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여우 발자국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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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중 최고의 반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결말을 짓는 경우다. 이럴 때의 느낌은 경악에 가깝다. 가장 쇼킹한 결말은 지금껏 이야기를 이끌어왔던 주인공이 모든 사태의 조종자라거나, 자신도 모든 키를 쥐고 있었던 사람인지를 몰랐다거나, 이미 죽은 사람일 경우다. 이런 마무리는 깜쪽같이 속았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신선함을 주고 끝난 후에도 여운이 길다.

 

 

조선희의 글을 처음으로 읽는다. 만약 일관된 감정으로 좀 더 집중해서 읽었다면 지금보다 더 깊게 남을 것 같았다. 시간을 넘나들며 중층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와 화자가 교체되면서 이어지는 구성 덕에 흥미를 유지한 채 읽을 수 있었다. 30년이라는 시간 차를 두고 과거에서 현실로, 그 현실이 미래가 되고, 그 미래가 이미 과거였던 이야기는 환타지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환타지 소설이 가진 남다른 매력을 맛본 기분이다.  

 

'거기, 여우 발자국'은 음산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는 운무 가득한 한 공간을 비추고 있다.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헐값으로 나온 한 건물. 그 곳에 대한 소문은 흉흉하기 그지 없다. 거기서 귀신들의 발자국을 봤다나, 뭐라나. 그런 소문을 들었음에도 태주는 뭔지 모를 끌림에 덜컥 건물을 사버리고 만다. 태주는 건물 매입건으로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는 소정을 알게 되고 둘은 연인이 된다. 어느 날, 자신이 태주의 동생이라며 필란드 혼혈아인 노라가 나타난다. 얼마 뒤 같이 일해보고 싶다며 윤원이라는 29살의 남자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동호라는 사람이 나타나 '거기 구멍 눈 뒤에' 카페를 사람 냄새 피우는 곳으로 만든다.

 

         

 

또다른 화자 우필은 시계 바늘을 30년 전으로 돌린 후 등장한다. 우필은 이름이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상당히 예쁜 여자로 자신의 목소리에 저주가 붙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수학 여행에서 친한 친구가 사라지게 되자 그 상처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한 때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이었던 재곤이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가지고 가자 우필은 사람을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된다. 홀로 살고 있지만 작은 살림도 꾸려가려면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 일을 찾으러 가는 시간은 1979년이다. 우필은 그 곳에서 도서 녹음 작업에 참여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날 저녁 우필의 집에 밤 손님이 찾아든다. 그들은 4명으로 우필에게 훔쳐간 여우 발자국을 내놓으라 협박한다. 그러나 우필이 얼떨결에 지른 소리에 놀라 단숨에 사라지고 만다. 그 후 우필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단체의 대표인 박현의에게 책을 받아 도서 녹음 작업을 한다. 현의는 녹음할 분량외에는 책을 읽지 못하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우필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의 작가와 자신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비롯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든다.

 

한편 태주는 노라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노라의 그림자를 찍은 사진에 수달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는 말이었다. 태주는 그 날 밤 노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방에 들어간다. 좀 전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는 그 곳에 노라의 기척이 있고, 노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며 사라진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방엔 수달의 발자국만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몽환적이라는 말이 요즘 자주 쓰이지만 이렇게 잘 맞는 책은 오랜만인 것 같다. 군데 군데 숨어있는 복선과 암시들, 그리고 다중적 장치야말로 이 책의 재미를 증대시켜 준다. 특히 서구적 이미지를 차용하지 않은 채 우리의 옛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환타지 소설을 완성한 것은 칭찬이 아깝지 않을 듯하다. 환상과 실재,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있으면서도 흐름이 일관된 것은 조선희 소설이 가진 내재적 힘이 아닐까 싶다. 현재 환타지 소설에서 그녀의 독주는 눈부시다. 그녀의 다음 책을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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