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자크 상페의 그림 이야기
장 자크 상뻬 지음, 김호영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부터 그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림이 주는 맛은 글이 주는 맛과는 또 달랐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그림을 따라 움직였다. 특히나 펜화는 늘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가느다란 선에 각각의 색을 입은채 흰색의 여백과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는 그 옅디 옅은 소박함은 아름다움 마저 느끼게 했다.

 

오래 전 좀머씨 이야기가 선풍을 일으켰을 때, 장 자끄 상뻬의 그림을 그 책에서 만나게 됐다. 좀머씨의 괴팍스런 성정과 그가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이 그림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글과 그림은 이미 하나가 되었고 그 책 고유의 느낌을 설정하고 있었다. 장 자끄 상뻬의 그림이 빠진 좀머씨를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그 후로 그의 그림이 들어간 책을 하나씩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그의 그림은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림 자체는 단순했지만 그림이 전달하는 느낌은 책에 따라 달랐고, 작중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을 단번에 알 수 있도록 그림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이 가진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오래 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책이었다. 그동안 장 자끄 상뻬의 그림만 보았을 뿐 글을 읽은 적은 없었다. 이 책은 온전히 그의 글과 그림으로만 이뤄진 책이다. 그의 그림은 전세계가 인정했지만 그의 글은 물음표를 붙인 상태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장 자끄 상뻬는 이유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마르슬랭을 주인공으로 소개했다. 마르슬랭은 시도 때도 없이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의 처지를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단지 언제, 어떻게, 왜 얼굴이 빨개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어느 날 마르슬랭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재채기를 달고다니는 르네 라토를 만나게 된다. 두 아이는 보자마자 친구가 되었고, 타인과 함께 있는데도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둘은 장난도 잘 쳤지만 아무 말도 안한채 오래 있어도 좋은 사이가 됐다. 둘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그랬는데 마르슬랭이 외갓집에 잠시 갔다 온 동안 르네네가 이사를 가고 말았다. 르네는 마르슬랭의 부모님에게 주소를 적어주었지만 부모님은 주소가 적힌 종이를 결국 찾아주지 못했다. 르네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고 아이는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세월이 흘렀다. 마르슬랭은 여전히 빨간 얼굴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쁘게 산다. 그 날도 마르슬랭은 여러 건 잡혀 있는 약속 때문에 마음이 급했고 초조했다. 정류장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어디선가 재채기를 하는 남자의 기침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버스를 탄 후 마르슬랭은 그 남자를 쳐다보고 소리를 지르고 만다. 그의 어릴적 친구 르네 라토였다. 르네 라토는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마르슬랭과 르네는 그 후로 자주 만났다. 그때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만나서 놀았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한 그 때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편히 있을 수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도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둘은 친구였기에.

 

 

 

 

이 책에서 나는 두 가지를 주목했고, 그 때문에 새로운 가치를 접하게 되었다. 장 자끄 상뻬는 작가적 힘으로 아이들의 병을 고치게 할 수 있음에도 고쳐주지 않았다. 책에 요정을 등장시켜 놓고는 끝내 기적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켰던 병들을 고쳐주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비록 부조리하고 부당하지만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기 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나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두 아이들은 남들보다 한층 더 힘든 삶을 살았겠지만 자신들의 삶을 잘 이끌어왔다. 고통은 있지만 고통의 늪에 빠지지 않고도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두 아이를 헤어지게 하고는 그 우정이 계속되는 꿈같은 일을 그리지 않았다. 아이들의 우정이 깊었지만 아이들은 쉽게 잊는다는 사실 또한 무시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는 긴 세월이 흐른 뒤 두 친구를 다시 만나게 하고 그제서야 우정을 영속시켜 준다. 

 

장 자끄 상뻬는 조그마한 그림이 전하는 보이지 않는 언어와 많지 않은 글을 통해 일상적인 삶을 보여준다. 그 일상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평생을 따라다니며 소년들에게 곤란함을 주었다. 그러나 그 어려움으로 인해 다른 사람은 맛보지 못한 타인과의 깊은 교류와 우정이라는 풍성한 선물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삶은 의외로 공평한가 보다. 따뜻한 마음과 인간을 향한 끝없는 관심을 가진 자의 눈에만 포착되는 삶의 이면을, 우리는 장 자크 상뻬의 그림과 글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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