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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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일본 소설을 읽는다. 읽고 나면 여운이 남는다. 따스하고 애잔한 글 속에 머물다 나오면 잠시 가만히 있게 된다. 그 잔상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책을 읽고 난 후 느껴지는 내 안의 충만함, 어쩌면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어 찾아 읽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작가들 특유의 잔잔히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발이 고운 채에 거른 것 같은 그런 담백한 정서를 좋아한다. 그런데 일본 소설의 저 밑에서 뜨거움을 발견할 때가 있다. 마치 없는 것처럼 그리지만 활화산 같이 뜨거운 삶에의 열망이 가득 히 느껴진다.

너무 뜨거워 차갑게 가라앉혀야만 되는 열망, 그런 열망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걸어가는 그들 특유의 생에의 여로를 좋아한다. 묵묵히 가기 위해 오로지 그 자신에 의해 식혀져야할 열정과 초월적이라 여겨질 만큼 담담한 생을 향한 순응적 인생관이 우리와는 달라새롭게 다가온다. 땅이 다르고 물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에 나오는 정서일테다.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는 모리 에토의 나오키상 수상작이다. 모리 에토는 아동ㆍ청소년물로 시작해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후 성인물로 방향을 튼다. 2006년 모리 에토는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하고 세 번째 작품인 이 단편집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한다.

책 속엔 표제작인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를 포함해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6편의 단편엔 하나같이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세상에 쉬운 삶이 어디 있겠으며 노정의 고단함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만 그녀는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렇기에 고달픔은 처량함이 되지 않고 생의 질곡 또한 삶의 여정의 동반자로 치환된다.

표제작인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는 모리 에토의 역량을 뚜렷히 보여준다. 유엔 난민사업에 종사하는 리카는 NGO에서 활동하던 전남편 에드가 다른 사람을 구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끝내 파경에 이르고 말았지만 리카는 에드를 사랑했다. 이름도 모르는 소녀를 위해 목숨을 버린 에드.

"비닐 시트가 바람에 휘날린다. 사나운 한 줄기 바람에 펄럭이고 뒤집히고 구겨질 대로 구겨져서 우주를 춤춘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처럼 무수하게, 아우성치고 있다. 날씨는 절망적이고 바람은 폭력적으로 몰아친다. 바람이 불면 휘날리는 비닐 시트. 한없이 날려간다. 돌이킬 수 없는 저편으로 내몰리기 전에, 허공에서 그 몸이 찢겨지기 전에, 누군가 손을 내밀어 잡아주어야 한다. " 327 쪽

리카는 에드를 알기에 그의 죽음을 개인적인 슬픔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위해 살았던 에드. 그는 죽어 굳어버린 몸으로도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한다. 이제 리카는 그의 죽음을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껴안은 후 더 커진 사랑으로 현장을 향해 나아간다. 누군지도 모르는 소녀를 위해 자신을 던진 한 남자의 생을 미완이나 비극으로 그리지 않은 작가의 시선이 경이롭다.

"나는 온갖 나라의 난민 캠프에서 비닐 시트처럼 가볍게 날려가는 사람들을 봐왔어. 생명도, 인간의 존엄성도, 사소한 행복도 비닐 시트처럼 아주 쉽게 날아올라 구깃구깃 구겨져서는 그대로 날려가는 거야. 폭력적인 바람이 불었을 때 가장 먼저 날려가는 것은 약자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야. 노인이나 여자, 아이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들. 누군가가 손을 뻗어 그들을 도와줘야 해. 그 손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랄 지경이야. " 387쪽

모리 에토는 살았으면 더 많은 일을 했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실로 규정하지 않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의 의미마저 새롭게 해석한다. 모리 에토는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로 죽음을 통해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평생을 다해도 못할 일을 단회의 죽음으로 완성할지도 모른다고. 누구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참 위대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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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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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화려하고 섬찟하며 도발적이고 무겁다. 읽다 보면 어느새 손바닥은 축축해지고 몸은 떨리고 다음 장을 읽는 게 두렵다. 나도 안다. 그깟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덮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서 은근히 미화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나르시시즘이다. 하지만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시스트가 꽤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 만을 우선하는 이기적인 성향이 강하며 조종술에도 뛰어나 극단을 오가며 곁에 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 정신까지 탈취한다. 다른 사람의 불행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단지 철저하게 이용하고 지배할 뿐이다. 그래서 악에 경도될 확률이 높다.

 

『완전한 행복』은 그런 나르시시스트로 인해 빚어진 사건을 정유정만의 해법과 도식으로 펼쳐 보인다. 정유정은 몇 년 전 한 섬에서 일어났던 섬찟한 사건을 모티브로 가져와 압도적인 서사와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구성으로 새롭게 풀어낸다. 이 소설은 유나라는 나르시시스트를 가운데 두고 유치원생인 딸 지유와 현 남편인 은호, 언니인 재인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나는 타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각기 다른 시선 속에 점층적으로 실체를 드러내며 모습을 확장해간다. 유나는 자신의 손아귀 안에 사람들을 구겨 넣고는 숨도 못 쉴 만큼 구속하며 조종한다. 때로는 당근으로, 때로는 채찍으로.

 

유나는 어릴 적 엄마의 와병으로 할머니의 손에 잠시 맡겨지면서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실감과 자신이 누려야할 행복을 언니 재인이 뺏어갔다는 생각을 하며 미움을 키웠다. 재인에 대한 미움은 커서도 결코 풀지 않는데 재인의 오랜 남사친이자 마음 속의 연인을 가로채 결혼해서 앙갚음을 한다. 유나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매력에 세뇌되어 꼼짝 못하는 남자들을 보았고, 매력의 위력을 누누이 실감하는데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욕망은 이제 그녀보다 크다. 그녀가 욕망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그녀를 휘두르고 있다. 완전한 행복이라는 있을 수 없는 것을 바랐으니 대가를 치르는 것은 이제 당연하다. 뺄셈으로 불행의 가능성을 제거하겠다니. 완전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니. 행복하겠다며 불행을 선포하는 인간의 미련함이 불꽃보다 뜨겁다. 그녀가 불꽃이 되어 피어날 때 사람들은 공포에 떤다.

 

 

생존의 욕구만큼 강한 게 있을까? 그녀의 사랑에 탐닉했던 남자들은 살기 위해 분투했고, 죽음의 포승줄을 끊으려 몸부림쳤다. 한번 빨대가 꽂히면 몸 안의 수분을 다 빼앗기고서야 벗어날 수 있는 게임에 걸려든 것이다. 유나는 죽음을 부르는 여자였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도 반짝였다. 거미줄에 걸린 애벌레의 운명은 무거웠다. 그렇게 가는 거미줄의 탄성이 그토록 강할 줄이야. 엄혹하며 서슬퍼런 냉기를 가지고서도 유나는 곁에 있는 이들을 불사를 수 있었다.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전개될 때마다 심장이 급하게 뛴다. 살갗이 서늘해지고 으스스하다. 이야기 속에 빨려들어가는 것 같아 급히 일어나 걸칠 옷을 가져온다. 소리 없이 유나가 모습을 드러내거나 쿵쾅거리며 혈안이 되어 찾는 듯한 느낌에 책을 덮는다.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십여 년 전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을 읽었을 때도 이랬다. 고작 책일 뿐인데, 글 몇 자를 이기지 못해 떨고 있다니.

 

사람다울 때 인간은 찬연히 빛난다. 지유와 함께 할 때만 유나는 사람으로 돌아온다. 서늘하고 매정하지만 그래도 엄마라고 지유만큼은 챙겼다. 그러나 지유에게 유나는 좋지만 무서운 사람이고, 용서가 없는 사람이며 아빠로부터 자신을 갈라놓은 사람이기도 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지유는 엄마를 겪으며 알았다. 잘못하면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일체의 변명이나 떼쓰기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사람이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을 지유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이 시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빙빙 돌고 있다. 유나가 과연 나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인가에 관해 물어볼 자신이 없어서다. 그녀는 싸이코패스에 나르시시스트이고 나는 정상적인 사람인가. 내 안에 그런 악은 없는가. 고백하자면 나도 내 안의 악을 본 적이 있다. 희한하게도 아기를 낳고 나니 내 안의 이기심이 선명하게 보였다. 수면 아래 가려져 있던 한 번도 자각하지 못했던 내 안의 어두움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두려운 경험이었다.

 

화사하고 빛났지만 유나는 언제나 죽음을 불러왔다. 그토록 애썼지만 유나의 남자들은 아무도 살아서 유나를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남편조차도. 지유와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너무도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타인을 장난감처럼 주무르며 즐기더니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파편을 맞고 유나 또한 그렇게 삶을 마감한다. 타인은 자신에게 당해도 마땅하고 자신은 불행과 무관하다는 오만이 결국 자신을 파괴로 밀어넣었다. 나르시시즘이라는 악이 추동한 결과다.
 

정유정은 말한다. 우리는 소중하지만 특별하지는 않은 존재라고. 특별한 나를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어줍짢은 생각이 결국 자신을 삼켜버리는 결과를 보는 것은 비극이다.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 그래서 그에 준하는 대접과 상황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유아기적 생각이 불러온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정유정은 선명하게 그려낸다. 그 서늘하고 푸른 불꽃 같은 책을 작년에 여름에 읽었다. 그리곤 이제서야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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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매 의사입니다 - 치매에 걸린 치매 전문의의 마지막 조언
하세가와 가즈오.이노쿠마 리쓰코 지음, 김윤경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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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라는 말을 들으면 저절로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치매로 인한 사고로 병원의 중환자실에 계시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집에 오신 후 눈을 감으셨다. 새해 첫날이었다. 할머니의 치매가 수면 위로 부상한 날을 기억한다. 변비로 고생을 많이 한 다음날, 할머니는 엄마에게 “형님, 안녕히 주무셨는교” 하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인사를 하셨다.

할머니는 아들 다섯에 딸 하나를 두셨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생활을 책임지셔야 했다. 살아계셨다면 116세가 되셨을 할머니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곳을 포함 위로 아들 셋은 공대를, 밑의 셋은 고등학교까지 보내셨다. 만약 세 분이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면 할머니는 두말 않고 대학까지 보내셨을 거다.

할머니는 참 좋은 분이셨다. 일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돈인 우리 이모도, 외삼촌들도 할머니를 좋아했다. 이북에서 홀로 내려왔다는 이모부는 할머니를 보러 김포에서 동교동까지 찾아오곤 했다. 그런 할머니에게 치매가 온 데는 남에게 말하지 않고 속으로 삼키는 성정과 넷째 다섯째 삼촌 때문에 속을 많이 끓인 것이 주된 요인이 되었지 싶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을 때 우리 친가는 형제들끼리 함께 한 회사의 부도로 집안 전체가 주저앉은 상황이었다.

그런 정황에도 넷째 삼촌이 와서 들볶으면 할머니는 돈을 구하러 간다며 집 앞의 큰 도로를 마구 건너가곤 하셨다. 할머니의 패물은 언제 가져갔는지 남은 게 없었고 그 후 할머니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지셨다. 사고라도 날까 걱정이 된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새로운 집은 다 좋은데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좀 가팔랐다. 늘 조심한다 했지만 결국 그 계단에서 할머니가 굴러 머리를 두 번이나 다치셨다. 첫 번째는 금세 나으셨다. 그러나 두 번째는 전과 달랐고 할머니는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의 중환자실에 반 년을 넘게 누워 계셨다.

중환자실에 계신 할머니의 면회는 하루에 세 번 허용되었다. 새벽과 점심과 저녁 5시인가 6시. 평일 그 시간에 맞춰 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동생들도 학교를 다녔고 그 무렵은 엄마도 직장을 다니셨다. 할머니를 뵈러 면목동 집에서 휘경동까지 걸어 갔는데 할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 먼 줄도 모르고 걸었다.

어느 날 “할머니 저 왔어요” 하고 인사를 드리고 손을 잡았는데 할머니가 내 손을 꽉 잡으셨다. 너무 좋았다. 그 때문에 그 길을 걸어서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우리 할머니의 말년이 이토록 비참하다는 사실이 무척 슬펐다. 이 년 전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시댁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간 고모마저 그때는 서울에 올 수 있는 상황이 안 됐다. 고모라도 계셨으면 할머니에게 얼마나 좋았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 꿈을 자주 꾸었다. 할머니에게 잘해 드리지 못한 점들만 새록새록 떠올랐고 집안이 어려울 때 돌아가셔서 한없이 가슴이 아팠고 그리웠다. 내게 치매는 한 인간이 겪는 어쩔 수 없는 노화의 과정이 아니라 할머니와의 이별을 앞당긴 도화선이었고 슬프고 아픈 시기를 부른 고통스러운 질병이었다.

한 인간의 존엄을 서서히 앗아간 치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치매는 내가 만났던 치매와는 다르게 무겁지 않았고 공포스럽지 않아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치매 전문의였던 의사가 치매 환자가 되어 몸소 겪으며 쓴 글이라 믿을 수 있었고 위로와 안심이 되었다.
요즘 치매는 암보다도 더 두려운 느낌을 준다. 기억이 사라져 종국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비감한 일인가. 치매 환자를 돌보다 지친 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기사도 종종 보게 될 만큼 이제 치매는 고령화 시대의 팬데믹이 되었다.
이 책은 치매 전문의로 50여 년을 살았던 저자가 88세 때 치매에 걸린 후 자신의 일상을 사명감을 갖고 전하는 책이다. 저자 하세가와 가즈오는 세계 최초로 표준치매진단검사를 만들었고, 인간 중심의 케어를 일본 의료계 전반에 보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저자는 치매의 가장 큰 위험 인자를 노화라 하며 100세 시대를 맞은 현대에는 누구나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가 책을 낸 이유는 이제 치매가 누구나 마주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였단다.

" '이렇게 하세요' 하고 혼자 이야기를 주도하며 뭐든지 결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당황한 치매 당사자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무얼 하고 싶으세요?” 하는 식으로 물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오늘은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가요?” 하는 질문도 해 주세요. 그러고 나서 상대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귀담아들어 주면 됩니다.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든 마음이든 아픈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을 내어 주는 일입니다." 「돌본다는 건 내 시간을 주는 일입니다」 중에서

저자는 치매 가족을 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려준다. 또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교정해 주기도 한다. 치매에 걸리면 같은 증상이 매일 계속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단다. 덧붙여 한번 걸리면 끝이라든가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특별 취급도 하지 말라 한다. 게다가 치매 당사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장애의 정도를 줄일 수 있다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지 모르겠다.

남에게 생긴 일은 내게도 생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남에게 생긴 일이 함의하는 것은 대개는 불행한 일이니 무서운 말이다. 불행이 내게 닥치지 않기만을 바라거나 닥치치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안심만 할 게 아니다. 노화와 함께 비례하는 치매 발생률을 생각하며 조금씩 알아가고 준비하면 좋겠다. 이렇게 말해도 맞이할 엄두도 안나고 회피하고만 싶은 질병이지만 저자 하세가와 가즈오는 쉽고도 명확한 지침으로 우리를 다독인다.

“저는 어떤 병에 걸렸든 아픈 사람에게는 신체적인 케어만큼 정신적인 케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그 사람다운 모습,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지지하는 사고와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정신적인 케어라고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저를 지지해 주세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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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편집 - 결국 생각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를 만든다
안도 아키코 지음, 이정은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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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산다. 이 시대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정보를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정보를 취사하거나 식별하는 능력의 다른 이름이 편집이다. 의식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우리는 편집을 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편집을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아무리 편집을 잘한다 해도 물밀듯 밀려오는 정보를 편집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안도 아키코는 편집력과 편집공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처한 근원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는 편집력을 '새로운 것에 대한 시작이나 그곳에 있는 방법을 발견해 내는 힘'으로 규정한 후, 편집공학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거나 세분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 자체로 처리하는 기술'로 정의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마다 그 힘이 나타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안도 아키코는 이것을 재능이라 정의하며 재(才)는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기본이나 근본이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어 발휘하도록 하는 것을 능(能)이라 규정한다. 

 

그렇다면 편집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가장 먼저 작업의 세분화를 해야한다. 이는 쐐기를 박는다고 할만큼 중요한데 쪼개고 나누기가 정보에 대한 편집의 시작이다. 세분화라는 첫 삽을 통해 방을 정리하는 작은 일에서부터 직장에서의 작업 관리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정보까지도 세분할 수 있다. 


그 다음은 비교하고 맞춰 보고 비틀어 본다. 이어 비슷한 것을 찾거나 유연하고도 전략적 사고를 하거나 유추적 사고를 한다. 그리고는 가설을 세워본다. 그 다음에는 한 대상에 대해 행위를 하는 주체가 달라지면서 끄집어내는 의미가 달라지는 어포던스(affordance) 를 생각한다. 더하여 고정관념을 버리고 언런(unlearn)으로 본질을 찾아가 본다. 

 

이어 '~답다'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 보이지 않는 것을 가치로 전환해 보고,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내러티브 접근법도 활용해본다. 여기까지의 과정이 세계와 나를 재구성하는 편집의 과정이다.

 

계속하여 재능을 개발해주는 편집사고의 10가지 방법이 제시된다. 앞서 열거되었던 방법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와 용례들이어서 이해하기가 한결 쉽다. 이 이야기들은 결국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세계관의 발현이자 친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말한다. 그래서 쉽지 않지만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려할 때마다 각자 안에 내재한 편집력은 계속 풀려나오게 된다.

 

저자는 자신의 스승인 마쓰오카 세이고의 책 『지의 편집술』에서 핵심 내용들을 가져 오는데 편집은 놀이와 대화와 결핍으로부터 생겨나며, 조합이자 연상이며 모험이라 정리한다. 또한 방법이야말로 콘텐츠라며 21세기는 방법의 시대가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설가 J. G. 밸러드가 언급한 '인류에게 남겨진 최후의 자원은 상상력'이라는 말로 책을 마무리 짓는다. 어쩌면 인류가 AI로의 틈입으로부터 거의 유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영역이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편집은 무엇일까? 아직 생각이 다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정보를 선별하면서 자신의 고정관념을 헐고 그 위에 용기를 더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지 싶다. 또한 지식이 아니라 경험의 체화이며 변해야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한걸음씩 생각을 확장해 나아간 후 결국 나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는 일이지 싶다. 이 책은 내게 많은 시간을 요구했고 그로 인한 부담감도 주었지만 그 시간의 값을 충분히 하였기에 꽤 유용한 책이었다고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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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황숙진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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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어른들의 옛날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을 종종 들여다 봤다. 앨범 속에는 할머니의 언니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모할머니의 흑백 사진도 있었다. 야위고 곱게 생긴 이모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가 모셨다고 했다. 이모할머니에게는 아들이 있는데 일본에 있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이모할머니의 아들, 큰아버지를 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큰아버지가 오셨고 우리나라 제품과는 맛이 다른 짭짜름한 초코파이와 사탕, 포장이 예쁘게 된 간식들을 잔뜩 선물로 가져오셨다. 그리고는 중학생이었을 때 한 번 더 뵙고 큰아버지와는 연락이 끊겼다. 어른들은 돌아가셨을 거라고 했다.


재미 소설가 황숙진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읽으며 큰아버지를 떠올렸다. 미국 이민 1세대의 삶을 그린 소설인데 말이다. 일본에서 어떻게 사셨을까. 당시만 해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던가. 하지만 그곳만 그랬을까. 고국을 등지고 이역에서 터를 잡아야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전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하지 않을까싶다. 그래서 큰아버지를 상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모두 9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맨 앞에 실린 「미국인 거지」는 몆 번이나 되읽었다. 베트남전의 전흔으로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은 한국인인 ‘나’와 흑인 잭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사람들이다. 전쟁터에서 생환했지만 그들은 이미 심하게 망가졌고 누구도 그들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아내가 사경을 헤매던 순간에도 술을 들이키느라 아내를 보호하지 못했고 결국 아내는 세상을 떠난다. 시간제로 일하는 가게 앞에는 신사 같은 풍모를 한 흑인 잭이 매일 와 구걸을 하는데 잭은 밤만 되면 엉망이 된다. 그 또한 월남전의 후유증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어 삶을 소모한다.


「미국인 거지」는 ‘나’와 잭의 서사에 가게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몽골인 부부의 이야기도 덧붙인다. 몽골에서 교수를 했다는 남자는 일용직 점원이나 막일 밖에 할 수 없는데 작가 또한 비슷한 상황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잭은 흑인 갱들 간의 전면전으로 가게 앞에서 희생되고 잭의 죽음으로 ‘나’는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간다. 이 소설은 전쟁의 상흔이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처절하게 그려낸다.


「모네타」는 자본주의의 명암을 도발적이고도 서늘하게 적시한다. 주류사회로 진입하려는 비주류 동양인의 노력이 불을 찾아 질주하는 불나방처럼 애처롭고 눈물겹다. 돈이라면 자신의 영혼마저 팔 수 있는 작중 인물 선우를 통해 작가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도 그럴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또한 비주류의 한계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류 사회로의 진입에 아직도 강고한 벽이 존재함을 알린다.


「죽음에 이르는 경기」는 「모네타」와 유사하면서도 맥을 달리한다. 관중의 오락과 치부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선수들의 모습은 로마시대의 검투사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제국의 멸망 징후는 도덕적인 타락이고 자본주의의 몰락 징후는 인간을 오락거리로 여겨 생명을 경시할 때가 아닐까. 자본주의는 죽음에 이르는 경기라는 말이 자꾸 입가를 맴돈다.


그 밖에도 6편의 단편이 더 있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이야기들은 이국 땅에서의 고단한 삶을 핏빛 눈물로 선연하게 비춘다. 또한 독백처럼 들리는 이야기 속에는 늘 말했으나 여전히 갈한 작가의 속내를 토하듯 드러낸다.


“이런 한국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중에 몇 십 년을 미국에 와서 산다고 해도 절대 미국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중략)...나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었다. 한국인이기엔 한국에 대해 잘 몰랐고 미국인이 되기엔 너무 한국에 대한 기억이 많았다.” 104~105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삶은 외롭고 고단하다. 떠돌다보니 삶은 뿌리 내리지 못했고 전전하기만 할 뿐이었다. 희구한 삶은 애쓴 만큼 보상해주지 않았고, 남은 것은 흰머리와 갈라지고 굵어진 손마디, 생채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성취만이 인생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삶을 개척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는 용단을 내렸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두었다. 게다가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노고를 자신은 안다. 이제 개인사의 아픔과 질곡에서 벗어나 개개인이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되면 좋겠다. 그 역사는 개인사에만 머물지 않고 이 땅의 지경까지 넓힌다.


큰아버지가 서울에 오셨을 때 이모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그러나 엄마를 닮은 이모가 고인의 지난 삶을 전했고, 자신을 반기는 친척이 있어 긴 시간의 공백을 추억으로 채울 수 있었다. 우리 또한 큰아버지의 지난 시간을 통해 아들을 그리워했던 이모할머니를 기쁘게 추억할 수 있었다. 자신을 일군 사람은 시간을 초극해 아픔마저 아름답게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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