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 할머니
우리 오를레브 글, 오라 에이탄 그림, 이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남과 다름은 구별일 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구별이 차별이 될 때가 많다. 예전 일터에서 나는 별로 인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당시 방송국에서 구성작가로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의 장애만으로도 심적 어려움과 불편이 말할 수 없는데 사람들의 편견까지 더하여 삼중고를 겪고 있는 장애인들의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일을 하면서 장애인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때로는 가족에게도 숨겨지겨나 잊혀진 사람으로 살아야하는 장애인들의 슬픈 사연도 접하게 됐다.

 

특히 장애아를 둔 엄마의 비처럼 흐르는 눈물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울고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는지 지치고 꺼칠한 얼굴의 엄마와 아무것도 모른채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내 가슴까지도 먹먹하게 했다. 이 땅에서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간접적이긴 했지만 아프게 느꼈다.

 

 

이 책 또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작은 마을에 한 할머니가 찾아온다. 거처할 곳이 없는 할머니는 자신의 시린 발을 위해 슬리퍼를 뜬다. 그런데 슬리퍼를 신으려니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돌위다. 돌 위에서는 슬리퍼가 아무 소용없다. 이제 할머니는 서둘러 카페트를 뜬다. 카페트를 깔려니 주변이 온통 풀 투성이다. 할머니는 이제 마루를 뜨고 이어서 침대와 소파를 뜬다. 그리고는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뜬다. 이제 할머니가 살기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또다시 뜨개질을 한다. 이번 뜨개질은 전과는 좀 다르다. 할머니는 정성을 다해 뜨개질을 한다.

 

드디어 완성됐다. 남녀 어린 아이다. 할머니는 사랑스런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뜬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구비됐음에도 할머니는 계속해서 뜨개질을 한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계획인가 보다. 책과 책가방을 뜬다. 이제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로 간다. 학교는 털실로 뜬 아이들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난다. 할머니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아이들을 받아주지 않는다. 할머니는 자동차를 떠서 아이들을 태운 후 동사무소로 간다. 그러나 동사무소도 반응은 똑같다. 화가 난 할머니는 이제 헬리콥터를 떠 장관들이 있는 정부로 간다. 장관들 또한 반응이 같다.

 

 

아무도 아이들을 받아주지 않은채 할머니가 사는 마을에 대한 관심만 무성하다. 털실로 뜬 집과 아이들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오자 동장은 특별회의를 열어 할머니네 집을 울타리로 둘러 보호하기로 한다. 이 보호를 할머니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할머니는 몹시 화가 나 자신이 떴던 모든 것을 다 풀어버린다. 심지어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들까지 풀어버리고는 그 곳을 떠난다. 이제 할머니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단지 아직도 그 어딘가에서 뜨개질을 뜨고 있을거라며 이 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이 책의 작가 우리 오를레브는 책의 스토리를 무척 자연스럽고 리드감있게 풀어나갔다. 초반부 한 할머니의 등장과 계속되는 뜨개질은 동화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행동만으로도 동화책은 많은 말을 할 수 있기에 그와 연계되는 주제가 드러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는 반쯤 지나서야 자신의 의중을 드러냈다. 작가가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앞 부분에 있던 재미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입학으로 인한 갈등속에 있었다.

 

 

작가는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들은 우리와 다른, 털실로 짠 것 같은 열등한 존재로 느껴지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무거운 질문이었다. 그 물음은 한 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이어진다. 그러나 받아들여지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고, 사람들은 손톱만큼의 미안함도 보이지 않은채 보자마자 거절하거나 얼굴부터 찌푸렸다. 싫었던 것이다. 자신들같이 훌륭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저급한 존재가 포함되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함께 살 수는 없으되 구경꺼리로는 반기는 이중적 양태를 꺼리낌없이 보이고, 작가는 이를 통해 사람들의 부조리함과 모순을 고발하고 있었다.

 

털실로 짠 아이들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넣어준 사랑스런 마음을 아무도 보지 않았다. 단지 아이들의 겉모습만 볼 뿐이었다.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까봐 지레 겁을 먹고 아이들을 내치고 있었다. 작가는 실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었다. 그 현실은 쓰라리고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꽤 넓다는 것을 냉정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말미에, 어딘가에서 여전히 뜨개질하는 할머니를 그리며 자신의 바람도 넌지시 그렸다. 현실의 냉정함과 함께 할 수 있는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며 두 개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앞서 장애아를 둔 엄마의 눈물겨운 현실을 말했다. 그 엄마들은 하나같이 자식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 자식들에게 닥칠 미래가 어떨지를 너무도 잘 알기에 그런 애닲은 소망을 그 엄마들은 간절한 바람으로 가지고 있었다. 엄마들의 젖은 눈과 할머니의 뜨개질이 자꾸 겹쳐진다. 할머니가 그 어디에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정착했으면 싶다. 그럴 때 이 곳의 장애아를 둔 엄마들의 멍든 가슴이 조금은 풀어지지 않을까 싶다.

 

사진출처: cafe.daum.net/biyounsam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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