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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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열고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사람은 별처럼 빛난다.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올 땐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온다. 과거의 아픔과 오늘의 영욕, 미래의 불안까지 한 존재의 전부가 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남의 수취인은 자신을 던지는 용기를 내야한다. 사람이 사랑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기심이라는 고약한 습벽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반길 때만큼 아름다울 때가 있을까. 친척 중 손님이 오면 반가운 얼굴로 살갑게 맞이하는 고모가 있었다. 언제나 활짝 웃으며 반겼는데, 고모가 말을 할 때는 사투리마저 감미로워 공기방울이 뽀글뽀글 올라 오는 것 같고 비타민 C를 깨물어 먹는 느낌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만났을 때 고모는 여전히 멋쟁이었지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사람을 반기던 사랑스런 얼굴은 사라지고 마지못해 웃는듯한 시들은 표정의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토록 예뻤던 웃음은 어디로 간 걸까. 그때 알았다. 다른 사람을 반기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반기는 것이었음을.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으며 사람을 살게 하는 힘에 대한 생각을 계속 했다. 『밝은 밤』은 증조모에서 외할머니, 엄마와 나로 이어지는 4대 100년의 이야기다. 여인들의 삶은 격랑 위를 떠다니는 배처럼 늘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세상이 아무리 날뛰어도 남편이 바르면 가정은 평안한데 여인들의 남편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무관심했다. 가까이에서 보듬어주기는 커녕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깨버리며 여인들을 춥게 했다. 이들의 서사 위에 이웃인 새비와 새비의 남편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무척 서글펐으리라.

새비는 백정의 딸로 태어나 사람다운 대접도 받지 못하고 살았던 증조모 삼천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새비는 증조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고, 증조모와 새비의 우애는 험한 세파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어 세상으로 그들을 추동했다.

증조모뿐 아니라 이들에게는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외할머니 영옥에게는 피난지에서 신세를 진 명숙 할머니가, 서술자인 나의 엄마 미선에게는 명희 언니가, 나 지연에게는 지우가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던가. 『밝은 밤』은 ‘여적여’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57쪽)이라는 전언을 보란듯이 뒤집는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받아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힘이며, 생명을 배태했던 여자이기에 더 풍성하고 역동적인 존재로 살 수 있음을 선연히 보여준다.

읽는 동안 안 리즈 그로베티의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이 겹쳐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도 우정을 지킨 두 남자를 그린 이 책은, 무참한 역사속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음을 그려냈다. 막다른 골목 같은 상황에서 파리 목숨보다 낫지 않은 처지에 있는 인간이 우정과 신뢰를 지키려할 때 얼마나 위엄있는 존재가 되는지를 역설했다.

생존을 위해 등을 돌리는 것쯤은 예사인 시대에 유대인 친구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독일인 친구와, 친구에게 피해를 줄까 우려해 아이만 부탁하고 종적을 감춘 유대인 친구는 마치 증조모와 새비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고통의 시간을 우애로 견디며 헤쳐온 그녀들의 이야기는 또다른 삼천과 새비, 영옥과 미선, 지연에게 이어져 오늘도 들려진다. 초라하고 내세울 것 없지만 웅숭깊고, 시간마저도 이길 수 없었던 서로를 향한 우애는 더욱더 강고해져 안타까웠던 삶의 정황을 전복해 이미 충분한 것으로 전환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감싸안으며 나직하게 전하는 그녀들의 목소리에는 태고로부터 이어진 생래적인 힘이 담겨있다. 그 소리는 나직하고 안온하며 오늘도 힘차다.

저 달이 너를 비춰 줄거야. 같이 가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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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Stranger 2021-09-0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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