모할머니의 흑백 사진도 있었다. 야위고 곱게 생긴 이모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가 모셨다고 했다. 이모할머니에게는 아들이 있는데 일본에 있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이모할머니의 아들, 큰아버지를 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큰아버지가 오셨고 우리나라 제품과는 맛이 다른 짭짜름한 초코파이와 사탕, 포장이 예쁘게 된 간식들을 잔뜩 선물로 가져오셨다. 그리고는 중학생이었을 때 한 번 더 뵙고 큰아버지와는 연락이 끊겼다. 어른들은 돌아가셨을 거라고 했다.


재미 소설가 황숙진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읽으며 큰아버지를 떠올렸다. 미국 이민 1세대의 삶을 그린 소설인데 말이다. 일본에서 어떻게 사셨을까. 당시만 해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던가. 하지만 그곳만 그랬을까. 고국을 등지고 이역에서 터를 잡아야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전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하지 않을까싶다. 그래서 큰아버지를 상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모두 9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맨 앞에 실린 「미국인 거지」는 몆 번이나 되읽었다. 베트남전의 전흔으로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은 한국인인 ‘나’와 흑인 잭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사람들이다. 전쟁터에서 생환했지만 그들은 이미 심하게 망가졌고 누구도 그들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아내가 사경을 헤매던 순간에도 술을 들이키느라 아내를 보호하지 못했고 결국 아내는 세상을 떠난다. 시간제로 일하는 가게 앞에는 신사 같은 풍모를 한 흑인 잭이 매일 와 구걸을 하는데 잭은 밤만 되면 엉망이 된다. 그 또한 월남전의 후유증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어 삶을 소모한다.


「미국인 거지」는 ‘나’와 잭의 서사에 가게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몽골인 부부의 이야기도 덧붙인다. 몽골에서 교수를 했다는 남자는 일용직 점원이나 막일 밖에 할 수 없는데 작가 또한 비슷한 상황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잭은 흑인 갱들 간의 전면전으로 가게 앞에서 희생되고 잭의 죽음으로 ‘나’는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간다. 이 소설은 전쟁의 상흔이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처절하게 그려낸다.


「모네타」는 자본주의의 명암을 도발적이고도 서늘하게 적시한다. 주류사회로 진입하려는 비주류 동양인의 노력이 불을 찾아 질주하는 불나방처럼 애처롭고 눈물겹다. 돈이라면 자신의 영혼마저 팔 수 있는 작중 인물 선우를 통해 작가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도 그럴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또한 비주류의 한계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류 사회로의 진입에 아직도 강고한 벽이 존재함을 알린다.


「죽음에 이르는 경기」는 「모네타」와 유사하면서도 맥을 달리한다. 관중의 오락과 치부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선수들의 모습은 로마시대의 검투사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제국의 멸망 징후는 도덕적인 타락이고 자본주의의 몰락 징후는 인간을 오락거리로 여겨 생명을 경시할 때가 아닐까. 자본주의는 죽음에 이르는 경기라는 말이 자꾸 입가를 맴돈다.


그 밖에도 6편의 단편이 더 있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이야기들은 이국 땅에서의 고단한 삶을 핏빛 눈물로 선연하게 비춘다. 또한 독백처럼 들리는 이야기 속에는 늘 말했으나 여전히 갈한 작가의 속내를 토하듯 드러낸다.


“이런 한국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중에 몇 십 년을 미국에 와서 산다고 해도 절대 미국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중략)...나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었다. 한국인이기엔 한국에 대해 잘 몰랐고 미국인이 되기엔 너무 한국에 대한 기억이 많았다.” 104~105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삶은 외롭고 고단하다. 떠돌다보니 삶은 뿌리 내리지 못했고 전전하기만 할 뿐이었다. 희구한 삶은 애쓴 만큼 보상해주지 않았고, 남은 것은 흰머리와 갈라지고 굵어진 손마디, 생채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성취만이 인생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삶을 개척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는 용단을 내렸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두었다. 게다가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노고를 자신은 안다. 이제 개인사의 아픔과 질곡에서 벗어나 개개인이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되면 좋겠다. 그 역사는 개인사에만 머물지 않고 이 땅의 지경까지 넓힌다.


큰아버지가 서울에 오셨을 때 이모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그러나 엄마를 닮은 이모가 고인의 지난 삶을 전했고, 자신을 반기는 친척이 있어 긴 시간의 공백을 추억으로 채울 수 있었다. 우리 또한 큰아버지의 지난 시간을 통해 아들을 그리워했던 이모할머니를 기쁘게 추억할 수 있었다. 자신을 일군 사람은 시간을 초극해 아픔마저 아름답게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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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장 중심
강이라 외 지음 / 리잼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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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읽기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것은 결국 자신이다. 읽는 것은 글이지만 반사되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자기 얼굴을 못 보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코미디이자 비극이다. 자신을 보려고 거울을 들거나 사진을 봐야 한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보기 위해 매개체가 필요하듯이 자신을 읽기 위해서도 그렇다. 세상이 달라졌다 하지만 책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을 보려고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니 자신이 보였을 뿐이다.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나를 보게 되었다. 책이란 거울에 비친 나는 묘사가 적고 서사에 집중하는 소설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을 못 견뎌하고 그래서인지 핍진성에 주목하며 군더더기 없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소설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니 세상이 더 요지경 인데 굳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보며 그 답도 같이 찾고 싶었다.

이 책은 소설가 다섯 명의 글을 모은 단편소설집이다. 작가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모두 문학상 수상자이고 가슴 한 가운데에 소설을 보물처럼 간직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그리는 세계는 살아온 삶만큼 다르고 보는 시각만큼 다채롭다.

흥미있게 읽은 소설은 문서정의 「손가락은 손가락을 모르고」이다. 그녀 소설의 특징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소설이 이야기라면 그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녀는 매끄럽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며 촘밀하게 직조해갔다.

내세울 것 없는 부모의 자식들이 있다. 그들은 아버지의 도덕적인 결함와 육손이었던 엄마의 신체적인 결함을 감추고 싶어했다. 막내아들은 밖에서 낳아왔고 큰아들은 가족과 절연하다시피하며 산다.

데려온 아들로 인해 큰아들은 엄마와 멀어지고 딸들은 생선 장사로 비린내가 밴 엄마를 부끄러워한다. 엄마가 세상을 뜬 후 자식들은 언젠가부터 엄지 옆 쪽에 손가락이 자라는 것을 깨닫고 다같이 모인다.

그 날 화자와 바로 위의 언니는 막내가 데려온 아이임을 알게 되고 결혼도 안 하고 홀로 사는 큰언니의 비밀까지 알게 된다. 그토록 이기적인 오빠가 한때 자신들의 등록금을 댔다는 것마저 포함해. 돌아가신 엄마의 생일날인지도 모르고 만난 그들이 깨닫게 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모르는지를 안다는 사실은 아픔보다 중요하다. 씁쓸하고 허망한 감정을 안기지만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만 모르는 게 아니다. 자신도 모른다. 큰언니가 엄마의 전세금과 1/5로 나눈 부의금을 막내에게 줄 때 화자와 바로 위 언니는 입 밖으로 혹은 마음 속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런 현실을 이 소설은 선명하게 비춘다.

그밖의 4편의 소설도 각기 다른 이야기로 삶을 그린다. 강이라의 「수국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는 청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분위기다. 봄 날 흩날리는 꽃비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들의 정서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김강의 「으르렁을 찾아서」는 원컨 원치 않건 간에 우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종기라는 아픔을 통해 내 몸에 문제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처럼,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는 그 사람이 우리를 살리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재고케 한다.

김도일의 「관목貫目」은 내게 처음으로 멋진 문장으로 이뤄진 장(章)이 전개에 있어 필요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 소설이다. 번득이는 칼 같고 갓 바다 위로 끌어올려진 생선처럼 퍼득이는 문장들로 이뤄진 시적인 글이었지만, 도입부에 있어 이 부분이 있어야 할 장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이 소설이 가진 완결성이나 주제의 묵직함, 베트남 전쟁이라는 특수성을 보편성의 자리까지 이끈 서사의 힘은 주목하고도 남을만한 의의를 가진다.

전은의 「크리미는 크리미해」는 가독성이 좋은 반면 전언은 예사롭지 않다. 이혼을 한 엄마가 딸에게 갖는 집착과 폭력, 자신의 바람을 딸에게 투사한 후 또다른 실패가 두려워 삶을 놓아버린 엄마의 이야기는 곤혹스러웠다. 딸의 장래를 위해 숨겨놓은 전자화폐는 딸이 믿은 같은 처지의 아르바이트생에게 털리게되고, 딸은 만져본 적도 없었으니 가진 적도 없다며 허탈해한다. 엄마로서만 읽고 싶었던 책이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 인터뷰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소설을 읽어야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 나와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공감하게 만든다. 이런 것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데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감정도 이해하게 된다."

결국 소설은 나를 읽고 너를 읽는 행위이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너를 알아야하는데, 인간이 결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나 이외의 것들로 채워졌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렇다. 심지어 내 몸조차도 부모에 의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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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소설 『숨』을 읽고 있다. 장편은 아닌 소설집이다. 이렇게 우아한 소설이 다 있나 싶다. 작가들에게 이야기꾼이라는 말을 종종 붙이는데, 이 소설은 그 말의 정의를 소설로 보여주는 것 같다.

중국계 작가 혹은 중국 작가들의 책을 드물게 읽는다. 적게 읽고 뭐라 규정하는 것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겠지만, 내 독서경험으로 그들은 낙천적이다. 책을 읽자면 피식 웃음이 나와 국민성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


중국계 미국 작가로 테드 창과 켄 리우의 소설을 읽었다. 켄 리우는 『종이 동물원』을 썼다. 이 책을 읽었을 때도 속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 있구나 싶었으니까. 둘 다 빼어나게 잘 쓰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구성하고 끌어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켄 리우는 하버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한 후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테드 창은 브라운에서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과학도다.

이 둘은 이런 학문적 사회적 배경과 중국이라는 문화적 배경을 기저에 깔고 글을 쓴다. 남다를 수밖에 없지 싶다. 둘은 SF소설로 받을 수 있는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이렇게 이질적인 문화를 가슴에 담고 쓰는 작가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이방인』을 쓴 한국계 미국인인 이창래의 소설이 그렇고, 훨씬 앞서 노벨상 후보로도 올랐다는 『순교자』의 김은국도 그렇다.









『순교자』를 도정일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글이 어쩌면 그리 유려한지, 상황의 긴박성이나 두려움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이 전반에 흘렀다. 게다가 1950년대에 쓰여진 글이 그렇게 세련될 수 있는 건지 감탄하며 읽었다.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또 어떤가. 노벨상마저 수상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전세계를 품었으니까. 그의 책 『나를 보내지마』를 봤는데 그의 소설은 이들과 또 결이 달랐다.






테드 창의 『숨』으로 시작했으니 『숨』으로 마무리 지어 야겠다. 이 책은 500 쪽이 넘는다. 그러니 내 속도로는 얼마나 걸릴지 예측 불가다. 이렇게 멋진 소설을 읽고 감상을 올리지 않는다면 그건 소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첫 작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불과 50쪽이다. 나는 이 단편을 2시간을 들여 읽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보는 것 같은 신비로움과 몽환적인 분위기, 시간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놀라운 서사의 힘에 아주 행복했다.

이 단편만으로도 이 책은 이미 충분했다. 전작 이후 무려 17년 만에 쓴 소설이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오기 힘든 류의 책이지 싶기도 하고. 소설이 주는 기쁨에 오랜만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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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었냐고 묻기에 - 김이수 시집
김이수 지음 / 책익는마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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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이가 있다. 시로 세상을 보고 시가 전부가 되어 시로 사는 사람. 그런 이가 시인이다. 먼저 아프고 늦게까지 울며, 세상 이치를 깨달아 도리어 아이가 되어버린 사람. 사는 일에 서툴어 계산을 놓아버린 사람. 이런 이 또한 시인이다.

시라는 숙명을 안고 사는 시인 김이수의 『무슨 일 있었냐고 묻기에』를 본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시집에는 154편의 시가 들어있다. 차곡차곡 쟁여진 시들을 읽는다. 시들은 사계로 나뉘어 계절의 옷을 두르고 향기를 뿜는다.

김이수는 '내는 글'에서 시를 아픈 물음이라 천명한다. 시인은 시에 대해 다시 언급하며 "감상을 딛고 일어선 삶이며 한없이 고독한 추락이고 눈물초자 사치인 남루"라 선언한다.

시인은 시에 대해 되물어야한다. 그 여정이 지난하고 부담스럽다해도 묻는 일을 소홀히 할 때, 시는 옹색해지고 시의 품은 줄어든다.

김이수의 시는 찌르고 도려내며 외치고 폭발할 때 빛난다.

「내 몸은 종들의 무덤」
그의 "애비는 종奴이었다"하고 그는 시류와 보신의 종이었고
그의 시는 '배암'의 혀였고 그런 종들과 배암들을 주워 먹은
나는, 종들과 배암들의 무덤이고 나의 언어는 그 썩은 시체이고
시를 참칭한 나의 언어는 그런 시체에 슨 구더기고, 구더기가
내지른 오래 묵힌 똥이 쌓여서 진동하는 악취를 향기로 속이고
그 악취를 다시 구더기가 먹고 구더기는 내 몸에 날로 창궐하여
내 몸은 늘 편안한 종들의 무덤...하략
그의 펜은 칼이고 나비다. 날카롭고 섬세하며 얼음이고 불이다. 약자를 향한 그의 눈엔 물기 가득하지만 기름진 자들의 위선엔 서슬퍼런 칼날을 들이민다. 그 세기는 다른 이에도 또 자신에게도 동일하다.

「인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짠하다 / 그중 인간은 더욱 짠하다
제 거처를 잡아먹으며 / 제 동족을 잡아먹으며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며 / 자멸의 벼랑을 높여온
인간은 그래서 더욱 짠하다
인간 말고 모든 존재를 / 마침내 인간 자신마저도
타자(他者)로 추락시킨 인간은 / 짠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아침, / 스스로 짠한 마음에 / 눈물이 복받친다

김이수는 인간의 한계 또한 잘 안다. 어찌할 수 없는 굴레에 매여 사는 것을 알기에 그의 시는 연민으로 마무리된다. 혼자 살겠다며 지옥도를 만드는 인간에게 측은함을 갖는 건 그 또한 부질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계속 시를 읽어간다. 고집을 피워 내 마음대로 시들을 분류해본다. 생과 사물에 대한 성찰, 힘든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사랑으로.

「꽃 진들 봄이 지랴」
비에 젖은 꽃 / 제 무게를 못 이겨 바람에 진다
눈물로 핀 봄꽃 깊디깊은 꽃자리 / 여름을 남기고 기쁘게 진다
꽃 진들 봄이 지랴
여름으로 깊어져 가을로 익은 끝에 / 겨울로 잠들었다가 이내 깨어나 매양 봄이거늘
꽃 진들 봄이 지랴

그가 노래하는 것은 계절이 주는 경이와 충만, 조락과 사멸이지만 그 안에 사람이 있지 않으면 무슨 맛이 있을까. 그는 계절을 통해 삶을 노래하고 생명의 순환을 그린다.

꽃고 지고 우리네 생도 진다. 그러나 다음을 기약하니 스러진다 해도 기쁘게 보낼 수 있다.

「가을 편지 1」
흐려서 깊은 밤, / 세검정 지나온 홍제천은 / 붉게 타는 울음입니다
젖어서 푸른 아침, / 꿈결에도 없는 당신은 / 아득한 나의 가을일까요밤샌 어느 날, / 냇물에 실려 온 붉은 잎 하나 /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

김이수는 사랑에 약하다. 그의 사랑은 때로 순진하고 대개 애처로우며 지극하다. 그는 사랑 앞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다. 뒤돌아서 흘리는 눈물, 봄의 소년이고 여름의 청춘이며 가을의 중년이자 겨울의 순정이다.

이렇게 시들을 뽑아냈지만 정작 시인은 아프다. 모든 잉태엔 출산이 있고 산고를 전제하기에.

김이수의 시는 그가 말한대로 '자기 안에서 또 관계의 행위 안에서' 계속 확장되어 누군가에게 곁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를 놓지 못한다. 그에게 시는 영원한 사랑이자 천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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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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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열고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사람은 별처럼 빛난다.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올 땐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온다. 과거의 아픔과 오늘의 영욕, 미래의 불안까지 한 존재의 전부가 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남의 수취인은 자신을 던지는 용기를 내야한다. 사람이 사랑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기심이라는 고약한 습벽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반길 때만큼 아름다울 때가 있을까. 친척 중 손님이 오면 반가운 얼굴로 살갑게 맞이하는 고모가 있었다. 언제나 활짝 웃으며 반겼는데, 고모가 말을 할 때는 사투리마저 감미로워 공기방울이 뽀글뽀글 올라 오는 것 같고 비타민 C를 깨물어 먹는 느낌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만났을 때 고모는 여전히 멋쟁이었지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사람을 반기던 사랑스런 얼굴은 사라지고 마지못해 웃는듯한 시들은 표정의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토록 예뻤던 웃음은 어디로 간 걸까. 그때 알았다. 다른 사람을 반기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반기는 것이었음을.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으며 사람을 살게 하는 힘에 대한 생각을 계속 했다. 『밝은 밤』은 증조모에서 외할머니, 엄마와 나로 이어지는 4대 100년의 이야기다. 여인들의 삶은 격랑 위를 떠다니는 배처럼 늘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세상이 아무리 날뛰어도 남편이 바르면 가정은 평안한데 여인들의 남편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무관심했다. 가까이에서 보듬어주기는 커녕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깨버리며 여인들을 춥게 했다. 이들의 서사 위에 이웃인 새비와 새비의 남편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무척 서글펐으리라.

새비는 백정의 딸로 태어나 사람다운 대접도 받지 못하고 살았던 증조모 삼천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새비는 증조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고, 증조모와 새비의 우애는 험한 세파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어 세상으로 그들을 추동했다.

증조모뿐 아니라 이들에게는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외할머니 영옥에게는 피난지에서 신세를 진 명숙 할머니가, 서술자인 나의 엄마 미선에게는 명희 언니가, 나 지연에게는 지우가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던가. 『밝은 밤』은 ‘여적여’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57쪽)이라는 전언을 보란듯이 뒤집는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받아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힘이며, 생명을 배태했던 여자이기에 더 풍성하고 역동적인 존재로 살 수 있음을 선연히 보여준다.

읽는 동안 안 리즈 그로베티의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이 겹쳐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도 우정을 지킨 두 남자를 그린 이 책은, 무참한 역사속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음을 그려냈다. 막다른 골목 같은 상황에서 파리 목숨보다 낫지 않은 처지에 있는 인간이 우정과 신뢰를 지키려할 때 얼마나 위엄있는 존재가 되는지를 역설했다.

생존을 위해 등을 돌리는 것쯤은 예사인 시대에 유대인 친구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독일인 친구와, 친구에게 피해를 줄까 우려해 아이만 부탁하고 종적을 감춘 유대인 친구는 마치 증조모와 새비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고통의 시간을 우애로 견디며 헤쳐온 그녀들의 이야기는 또다른 삼천과 새비, 영옥과 미선, 지연에게 이어져 오늘도 들려진다. 초라하고 내세울 것 없지만 웅숭깊고, 시간마저도 이길 수 없었던 서로를 향한 우애는 더욱더 강고해져 안타까웠던 삶의 정황을 전복해 이미 충분한 것으로 전환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감싸안으며 나직하게 전하는 그녀들의 목소리에는 태고로부터 이어진 생래적인 힘이 담겨있다. 그 소리는 나직하고 안온하며 오늘도 힘차다.

저 달이 너를 비춰 줄거야. 같이 가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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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Stranger 2021-09-0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