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 비룡소의 그림동화 217
모리스 샌닥 지음, 김경미 옮김 / 비룡소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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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이라고 해서 반드시 결말이 행복하게 지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화도 현실을 사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니까,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반영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책 만큼은 꼭 행복하게 마무리 되기를 원했다. 그래야 할 것 같다. 만약 불행한 결말을 보게되면 마음이 힘들 것 같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는 그림 책의 대가인 모리스 샌닥의 1981년도 작품이다. 이 책은 나오자 마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칼데곳 아너상을 비롯해 몇 개의 상을 휩쓸었다. 모리스 샌닥은 이 책의 모티브를 1932년에 실제 있었던 '린드버그 유괴사건'에서 따왔다고 한다. 린드버그는 1927년 미국 최초로, 뉴욕 파리간의 무착륙 단독 비행에 성공했던 비행사다. 대서양 횡단 성공으로 그는 일약 영웅이 됐으며, 전세계적으로도 유명인사가 된다. 그러나 5년 뒤, 그의 두 살난 아들이 유괴돼 결국 주검으로 발견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당시 그 사건은 전 국민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어린이 유괴범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할 수 있는 린드버그 법이 제정되는 계기를 만든다.  

 

그런 배경을 알게 된 후 읽게 된 책이라 결론이 궁금했다. 과연 어떻게 결말이 맺어졌을까? 책을 급하게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간 보았던 모리스 샌닥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그림과 같은 고전적 화풍에 풍성한 질감으로 인해, 마치 옆에 실제하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아이들의 표정이 생동감 있고 다양하다. 게다가 샌닥은 자신의 특별한 관심을 반영이라도 하듯 책 안에 다양한 상징과 각각의 그림을 넣어 독자의 흥미를 끌어당긴다.

 

 

 

 

바다 멀리 저 편으로 떠난, 아마 돈을 벌러 간듯한 남편을 기다리는 젊은 엄마에게 어린 두 딸은 부담이었던 듯 싶다. 엄마의 시선은 남편이 떠난 곳을 향해 있고 아이들에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는 엄마의 무관심이라기 보다는 아이들에까지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엄마의 상심이 큰 탓이다. 큰 딸 아이다는 엄마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돌본다. 그러나 아이다도 어린 아이인지라 때로는 동생이 버겁기만 하다.

 

어느날 아이다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고블린이라는 정령이 나타나 동생을 데려간다. 깜짝 놀란 아이다는 어린 동생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고 어린 탓에 길을 잘못든다. 그 때 저 멀리서 아빠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다는 아빠의 조언에 따라 고블린이 있는 곳으로 가고 거기서 어린 동생을 구해온다. 입구로 들어서는 아이다를 엄마가 벤치에 앉아 맞는다. 엄마는 이제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아이다와 어린 동생을 자신의 가시권안에 두고 한결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는 이렇게 끝난다. 책으로라도 어린 아이가 돌아와 참 다행스럽고 기쁘다. 모리스 샌닥은 그렇게 해서라도 이유없이 죽어간 어린 생명을 위로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 책의 출간으로 당시 미국에서는 유괴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책으로 유괴 뿐 아니라 실종된 아이들에 대한 관심까지 불러왔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한다. 자식을 잃고 늘 대문을 바라보는 바짝 시든 엄마의 퀭한 눈을 여전처럼 돌아오게 했으면 싶은 마음에서다. 동화의 환상적이며 기적적인 힘을 이 책에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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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자크 상페의 그림 이야기
장 자크 상뻬 지음, 김호영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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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그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림이 주는 맛은 글이 주는 맛과는 또 달랐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그림을 따라 움직였다. 특히나 펜화는 늘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가느다란 선에 각각의 색을 입은채 흰색의 여백과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는 그 옅디 옅은 소박함은 아름다움 마저 느끼게 했다.

 

오래 전 좀머씨 이야기가 선풍을 일으켰을 때, 장 자끄 상뻬의 그림을 그 책에서 만나게 됐다. 좀머씨의 괴팍스런 성정과 그가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이 그림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글과 그림은 이미 하나가 되었고 그 책 고유의 느낌을 설정하고 있었다. 장 자끄 상뻬의 그림이 빠진 좀머씨를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그 후로 그의 그림이 들어간 책을 하나씩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그의 그림은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림 자체는 단순했지만 그림이 전달하는 느낌은 책에 따라 달랐고, 작중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을 단번에 알 수 있도록 그림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이 가진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오래 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책이었다. 그동안 장 자끄 상뻬의 그림만 보았을 뿐 글을 읽은 적은 없었다. 이 책은 온전히 그의 글과 그림으로만 이뤄진 책이다. 그의 그림은 전세계가 인정했지만 그의 글은 물음표를 붙인 상태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장 자끄 상뻬는 이유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마르슬랭을 주인공으로 소개했다. 마르슬랭은 시도 때도 없이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의 처지를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단지 언제, 어떻게, 왜 얼굴이 빨개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어느 날 마르슬랭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재채기를 달고다니는 르네 라토를 만나게 된다. 두 아이는 보자마자 친구가 되었고, 타인과 함께 있는데도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둘은 장난도 잘 쳤지만 아무 말도 안한채 오래 있어도 좋은 사이가 됐다. 둘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그랬는데 마르슬랭이 외갓집에 잠시 갔다 온 동안 르네네가 이사를 가고 말았다. 르네는 마르슬랭의 부모님에게 주소를 적어주었지만 부모님은 주소가 적힌 종이를 결국 찾아주지 못했다. 르네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고 아이는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세월이 흘렀다. 마르슬랭은 여전히 빨간 얼굴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쁘게 산다. 그 날도 마르슬랭은 여러 건 잡혀 있는 약속 때문에 마음이 급했고 초조했다. 정류장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어디선가 재채기를 하는 남자의 기침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버스를 탄 후 마르슬랭은 그 남자를 쳐다보고 소리를 지르고 만다. 그의 어릴적 친구 르네 라토였다. 르네 라토는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마르슬랭과 르네는 그 후로 자주 만났다. 그때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만나서 놀았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한 그 때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편히 있을 수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도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둘은 친구였기에.

 

 

 

 

이 책에서 나는 두 가지를 주목했고, 그 때문에 새로운 가치를 접하게 되었다. 장 자끄 상뻬는 작가적 힘으로 아이들의 병을 고치게 할 수 있음에도 고쳐주지 않았다. 책에 요정을 등장시켜 놓고는 끝내 기적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켰던 병들을 고쳐주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비록 부조리하고 부당하지만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기 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나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두 아이들은 남들보다 한층 더 힘든 삶을 살았겠지만 자신들의 삶을 잘 이끌어왔다. 고통은 있지만 고통의 늪에 빠지지 않고도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두 아이를 헤어지게 하고는 그 우정이 계속되는 꿈같은 일을 그리지 않았다. 아이들의 우정이 깊었지만 아이들은 쉽게 잊는다는 사실 또한 무시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는 긴 세월이 흐른 뒤 두 친구를 다시 만나게 하고 그제서야 우정을 영속시켜 준다. 

 

장 자끄 상뻬는 조그마한 그림이 전하는 보이지 않는 언어와 많지 않은 글을 통해 일상적인 삶을 보여준다. 그 일상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평생을 따라다니며 소년들에게 곤란함을 주었다. 그러나 그 어려움으로 인해 다른 사람은 맛보지 못한 타인과의 깊은 교류와 우정이라는 풍성한 선물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삶은 의외로 공평한가 보다. 따뜻한 마음과 인간을 향한 끝없는 관심을 가진 자의 눈에만 포착되는 삶의 이면을, 우리는 장 자크 상뻬의 그림과 글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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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세계사 - 대량학살이 문명사회에 남긴 상처
조지프 커민스 지음, 제효영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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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겨울, 아이리스란 드라마가 한창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였다. 당시 주연배우였던 이병헌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임무를 수행한 후 버림을 받는 정보요원 역을 하고 있었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부상까지 당한 몸으로 숨을 곳을 찾아 헤매이던 그의 모습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짠하게 했. 이병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맡은 역을 연기했고, 자신이 겪은 기막힌 일들과 비통함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드라마의 결말은 이병헌이 피격되는 것으로 마무리 됐는데, 자신의 서러운 죽음까지 처절하게 연기해야 했던 배우를 보면서 내심 걱정이 됐다. 저 정도의 몰입이라면 분명히 배우도 내상을 입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사람도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 몇 배의 슬픔을 감내하면서 연기하는 배우야 말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을 읽고난 후 배우들이 떠올랐다. 작품이 끝나도 배우들은 한동안 자신이 맡은 역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배우도 아니었고 몰입도 그들만 못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 마음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책을 읽은지 여러 날이 지나도록 글을 쓸 수 없었다. 마음이 정리되어야 하는데 정리는 커녕 충격적인 사실들을 소화해 내는데에도 내가 가진 에너지를 다 밀어넣어야 했다. 인간이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막연히 아는 것과 사진을 통해 실상을 접하는 것은 여파가 달랐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저지른 만행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잔혹할 수 있는지, 도를 넘어선 역사적 현장을 본 것에 대해 나는 후회했다.

 

'잔혹한 세계사'는 지난 12월, 근 한달간을 손에 잡고 있던 책이다. 내용 자체는 관심을 끌었지만 계속해서 읽기가 심적으로 힘들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인류의 역사가 인간의 피와 살, 그리고 뼈로 세워졌다고 언급했다. 이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한 문구라 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잔혹한 책이었다. 세계 최초의 대량 학살인 기원전 146년 로마의 카르타고 멸망을 필두로, 1995년 보스니아의 대량 살육까지 왜 사람을 죽였으며 그 결과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20여개에 가까운 역사적 사례에서 저자는 몇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해 간단히 정리해 주었다.

 

1. 전 세계 역사 속의 거대 단일 국가, 혹은 정치적인 대규모 운동에서, 그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대량 학살의 힘을 빌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대량 학살에는 선전 활동이라는 공통적 요소가 있다. 피해자 측과 학살을 자행한 양측 선전원들은 집단학살이 더 나은 정치적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며 사실을 왜곡한다.

2.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역겨운 현상이 발견된다.

3. 여성을 끔찍한 방식으로 취급한다. 학살이 시작되면 여성에게는 강간을 비롯한 사지절단과 같은 가장 잔인한 방식이 적용되고 피해자들은 극도의 공포, 경악, 뿌리 깊은 분노를 느낀다.

 

모든 학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지만, 특히 20세기 들어 인종청소와 같은 대량학살은 어느 만큼 피를 흘려야 민족간의 증오가 사라질 수 있을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질문이 됐다. 1915년부터 3년간에 걸쳐 일어났던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100만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이 터키인들에게 살해당한 20세기 최초의 대량살육이다. 그러나 이 끝간데 없는 슬픔도 20세기 말에이르면 이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총칼을 휘두르는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1995년 보스니아 동부 스레브레니차에서 보스니아 이슬람교도가 세르비아군과 비정규군에 의해 멸종대상이 되어 무방비상태에서 살해를 당했다. 당시 유럽연합과 나토, 미국은 세르비아계 기독교인들이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 수천 명을 살해하는 것을 알고도 방관했다.

 

이뿐 아니다.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르완다에서 있었던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 사건은 단 석 달 만에 투치족 80만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유혈사태를 불러온다. 이는 르완다 투치족 전체 인구의 75퍼센트에 해당되는 수였다. 투치족에 대한 후투적의 반감이 대통령의 암살사건으로 촉발돼 대량학살로 이어진 르완다의 비극은, '나치의 유대인 말살 이후 실제 목격된 사건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체계적인 대량학살'이란 말로도 묘사된 바 있을 정도로 잔혹했다. 식사를 하고 사람을 죽이고, 또 식사를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마치 일상처럼 100일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이보다 더 끔찍한 것은 르완다 사태를 예견하고도 이를 막기위한 조치를 르완다와 밀접했던 강대국 중 어느 나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르완다 대학살

 

또한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대량살육은 더 어마어마하다. 크메르 루주가 그 땅을 피로 물들이고 있을 때 그의 손 아래서 무려 150만에서 2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는 국가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된다. 이 대량학살로 전 국토는 묘지화 되었고 현재 캄보디아 국민의 반 이상이 21세 이하다. 대량학살로 인해 한 세대 전체의 뿌리가 뽑힌 것이다.

 

캄보디아 대량살육

 

소련에 의한 대학살도 있다. 1940년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폴란드의 가장 우수한 관리들 2만 2000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된 카틴 숲 대학살 사건은 한 나라의 최고 지도부를 빼앗긴 대참사였다. 소련은 이 학살을 부인하거나 나치의 소행으로 돌렸고, 당시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었던 미국은 진실이 알려졌을때의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다 판단하고는 묻어버렸다. 이 일은 근 50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비밀리에 붙여졌었다. 그 밖에도 천안문 사건과 중국 난징 대량살육,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등이 사진과 사료와 함께 생존자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카틴 숲 대학살

 

그렇다면 이제 대량학살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과거의 아픔으로만 남을 뿐인가? 불행히도 이 책은 그렇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 결말을 예견한다.

 

'폭력은 사회의 표면 그 바로 아래에서 늘 끓어오르는 요소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의식과 의지, 법, 사회적 관습에 의해 억제되고 있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폭력은 인권조약과 신사도, 전통적인 교전수칙에 의거해 어느 정도까지 제지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번씩 통제불능 상태로 분출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잔혹행위가 촉발된다.'

 

저자는 대량학살이 계속 진행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을 인간 본성에서 찾고 있다. 가슴 서늘한 말이다. 저자는 인간안에 얼마나 거대한 시한폭탄이 있는지, 그리고 도화선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냉정하고 무서운 질문은 맨 마지막 표지에 적혀있다. 저자는 이 말을 하고 싶어 이 책을 썼으리라 짐작된다. 나 또한 이 글을 읽고 며칠을 고민했다. '그것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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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 할머니
우리 오를레브 글, 오라 에이탄 그림, 이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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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다름은 구별일 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구별이 차별이 될 때가 많다. 예전 일터에서 나는 별로 인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당시 방송국에서 구성작가로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의 장애만으로도 심적 어려움과 불편이 말할 수 없는데 사람들의 편견까지 더하여 삼중고를 겪고 있는 장애인들의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일을 하면서 장애인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때로는 가족에게도 숨겨지겨나 잊혀진 사람으로 살아야하는 장애인들의 슬픈 사연도 접하게 됐다.

 

특히 장애아를 둔 엄마의 비처럼 흐르는 눈물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울고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는지 지치고 꺼칠한 얼굴의 엄마와 아무것도 모른채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내 가슴까지도 먹먹하게 했다. 이 땅에서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간접적이긴 했지만 아프게 느꼈다.

 

 

이 책 또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작은 마을에 한 할머니가 찾아온다. 거처할 곳이 없는 할머니는 자신의 시린 발을 위해 슬리퍼를 뜬다. 그런데 슬리퍼를 신으려니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돌위다. 돌 위에서는 슬리퍼가 아무 소용없다. 이제 할머니는 서둘러 카페트를 뜬다. 카페트를 깔려니 주변이 온통 풀 투성이다. 할머니는 이제 마루를 뜨고 이어서 침대와 소파를 뜬다. 그리고는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뜬다. 이제 할머니가 살기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또다시 뜨개질을 한다. 이번 뜨개질은 전과는 좀 다르다. 할머니는 정성을 다해 뜨개질을 한다.

 

드디어 완성됐다. 남녀 어린 아이다. 할머니는 사랑스런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뜬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구비됐음에도 할머니는 계속해서 뜨개질을 한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계획인가 보다. 책과 책가방을 뜬다. 이제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로 간다. 학교는 털실로 뜬 아이들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난다. 할머니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아이들을 받아주지 않는다. 할머니는 자동차를 떠서 아이들을 태운 후 동사무소로 간다. 그러나 동사무소도 반응은 똑같다. 화가 난 할머니는 이제 헬리콥터를 떠 장관들이 있는 정부로 간다. 장관들 또한 반응이 같다.

 

 

아무도 아이들을 받아주지 않은채 할머니가 사는 마을에 대한 관심만 무성하다. 털실로 뜬 집과 아이들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오자 동장은 특별회의를 열어 할머니네 집을 울타리로 둘러 보호하기로 한다. 이 보호를 할머니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할머니는 몹시 화가 나 자신이 떴던 모든 것을 다 풀어버린다. 심지어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들까지 풀어버리고는 그 곳을 떠난다. 이제 할머니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단지 아직도 그 어딘가에서 뜨개질을 뜨고 있을거라며 이 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이 책의 작가 우리 오를레브는 책의 스토리를 무척 자연스럽고 리드감있게 풀어나갔다. 초반부 한 할머니의 등장과 계속되는 뜨개질은 동화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행동만으로도 동화책은 많은 말을 할 수 있기에 그와 연계되는 주제가 드러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는 반쯤 지나서야 자신의 의중을 드러냈다. 작가가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앞 부분에 있던 재미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입학으로 인한 갈등속에 있었다.

 

 

작가는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들은 우리와 다른, 털실로 짠 것 같은 열등한 존재로 느껴지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무거운 질문이었다. 그 물음은 한 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이어진다. 그러나 받아들여지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고, 사람들은 손톱만큼의 미안함도 보이지 않은채 보자마자 거절하거나 얼굴부터 찌푸렸다. 싫었던 것이다. 자신들같이 훌륭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저급한 존재가 포함되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함께 살 수는 없으되 구경꺼리로는 반기는 이중적 양태를 꺼리낌없이 보이고, 작가는 이를 통해 사람들의 부조리함과 모순을 고발하고 있었다.

 

털실로 짠 아이들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넣어준 사랑스런 마음을 아무도 보지 않았다. 단지 아이들의 겉모습만 볼 뿐이었다.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까봐 지레 겁을 먹고 아이들을 내치고 있었다. 작가는 실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었다. 그 현실은 쓰라리고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꽤 넓다는 것을 냉정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말미에, 어딘가에서 여전히 뜨개질하는 할머니를 그리며 자신의 바람도 넌지시 그렸다. 현실의 냉정함과 함께 할 수 있는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며 두 개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앞서 장애아를 둔 엄마의 눈물겨운 현실을 말했다. 그 엄마들은 하나같이 자식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 자식들에게 닥칠 미래가 어떨지를 너무도 잘 알기에 그런 애닲은 소망을 그 엄마들은 간절한 바람으로 가지고 있었다. 엄마들의 젖은 눈과 할머니의 뜨개질이 자꾸 겹쳐진다. 할머니가 그 어디에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정착했으면 싶다. 그럴 때 이 곳의 장애아를 둔 엄마들의 멍든 가슴이 조금은 풀어지지 않을까 싶다.

 

사진출처: cafe.daum.net/biyounsam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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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여우 발자국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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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중 최고의 반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결말을 짓는 경우다. 이럴 때의 느낌은 경악에 가깝다. 가장 쇼킹한 결말은 지금껏 이야기를 이끌어왔던 주인공이 모든 사태의 조종자라거나, 자신도 모든 키를 쥐고 있었던 사람인지를 몰랐다거나, 이미 죽은 사람일 경우다. 이런 마무리는 깜쪽같이 속았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신선함을 주고 끝난 후에도 여운이 길다.

 

 

조선희의 글을 처음으로 읽는다. 만약 일관된 감정으로 좀 더 집중해서 읽었다면 지금보다 더 깊게 남을 것 같았다. 시간을 넘나들며 중층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와 화자가 교체되면서 이어지는 구성 덕에 흥미를 유지한 채 읽을 수 있었다. 30년이라는 시간 차를 두고 과거에서 현실로, 그 현실이 미래가 되고, 그 미래가 이미 과거였던 이야기는 환타지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환타지 소설이 가진 남다른 매력을 맛본 기분이다.  

 

'거기, 여우 발자국'은 음산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는 운무 가득한 한 공간을 비추고 있다.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헐값으로 나온 한 건물. 그 곳에 대한 소문은 흉흉하기 그지 없다. 거기서 귀신들의 발자국을 봤다나, 뭐라나. 그런 소문을 들었음에도 태주는 뭔지 모를 끌림에 덜컥 건물을 사버리고 만다. 태주는 건물 매입건으로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는 소정을 알게 되고 둘은 연인이 된다. 어느 날, 자신이 태주의 동생이라며 필란드 혼혈아인 노라가 나타난다. 얼마 뒤 같이 일해보고 싶다며 윤원이라는 29살의 남자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동호라는 사람이 나타나 '거기 구멍 눈 뒤에' 카페를 사람 냄새 피우는 곳으로 만든다.

 

         

 

또다른 화자 우필은 시계 바늘을 30년 전으로 돌린 후 등장한다. 우필은 이름이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상당히 예쁜 여자로 자신의 목소리에 저주가 붙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수학 여행에서 친한 친구가 사라지게 되자 그 상처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한 때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이었던 재곤이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가지고 가자 우필은 사람을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된다. 홀로 살고 있지만 작은 살림도 꾸려가려면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 일을 찾으러 가는 시간은 1979년이다. 우필은 그 곳에서 도서 녹음 작업에 참여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날 저녁 우필의 집에 밤 손님이 찾아든다. 그들은 4명으로 우필에게 훔쳐간 여우 발자국을 내놓으라 협박한다. 그러나 우필이 얼떨결에 지른 소리에 놀라 단숨에 사라지고 만다. 그 후 우필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단체의 대표인 박현의에게 책을 받아 도서 녹음 작업을 한다. 현의는 녹음할 분량외에는 책을 읽지 못하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우필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의 작가와 자신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비롯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든다.

 

한편 태주는 노라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노라의 그림자를 찍은 사진에 수달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는 말이었다. 태주는 그 날 밤 노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방에 들어간다. 좀 전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는 그 곳에 노라의 기척이 있고, 노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며 사라진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방엔 수달의 발자국만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몽환적이라는 말이 요즘 자주 쓰이지만 이렇게 잘 맞는 책은 오랜만인 것 같다. 군데 군데 숨어있는 복선과 암시들, 그리고 다중적 장치야말로 이 책의 재미를 증대시켜 준다. 특히 서구적 이미지를 차용하지 않은 채 우리의 옛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환타지 소설을 완성한 것은 칭찬이 아깝지 않을 듯하다. 환상과 실재,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있으면서도 흐름이 일관된 것은 조선희 소설이 가진 내재적 힘이 아닐까 싶다. 현재 환타지 소설에서 그녀의 독주는 눈부시다. 그녀의 다음 책을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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