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섬 - 장 지글러가 말하는 유럽의 난민 이야기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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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이나 기아 혹은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탈출하는 사람을 난민이라 한다. 말로만 듣던 난민을 오래 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신학교를 다니며 목동의 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원 위 쪽엔 출입국 관리소가 있었고, 그 거리를 적잖은 외국인들이 오갔다.

어느 날 근처 지하철 역에서 동남아에서 온 듯한 외국인을 만났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한국이 얼마나 야박하고 부당한 곳인지 잘 알고 있던 터라, 마음이 추울 그에게 신앙과 좋은 교제권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 그 무렵 출석했던 교회는 규모도 큰 데다 젊은이들이 많아 마음을 의탁할만한 곳이었다.

그는 M국에서 왔다고 했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독재 정권이 대학교의 문을 닫아버려 몇 년째 대학생이 없다고 했다. 그곳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탈출해 한국으로 왔다며 난민 신청을 했다고 했다. 많고 많은 나라 중 왜 하필 한국을 선택했는지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를 교회의 믿을만한 간사와 연결해 주었고 그 후 간간이 소식을 듣다 연락이 끊겼다.

누나라며 나를 믿고 교회에 왔을 텐데 당시 미혼에 내 인생도 버거웠던 터라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슬픔이 가득한 눈을 하곤 얌전히 앉아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빙그레 웃던 모습을 회억한다. 더 잘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여전히 미안하기만 하다.

몇 년 전 난민과 관련된 책을 읽다 그가 생각 나 검색을 해 보았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그 사이 그는 청년 운동가로 자리 잡았고 우리나라의 유명 출판사에서 그의 이야기를 책에 실었다는 글을 보았다. 그의 비전에 관해 듣긴 했지만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터라, 대견스러웠고 괜스레 뿌듯했다.

그러나 난민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좋았다 해도 난민의 거취가 우리네 삶과 직결되면 미안하게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쪽으로 입장이 바뀔 수밖에 없다. 이중적인 태도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재작년 예멘에서 온 난민이 제주도에 대거 상륙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반대 여론이 거셌고 적잖은 이들이 불안해 했다. 500여 명의 사람들이 난민 신청을 했고 신청자 중 언론인 출신 2명에게 난민 허가가 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더 앞서 10여 년 전 인천의 한 아파트 단지 근처에 난민센터를 짓는다하여 동네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던 적이 있다. 주민들은 아파트 값 하락과 치안 불안을 이유로 반대 시위를 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더불어 살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들이라며 맹비난을 했다. 나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역 주민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니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남의 일이라고 여길 때는 쉬웠고 감성적인 접근도 됐는데 전환된 입장으로 서고 보니 생각만으로도 곤혹스럽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난민을 대거 수용한 후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사와 사진으로 보았다. 난민의 수가 적을 때는 감당할 수 있었지만 2015년 이후 수백만에 이르는 난민의 대거 유입으로 이제 그 문제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그래서 장 지글러의 『인간 섬』을 읽고도 리뷰를 못 올렸다.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같은 저작을 통해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행동해온 사회학자다. 그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기아가 식량 부족 때문이 아닌 분배의 문제임을 알고는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어 그의 책을 몇 권 사서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좀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다. 장 지글러의 견해뿐 아니라 난민들을 관리하는 책임자나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고 싶었다. 난민들은 몰려 오는데 수용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에서까지 난민들이 몰려 온다. 그들이 그리스에 오게 되면 다섯 섬 레스보스, 코스, 레로스, 사모스, 키오스에 있는 난민 캠프로 가야 한다. 난민 캠프가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6,400여명이지만 2019년 11월 현재 35,000명이 넘는다.

난민들의 삶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 가축도 먹기 힘든 상한 음식을 배급받기도 하고, 적은 양의 음식이라도 배급 받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린다.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위생 시설은 꿈도 꿀 수 없다. 저만치 떨어진 공동 화장실을 오가다 성폭행을 당하는 여성들이 부지기수다. 날이 좋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비라도 오면 난민촌은 오물과 악취로 엉망이 된다. 프랑스 유학까지 갔다온 전직 의사도, 변호사도 여기서는 일개 난민에 불과하다. 그들이 생존하려면 생각을 지워야 한다.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은 현재로선 요원해보이니까.

장 지글러는 86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용감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난민들의 상황을 알리며 이 끔찍한 상황을 전복하고 싶어한다. 시민이라면 갖게 된다는 부끄러움의 힘에도 호소하며, 난민들에게 주어진 보편적 망명권이 존중될 것과 핫 스폿이라 불리는 난민캠프를 폐쇄하길 요구한다.

그의 선의와 순도 높은 진심이 잘 전달된다. 그의 마음에 공명하여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가 말한 것처럼 대단히 선량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아파할 수는 있으니까. 그런데 그곳에 사는 사람도 자신들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현실이 있다. 난민이 적을 때는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었고 감당했겠지만, 수십만 수백만 단위로 움직이면 그때는 인도주의적 입장과 온정만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발생 가능한 일과 발생한 일, 각종 제반 상황과 여건에 대한 실제적인 조치와 보호, 지원을 해야 하니까. 입으로 하는 건 누구는 못하나.

그래서 이렇게 짧지 않은 글을 썼음에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당신은 혹 이 책을 보았는가. 현재 이 글을 읽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머지는 당신의 마음과 행동으로 채우시라. 그렇지 않다면 이 글은 결국 미완성으로 끝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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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성프란시스대학 편집위원회 엮음 / 삼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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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스러지고 있다겨울이 멀지 않다는 신호다마음이 이미 추워버린 올 겨울은 나기 쉽지 않을 성싶다없는 이에게 겨울은 혹독하다없는 이 중 진짜 없는 이몸 하나 누일 방 한 칸 없이 한뎃잠을 자야하는 노숙인들은 올 겨울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이들에게 겨울나기는 생명살이다거리에서 잠을 자는 자체가 위험한 환경의 다른 이름이니까이들에게 죽음은 늘 따라다닌다추운 겨울 거리로 내몰리면 천하장사라도 목숨을 지킬 방법이 없다설사 어찌 목숨을 건진다해도 건강이 좋을 수 없다그렇게 이들은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러나 추운 겨울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와 멸시의 눈초리다너와 나는 다르다는 보이지 않는 생각생을 방기했으니 자초한 결과라는 묵음의 아우성 등이 이들을 더 힘들게 한다이들도 안다삶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런 노숙인들을 위해 성프란시스대학에서 2005년부터 인문학 과정을 개설해 자활을 돕고 있다. 1년 과정에 주 3, 2시간씩 문학과 역사철학과 예술사글쓰기 등을 가르친다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는 1기부터 15기까지의 학생들이 쓴 글들을 모으고 선별해 꾸민 책이다.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요즘 나는 눈물이 많아졌다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계속 눈물이 난다글쓰기를 하자니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순간 감정이 격해져서 울컥해진다."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83

 

"나를 본다는 것이 이렇게 아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얼마나 많은 거짓말들로 나를 감싸고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변명들로 나를 정당화 시키고 있었는지 아픈 것만큼 부끄러웠다하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나를 감싸고 있던 거짓말들을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야 하고 변명들 대신 난 나의 모습을 인정하기로 했기에 당당히 고개를 들고 두 눈을 뜨고 있기로 했다그래야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을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거울 앞에서, 173

 

이토록 섬세한 감정 표현과 투명하게 자신을 보려는 노력이 어떻게 이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지 놀라고 만다내 선입견 속의 이들은 지저분하고 냄새를 피우며 알콜중독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나도대체 이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인간의 의식이나 행동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누가 더 잘나고 못나서가 아니지 않나.

 

내처 읽었다기계에 손가락을 잃은 이야기그리운 가족에 대한 이야기믿는 이에게 배신을 당한 이야기노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맞은 이야기뻔뻔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더니 불편해 어쩔줄 모르는 영 수줍은 이야기 등 170여편에 가까운 글들이 한 인간의 서사를 드러내며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인문학이 아니었으면 자신 속에 있는 보석같은 이야기와 성찰의 능력을 어찌 알았을까.

 

"사실 노숙인이 글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느냐는 거다어디 가서 물어봐라노숙인이 인문학 한다고 하면 욕이나 먹지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데 꼴값 한다고 다들 수군거리지 않겠는가나도 인문학을 배우기 전에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니었다인문학을 배운다는 것그 자체만으로도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지금까지의 생활을 완전히 탈바꿈 시켜준다그 자체의 본질을 바꿀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인간에 대한 학문을 배우면서 참된 진리를 배우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깨닫는다남들과 다른 삶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동료들 사이에는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 철학을 배운다, 185

 

인문학을 배우며 이들은 더 이상 노숙인이 아니다그렇게 자신을 규정지으면 안 된다는 자의식이 생기면서 자신을 새롭게 정립하기 시작했다이들은 단지 집이 없을 뿐이고남들보다 가진 것이 적을 뿐이다거리로 내몰렸지만 쪽방 한 칸일망정 돌아갈 집을 구하고 내일을 향한 소박한 꿈을 키우고 있다내 일이 없으면 내일이 없다고 자각하고 있고사소한 것도 자꾸 자신에게 물어보는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의 작은 시작에 함께 하고자 나도 꾹꾹 눌러 책을 읽는다그리고는 조용히 응원해본다. “지금보다 더 영웅적이고 전투적으로 사세요라고. 질투심을 누르고 마지 못해 한 마디 더 덧붙이며. "글 참 좋네요. 저보다 더 잘 쓰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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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아침이고 축하 감사드리고
또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친추도 하고 갑니다~

Hello,Stranger 2021-07-0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알라딘에 글만 올렸지 잘 몰라서 배워가며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그 청년 바보의사 - 개정판
안수현 지음, 이기섭 엮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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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멋진 청년이 세상을 뜬 지. 그토록 선량하고 사랑이 넘쳤던 청년은 왜 그리 일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했을까요? 더 오래 지상에 머물며 알콩달콩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면 안 되었던 걸까요? 그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던 것을 생각해서라도 하나님께서 좀 봐주시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이른 죽음이. 그가 이 땅에 남아 외롭고 힘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위로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청년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지만 데려가시는 것으로 자신의 뜻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사람, 따뜻하고 진실했던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이 그입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는 안수현이 생전 여러 매체에 실었던 글을 엮은 책입니다. 그의 육성이 들어있는 책이지요. 33년을 지상에 머무는 동안 안수현은 예수님의 흔적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난동을 부리는 환자를 껴안고 진정될 때까지 함께 했고, 만취해 실려온 환자를 위해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식판을 들고 지하 1층에서 2층의 응급실까지 갔습니다. 스스로도 지나친 게 아니냐며 갈등했지만 환자를 위해서라면 그런 겸연쩍음 정도는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백혈병 치료를 받고 퇴원한 어린 환자를 위해 선물을 들고 찾아가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환자를 위로하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으니까요. 그런 예를 들라면 책 어디를 펴도 접하실 수 있습니다. 만나는 누구에게도 항상 자신을 내어 주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도 안수현을 가슴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네가 날 위해 시간과 마음을 포기한다면 내가 정말로 기쁘게 그 예배를 받겠다. 하지만 너는 그로 인해 성적이든, 이성 교제든, 사람들과의 관계든 무엇에선가 분명히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래도 내게 그 부분을 주겠니?"
이 질문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손해 보는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 되새겨보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뚝심 있게 하나님 편에 서는 결정을 내리다 보면, 점점 더 그렇게 결정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시기에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손해'를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 한 결정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의 방법으로 손해를 다루시며 역사하시는 손길을 분명히 보았다." 43쪽

안수현의 글을 대하며 눈물이 났습니다. 그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손해를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도 삶에 손해는 옵니다. 물질적으로도 그렇고, 감정적으로도 손상이 올 수 있습니다. 안수현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다 의대생 시절 유급을 당하기도 했으니까요. 당시 가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부모님 뵙기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다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잠시 저를 돌아봅니다. 그의 백만 분의 일만큼도 못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손해가 왔습니다. 얻는 게 없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손해는 안 봐야 되는데 오래도록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게 싫었습니다. 아까워서가 아니라 이런 일을 겪는 게 화가 났습니다. 한 번은 사역할 때 담당 부장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린 적도 있습니다. "권사님, 저는 이제 손해 보는 게 진저리가 나요." 얼마나 봤다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안수현과 저는 얼마나 다른가요.

안수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항상 나누었습니다. 환자와 보호자, 간호사, 식당 아줌마, 선후배, 교회의 지체들, 처음 만나는 사람들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그에게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의 가방 속에는 언제나 선물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신앙 서적이나 찬양 테이프가 있었고 각기 다른 상황에 맞는 선물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안수현은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의사였습니다. 깊은 밤 조용히 와서 기도하고 가는 의사를 부담스러워하는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마음을 다하는 기도를 듣자 그 기도로 힘을 얻고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시간을 직면하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훌륭한 의사는 병을 치료하지만, 위대한 의사는 환자를 치료한다고 합니다. 안수현은 참 의사였습니다.

"하나님, 마른 막대기 같은 제 삶에 불을 붙이사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멸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 제 삶은 주의 것이오니 다 태워주소서. 저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주 예수님처럼 꽉 찬 삶을 원합니다-짐 엘리엇(에콰도르 선교사)
일반 세상이 보기에 이것은 젊은 생애의 허망한 낭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사에 뜻과 계획이 있으시다-엘리자베스 엘리엇(짐 엘리엇의 아내)" 269쪽

2005년 12월 18일 주일 저녁,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안수현이 유행성출혈열로 고대 병원에 실려옵니다. 입대 전 내과전문의로 일했던 모교의 병원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기도했고 거뜬히 털고 일어날 것으로 믿었습니다. 178cm의 건장한 몸을 가진 33살의 청년이 그깟 병에 쓰러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었습니까?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해가 불과 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의 숨이 멎었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의 영정 사진이 장례식장에 걸릴 것을요. 회복을 위해 기도했던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4,000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속속 젊은 의사 안수현의 장례식장을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누구도 몰랐던 그의 사랑과 헌신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그토록 기도했지만 그가 떠났습니다. 우리의 짧은 소견으로는 우리 곁에 오래 머물러 함께 하는 게 좋지 싶은데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그가 여기에 있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그가 사랑했던 하나님을 더 크게 전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떠나자 그의 이야기가 메아리가 되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그의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만들고 더 많은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안수현을 그리며 그가 했던 사랑의 흔적을 자신 속에서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안수현이 됩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주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두 팔을 넓게 벌려 우리를 맞으신다. 나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며 말씀하신다.
"잘했구나,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단 한 명의 청중'으로부터 듣는 그의 사랑의 음성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길 기도한다."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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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미리 보는 의대 신경학 강의
안승철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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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 최재천. 모두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 섰던 과학자들이다. 학문적 성취만으로도 이들은 이미 큰 일을 이뤘지만, 과학과의 친근성을 위해 대중에게 다가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과학이라면 절래절래 고개를 젓는 나도 삼십여 년 전 칼 세이건이 진행한 '코스모스'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얼마나 지대했는가.

이와 같은 노력은 과학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요즘 의학계는 젊은 의사들이 단독으로 혹은 몇몇이 모여 어렵고 딱딱한 의학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방송을 하며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획기적인 방식으로 다가가는 의학자가 있다. 실제 의대에서 강의하는 신경학에 대한 내용을 의대를 희망하는 중고생과 학부모, 재학중인 의대생을 위해 만화로 그린 단국대 의대의 안승철 교수가 바로 그이다.

직접 그렸다지만 처음부터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좋은 만화가를 섭외해 함께 하려 했지만, 전문적인 내용을 그림으로 구현하기가 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똥손이라는 자평에도 불구하고 그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초보이다 보니 속도를 낼 수 없어 하루에 한 페이지만 작업했고, 그런 시간을 265일이나 가진 후 나오게 됐으니 책에 대한 애정은 각별할 터이다. 화자인 뇌 박사의 입을 통해 그는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고 자랑했다.

“ "책상이나 문에 발가락을 찧었을 때 어떻게 하면 덜 아플까요?” 신경학에는 ‘문 조절 이론(Gate control theory)’이라는 학설이 있다. 촉각신경과 통각신경이 공통의 최종 경로(송출신경)를 거치기 때문에 촉각이 통각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아픈 부위를 어루만지고 입으로 호호 불면 통증이 줄어든다.
기억, 언어, 감각 등등, 이 책은 채 2킬로그램이 안 되지만 신비롭기 그지없는 장기, 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만화 컷마다 뇌의 해부도, 신경이 이어진 경로 등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뇌를 이해하고, 그리하여 우리 몸과 정신의 작용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저자가 의도했던 대로 쉽고 재미있는 만화책이다." 출판사 소개 글

요즘 최고로 핫한 분야가 신경학이란다. 인공지능이 4차 산업의 스타로 떠오르면서 신경학도 함께 각광을 받고 있는데 , 오늘날에는 이미 입는 로봇과 뇌파만으로도 로봇팔을 조종하는 단계에까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단다. 그러나 아직도 공학적인 방식이 어떤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이뤄지는지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있고, 여러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신경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란다.

과학의 대중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친해졌던 것처럼, 의학의 대중화를 통해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예전 엔돌핀 박사라는 의사 분과 웃음의 전도사라는 교수를 통해 우리 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삶이 풍성해졌던 것처럼, 저자의 책을 통해 신경학을 전공하겠다는 희망자가 많이 나오길 바란다. 아는 만큼 자신과 이웃을 이해하며 그만큼 더 행복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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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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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득달같이 달려가 관련 정보를 보긴 했지만 더 이상 읽을 순 없었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더 이상 읽지 않은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뒷걸음질쳤지만 이유는 빤 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요즘 자주 접하는 이야기다. 쓸쓸하고도 가난한 죽음, 고독사에 관한 발화였다.

두어 달 전 어떤 프로그램에서 특수청소전문가가 출연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홀로 세상을 떠난 이의 집을 청소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라고 했다. 커다란 눈에는 온갖 것을 담아버린 사람의 슬픔과 안타까움, 눌러놓은 분노와 환멸이 어려있었다. 아무도 없이 홀로 죽은 이의 극한까지 간 외로움과 그들이 혹여 남겼을 얼마의 돈을 놓고 가족이 벌이는 추악함에 자신도 모르게 입은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죽은 자의 집 청소』는 누군가 홀로 죽었을 때 자신의 일이 시작된다는 또 다른 한 특수청소전문가의 단상록이다. 혼자 죽어간 자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그의 일이다. 흔적에는 죽은 이가 남긴 부패의 냄새와 육체의 조각들, 초대받지 않은 생명체도 들어있다. 그가 만나는 수많은 죽음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전하지만 홀로 맞이한 고독한 죽음이라는데는 변함이 없다.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알면 다 빠져나가요. 절대로 그 건물에 사는 누구도 알게 해선 안 됩니다." 22쪽

생전에도 죽은 이들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 자신을 유배한 채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살았다. 떠나고 난 후 누군가에게 보여질 자리를 생각하고는 집 안을 정리하고, 때로는 자신의 죽음에 들어갈 비용마저 계산해야했다. 이들의 죽음은 별 연관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혹시라도 뒤따를지 모를 경제적 부담을 생각하는 가족에 의해 또 한번 버려졌다. 이들은 생전에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죽음의 순간조차도 쓸쓸하기만 했던 사람의 마지막 잔재를 담당해야하는 사람은 무슨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저자 김완은 자신은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지우는 일로 자신의 삶을 살 뿐이고, 그들은 살기 위해 그들 나름의 방식을 선택했으며, 운명을 맞이한 순간까지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라 말한다. 그들의 애처롭고 고독한 죽음의 과정 또한 하나의 삶이었다며 담담히 순응한다.

"이 집을 치우며 지독한 고독을 보았다면 그것은 결국, 내 관념 속의 해묵은 고독을 다시금 바라본 것이다. 이 죽음에서 고통과 절망을 보았다면, 여태껏 손 놓지 못하고 품어온 내 인생의 고통과 절망을 꺼내어 이 지하의 끔찍한 상황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 젊은 나이에 미쳐서 스스로 돌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한 불행한 남자를 보았다면, 마치 인생의 보물인 양 부질없이 간직해 온 내 과거의 불행함을 그 남자에게 그대로 전가하고는, 나는 결백하답시고 시치미 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라보듯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이 지하 방에 관해 알게 된 유일한 진실이다." 101쪽

고독사는 이제 저만치 떨어진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의 우리들이 직면해야 될 문제가 됐다. 예전엔 홀로 사는 노인들이 맞닥뜨려야 할 슬픈 미래이자 현실이었지만 요즘엔 나이나 소득과 상관 없이 일어나는 범시대적 현상이다. 이는 1인 가구의 증가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우리나라의 1인 가구수는 이미 600만을 넘어섰다. 이제 고독사는 외롭고 쓸쓸한 죽음이 아니라 관계망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의 고립사이다.

살아있는 자에게 죽음은 언제나 생경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균등하며 엄정하다. 이 책은 낯설기만한 죽음이 언젠가 내게 올 것을 나직하게 전하며 죽음이라는 화두를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또한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현재가 더없이 소중한 내 삶임을 자각하게 한다. 흔적 없이 사라져간 이들의 고단하고 슬픈 이야기가 생의 덧없음과 비감에 머물지 않고 아픈 숙제가 되기를 조용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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