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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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시인 마리 로랑생은 자신의 시 '잊혀진 여인'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잊혀진 여인이라 규정했다. 잊혀지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 그녀는 죽음보다 더하다고 표현했다. 존재의 사멸 만큼 세상에서 아픈 것이 있을까 싶은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천년의 왕국'은 네덜란드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생을 마감한 한 이방인의 처연한 삶을 그린 소설이다. 역사에 단 몇 줄로만 기억되었던 남자, 박연. 네덜란드 이름으로는 벨테브레. 선장이란 직함을 얻자마자 그의 배는 난파되었고, 36명의 선원들 가운데 요리사 에보켄과 어린 선원 데니슨만 살아남았다. 17세기 초엽, 설명할 길 없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그는 지금 제주도에 고립무원의 처지로 있다. 차라리 무인도였다면 오히려 희망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휘몰아치는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 그는 속수무책이다. 고국을 떠나올 때 그의 아내의 배는 불러있었다.

 

희안하게 생긴 자들이 제주도에 있다는 소식이 왕에게 전달되었다. 왕은 그들을 보기 원했고 목에 쇠사슬을 매단채 그들은 짐승처럼 끌려간다. 왕은 그들을 애처롭게 보지만 고국으로의 귀환은 불가함을 전한다. 이제 살아서는 길이 없다. 고국으로 돌아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데니슨은 마음의 병을 얻어 입을 열지 않고, 에보켄은 모든 스트레스를 입으로 풀거나 오입질로 풀려고 작정한 듯하다.

 

이 곳 조선의 왕은 타타르를 향해 과도하리 만큼 촉각을 세우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타타르에게 당한 굴욕을 잊을 수도 없거니와 자신 또한 타타르에 볼모로 잡혀있었기에 왕의 증오심은 대단하다. 왕의 마음속엔 자나깨나 타타르를 징벌하려는 생각 뿐이다. 그런 왕의 호의 속에 도성에 거하고 있지만 이 곳은 자신들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이 곳 사람이 아니니까.

 

타타르에서 사신이 올 때 마다 그들은 숨어 있어야 했다. 드러나봐야 긁어 부스럼밖에 되지 않았다. 하루는 데니슨이 보이지 않는다. 데니슨은 귀환하는 타타르의 사신에게 뛰어들어가 자신의 처지를 고하고 이 일로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졌다. 왕은 이들을 감싸고 싶지만 마땅한 명분이 없다. 결국 데니슨에게 죽을 때까지 검투를 하라는 형벌이 내려지고 데니슨의 싸움을 보던 벨테브레는 그만 기절하고 만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데니슨은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제 벨테브레와 에보켄만 남았다.

 

작가 김경욱은 여기서 세 부류의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현실을 부정하다 못해 결국 생까지 부정하고만 데니슨적 양상과 무한 긍정의 힘으로 이방에서의 삶을 씩씩하게 살아내는 에보켄적 양상, 그리고 귀향을 원하지만 이 곳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아프게 받아들이는 화자인 나의 방식이다. 그들은 비록 셋에 불과했지만 각기 다른 삶의 유형을 대변하고 있다. 김경욱은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며 그 어떤 것을 주창하고 있지 않다. 단지 그는 잊혀진 자의 고통을 소개할 뿐이다.

 

조선 사람이 아무리 잘해준다 한들 이 곳은 타국이었고, 그들은 이교도였다. 그들의 정감있는 언행이 자신들의 마음을 움직인다해도 잠간이었다. 누구도 그들의 빈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 에보켄은 원래부터 이곳 사람이었던듯 사람들도 잘 사귀고 말도 잘한다. 그의 넉살과 적응력은 탁월하기만하다. 게다가 '자줏빛 구름'이라 불리는 영매와 살림까지 차린다. 홀로 남은 벨테브레는 대포 만드는 일에 전념한다. 그는 이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타타르가 전쟁을 일으켰다. 무서운 속도로 도성을 진입한 그들은 국왕이 피신한 강화도를 포위한다. 이 전쟁에 그들이 주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의 싸움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며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하는지 그들은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국왕의 싸움에서 에보켄이 죽는다. 바다로 나오기 전 그는 대륙을 휩쓸고 다녔던 유명한 마녀 사냥꾼이었다.

 

그의 마녀 사냥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쌍동이 여동생도 마녀 사냥에 희생됐다고 알려준다. 그는 고아였다. 그런데 후일 쌍동이 여동생을 마녀로 규정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얘기를 들은 즉시 그는 바다로 나온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배를 탔다. 타인을 위해 죽음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이제 그의 고된 삶이 비로소 멈추게 된다. 멀고 먼 이방 땅에서 맞는 죽음은 그에게는 안식이었다.

 

지금 나는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 벨테브레가 박연이 되어 제주도에서 네덜란드인 하멜을 만나는 장면을 읽고 있다. 이제 그는 파란 눈의 조선인이 되었고 왕의 사자로 그 곳에 있다. 26년의 시차를 두고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하멜을 대하고 있다. 둘 다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벨테브레, 그토록 원했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뱃 속에 있던 아이도, 햇살처럼 눈부셨던 아내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하멜은 달랐다.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고 고국으로 돌아가 이 곳에서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벨테브레는 이곳에서도, 그곳에서도 단 몇 줄의 글로만 남았다. 잊혀진 자의 아픔을 그처럼 생생하게 삶으로 살아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픔이 꼭 그만의 아픔만은 아니었다. 몸을 가진 모든 자의 아픔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도 결국 잊혀지고 말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조차도 말이다. 잊혀짐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김경욱은 박연을 통해 보여주었고, 우리는 그를 통해 나를 보았다. 우리는 모두 잊혀진다. 그래서 세상은 슬픈 자들만 남아있다.

 

사진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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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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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가는 좋은 작품을 만든다

 

TV 프로그램을 볼 시간이 거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유일하게 본 드라마가 '대조영'이었다. 발해를 건국하기 위한 대조영의 고난의 시간들이 화면에 펼쳐졌다. 한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역경이 닥칠 수 있는지, 참으로 힘든 시간들이 초반부를 채웠다. 노예로 팔려가서 당하는 온갖 수모와 목만 내놓은 채 구덩이에 묻혀서 보내는 암흑의 시간들은 드라마라는 걸 알면서도 입 안의 침을 마르게 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도 그 드라마를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 드라마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칼의 향연으로만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장 속에서 피어나는 깊은 인간애로 전환해 드라마의 격을 한단계 높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래서 그 드라마는 단순한 주말극이 될 수 없었다. 서로를 죽여야하는 적장들이지만, 마음 속에는 이미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가슴을 울리고도 남을 만큼 짙게 그려냈다. 살상이 초미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도 그들은 상대의 실수나 곤경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 틈을 타지도 않았다. 비록 상대의 아픔에 동참할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 그 아픔을 지켜봐 주었다. 어떤 작품을 봐도 등장인물만 보이던 내게 그 드라마는 뒤에 있는 작가를 보게 했다. 그 웅장한 서사는 분명 그의 인간애에서 비롯됐을 것이고, 나는 작가가 가진 세계관이 결국은 작품의 질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부담스러웠던 책......그러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또한 그랬다. 그러나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 책은 내게 부담스런 책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에 읽다 만 경험이 있었고, 읽다 만 책에 대해 나는 차라리 안 읽느니만 못하다는 판단을 암묵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끝까지 읽고 나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만약 안 읽었다면 나는 얼마나 위대한 작품을 놓치고 말았을 것인가.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안 읽었을지도 모른다.

 

노인은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었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지 않으면 굶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노인의 삶이었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가족도 없으며 오로지 아내를 사랑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런 노인에게 고기잡이는 생계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자그마치 84일이나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 그 좌절을 언어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좌절을 상쇄하고도 남을 보물이 노인에게는 있다. 노인 산티아고의 유일한 친구이자 말동무인 소년은 남인데도 피붙이와 같은 신뢰를 준다. 그 소년이 있었기에 노인은 살 수 있었다. 지금은 소년의 부모 때문에 고기잡이를 함께 할 수 없어도 노인과 소년은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흔들림이 없다. 언제나 위로를 주는 아이. 그 아이의 신뢰는 한결 같다.

 

노인에게도 다시 행운이 찾아올까. 몇 번의 행운을 거머쥐었던 젊은 날도 있었지만,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삶의 터전이 거기 있기에 향할 뿐이다. 바다는 정겹게 노인을 반기지만 화나면 손도 못 쓸 정도로 무서운 곳이다. 바다로 향하는 노인의 등은 넓고도 좁다. 이제 더이상은 미룰 수 없는 운명의 손길을 그는 감지한다.

 

노인과 5.5 미터의 그 녀석, 그리고 소년

 

느낌이 온다. 뭔가 거세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운 힘이 느껴진다. 엄청난 무게, 꿈쩍도 않는 고기의 영리함. 지금껏 이런 고기는 만난 적이 없다. 지치지 않는 녀석과는 달리 노인은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 벌써 몸 여러 군데서 힘들다는 징후를 보인다. 노인의 배보다도 더 큰 녀석. 녀석과의 사투는 보통 각오 없이는 안 될 것 같다.

 

마침내 아름다운 녀석이 배를 보인다. 두려움을 모르던 고상했던 녀석. 고기의 질과 맛으로 볼때 최고임이 분명하다. 녀석을 죽여야 했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같은 마음으로 노인은 사랑했고 그 녀석을 상어떼로부터 지키고 싶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노인은 이미 모든 힘을 소진했고, 피냄새를 맡은 상어떼는 무지막지하게 살점을 뜯어간다. 이제 남은 것은 대가리와 뼈대만 남은 몸체와 꼬리뿐이다.

집에 돌아와 잠자고 있는 노인을 소년이 지켜본다. 소년은 노인이 죽었을까봐 숨부터 확인하고는 손을 보며 울고, 커피를 가지러 가는 동안도 울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운다. 간신히 어린애티를 벗어난 소년이 노인을 지키고 있다. 지금껏 노인을 지탱케 했던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어린 소년의 사랑이었던 듯 싶다. 소년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인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젊은 시절 꾸었던 사자가 나오는 단 꿈을.

 

그럼에도 내일의 해는 떠오른다

 

노인과 바다는 노인과 큰 고기와의 사투를 다루지만 그 얘기가 는 아니다. 왜냐하면 헤밍웨이는 사투 이면에 가려진 생의 본질을 그려내길 원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시작은 고기잡이로부터지만 싸움이 진행되면서 나타난 생의 진면목은 원초적이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혈혈단신의 노인에게 가혹하리만큼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한 후, 선물처럼 주어졌던 엄청난 고기를, 차라리 잡지 않으니만 못하게 만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노인에게 주어진 선물이 겨우 형태만 남은 쓸모 없는 고기덩어리였다 해도, 이는 온전한 고기를 가져온 것 보다 더한 선물이 된다. 고기를 팔면 돈은 손에 쥐어지지만 희망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85일 만에 잡은 고기 외에 노인이 앞으로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노인은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훌훌 털고 바다로 나갈 것이고, 그런 노인에게 희망은 생존의 필수 조건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기는 형태만 남긴채 조각 났어야 했다.

 

헤밍웨이가 그리고자 한 것은 불쌍한 노인에게 주어진 축복같은 행운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변함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어린 소년이 보여주는 호의에 기대는 초라한 삶일지라도 그 작고 큰 사랑에 기대어 사는 것이 생을 빛나게 한다는 것을 헤밍웨이는 알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아름답고 멋진 고기의 숨통을 끊을 때도 노인은 한치의 가책도 받지 않은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생의 초라함과 그와 상반된 강인한 의지를 삶의 원형으로 그려냈기에 노인과 바다는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나 또한 이 책을 소설이 아닌 대하 서사라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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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행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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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갖지 않은 채 읽은 책이다. 표지가 전하는 독특한 분위기에 끌려 집어 들었다. 또한 '우행록'이란 제목도 범상치 않았다. 책의 표지는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반전, 정교한 구성으로 전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걸작 미스터리'라고. 읽기 시작했다.

 

스토리는 단순했다. 도쿄 시내의 한 주택가에서 일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견 사원으로 자리한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얼굴에 고급스런 분위기를 지닌 사랑스런 부인, 그리고 부모를 닮아 예쁘고 깜직한 남매가 어떤 원한 때문인지 죽임을 당했다. 일년이 지나도록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일반 장르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을 같은 장르의 책과 구분짓게 하는 것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한 축은 수시로 화자가 바뀌며 죽은 부부에 대한 자신들의 느낌을 술회하고, 다른 한 축은 여동생이 오빠에게 전하는 편지거나 독백같은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보인다.

 

전자는 죽은 부부와의 만남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인터뷰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각으로 죽은 부부와의 짧거나 길었던 만남을 상기한다. 사람들의 증언이나 추억담이 늘어갈수록 완벽하리만큼 근사해 보였던 죽은 자들의 삶에 爲裝이란 단어가 끼어든다. 수면위로 부상하는 죽은 부부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의 외양과 반비례해지면서 비열하다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한편 오빠에게 건내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차마 듣기 힘들 만큼 고통스럽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학대를 받고 자랐는지에 대한 자각조차 못할 정도로 부모에게 소외되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무관심과 폭력에 노출된 그녀는 삶에 대한 조소만이 남아 있고, 그녀에게 의지가 되는 보호자이자 가족은 오빠 밖에 없다. 그녀의 계속되는 이야기는 점점 커지면서 어느 한쪽을 향한다.

 

무관할 것만 같은 두 축은 톱니바퀴처럼 서서히 아귀를 맞추어 간다. 소리없이 맞추어졌던 이야기는 언제 그렇게 좁혀졌는지 이제 완벽에 가깝게 모습을 갖추어 간다. 앞과 뒤, 겉과 안이 겹쳐지면서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하나의 모양이 나타날 것 같다.

 

작가 누쿠이 도쿠로는 게이오대라는 귀족학교를 빗대어 일본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첨예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 안에서 보이는 인간군상의 모습과 외부인의 유입을 불허하는 귀족학교 특유의 폐쇄성은 상상 이상이다. 결국 이 부정적 동류의식이 비극적 사건을 초래한 요인이 됐음을 비추며, 부조리한 인생사를 조소하듯 모사함으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망가져버린 가정이 배태한 암울한 미래를 보는 것이 내겐 가장 섬뜩한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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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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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定義)묻는 질문을 받으면 갑자기 머리가 띵해진다. 함축된 질문의 묵직함 때문이다. 그에 대한 답을 달 준비가 되었다면 나는 이미 관련 책을 읽었을 것이고, 준비가 안됐다면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맞다. 만약 답을 달 수준이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은 내게 그런 의미를 갖는 책이었다.

 

나는 무언가로 살지 않았다. 그냥 살았다. 그래서 30대 초반 까지 나는 늘 허기를 느꼈다. 내 배는 너무 고팠다. 굳이 만 시간의 법칙을 들먹이지 않아도, 최소한 어떤 분야를 기웃이라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이 글로 밥을 먹었다. 그 사실을 나는 늘 부끄러워했다. 그나마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괜찮은 경력이었지만 가장 부끄러운 경력이기도 했다. 당시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녹화 시간을 두 시간 앞두고, 그 직전까지 글을 쓰느라 거반 죽었다가 글만 넘기고나면 다시 살아나는 나를 혐오했다. 그 생명력이 내겐 견딜 수 없을 만큼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참 달라지지 않았다. 늘 제 자리였다.

 

그 후 나름대로 꾸준히 책을 읽었다. 나름이라는 기준은 얼마나 모호하고 어리석은가. 그런 지지부진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실날같이 쌓이는 것들이 있었다. 오로지 시간 때문이었다. 먼지를 뭉쳤더니 먼지도 힘이 되었다. 그 먼지같은 녀석들의 힘으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근 10년을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몇 몇을 제외하고는 소설가들이 많이 낯설었다. 김애란의 소설을 작년에 읽어보았다. 그녀의 글이 내겐 편치 않았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두 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어떤 구질구질한 정서가 싫었던 것 같다. 교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보다 나은 것이 어느 하나라도 있다고 구질하다라는 말을 감히 붙일 수 있겠는가. 리뷰어의 대단한 권세다. 기가 막혀 웃고 만다.

 

생각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좋았다. 소설가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고, 그들의 고충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과대 평가한다는 느낌을 주는 작가도 있었고, 자신을 감옥 속에 가둔 채 스스로에게 구형하는 작가도 있었다. 문학 안에서의 삶을 쿨하게 즐기는 작가도 있었고, 공부하듯이 파는 작가도 있었다. 다양성의 매력을 나는 글 안에서 즐겼다.

 

특히 나 같은 사람을 만나는 기쁨까지 덤으로 누렸다. 그 분이 알면 불같이 화를 낼지 아니면 기가 막혀 껄껄 웃을지 모르겠다. 열 일곱 분의 소설가 중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분들이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김종광, 심윤경, 윤성희는 그들의 조심스런 사유의 행태가 마음에 들었고, 전경린과 한창훈은 이름 석자만 알던 차여서 더 반가운 만남이 되었다. 지금껏 내게 함정임은 김소진의 아내였는데 이번에 누구의 아내가 아닌 소설가로 보이지 않는 대면을 하였다. 윤영수, 서하진, 이혜경은 같은 느낌과 다른 정서로 다가왔다. 나이들어도 그들만이 가지는 아우라가 멋졌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만남은 김경욱과 김훈과의 만남이었다. 김경욱의 글은 마치 한 편의 평론을 읽는 느낌이었다. 작가와 주인공과의 거리, 문학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 문학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잘 녹아져있었다. 권영민이 왜 그의 글을 맨 앞에 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에 대한 전체 주제를 통괄하는 멋진 글이었다. 다른 글이 각론이라면 김경욱의 글은 총론이었다.

 

또한 김훈은 그만의 사유를 보여주었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문제인 것 같은데, 인칭의 문제를 화두로 자신의 소설론을 풀어냈다. 느낌은 많이 달랐지만 고종석이 떠올랐다. 그가 가진 유럽의 정서를 사랑했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김훈은 너무 무거워서 부담스러웠다. 너무 좋은 물건은 때론 안팔리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그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좋은 책이 아니라는 말도 아니다. 김훈이란 사람이 그렇다는 거다. 그의 고뇌가 전달됐다. 무겁게 태어난 사람은 무겁게 사는 법이다. 그를 위해 조용히 외쳐본다. '브라보'

 

세월이 흘렀다. 20대에 원치도 않는 직업으로 피를 흘리던 내 청춘도 사라지고 없다. 언젠가부터 흰머리가 나더니 이제는 볼도 쳐지고 주름은 온 얼굴을 덮고 있다. 글로 밥벌이를 시작했던 시간으로부터 도망치고자 싸워왔던 시간들이었다. 감히 작가는 꿈도 꾸지 않았고 나는 문학소녀 출신도 아니다. 왜 내 시작이 글로부터 됐어야 했는지에 대해 끝없는 자문을 했었다. 나만의 觀이 서지 않는다면 절대 글이란 걸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에 내 평생 다시는 글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이 자리에 있다. 그리고 지금 힘들어도 행복하다.

 

사진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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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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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의 PD인 남자와 구성 작가인 여자와의 사랑을 차분하게 전하는 소설이다. 절제의 틀 안에서 조율된 감정 변화와 심리묘사는 정제되어 담담하게 그려져있다. 섬세하고 고운 글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아서 여운이 더 긴 것 같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을 10년 넘게 간직한 남자의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게다가 그 상대는 가장 친한 친구의 여자 친구다. 지켜보기만 했을 남자의 식지 않는 마음이 참 애뜻하다. 이런 사랑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데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블로그 친구들이 한결같이 좋았다고 했던 책이라 읽게 되었다. 리뷰를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을 일이 과연 있었을까 싶다. 나도 모르게 내 기억속에 들어와 있었던 작가, 이도우. 책이 다 끝날 때까지 그는 내게 생각할 것도 없이 남자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용암같이 뜨겁고 얼음처럼 차가운 사랑을 이렇게 조용하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맨 뒤에 쓰여져 있는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여자였음을 알게 된다. 작가도 혹시 이런 타입의 사람일까? 쓸데 없는 궁금증이 인다.

 

이 책은 방송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구성작가여서 누구보다 이쪽 동네의 일을 잘 알고 있기에 편안하게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이름은 이건. 여자의 이름은 공진솔. 이들과 함께 이건의 친구로 등장하는 선우와 애리. 그리고 주변부의 인물들.

 

이건과 공진솔은 프로그램 개편 때문에 만나게 된 사이다. 물론 같은 방송국안에 있었으니까 오가며 보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진솔은 '노래 실은 꽃마차'의 구성작가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지만 글에 관한한 존재감은 확실하다. 따라서 PD 교체가 큰 관건은 아니다. 단지 신경이 쓰일 뿐이다. 게다가 시인 출신 PD니 앞으로 얼마나 피곤할지 답이 보이는 상황이다. 그런 진솔과는 달리 이건은 진솔과 대화가 될 것 같아 기대하고 있다. 학생처럼 고무줄로 머리를 동여매고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그녀가 은근히 마음에 든다. 자기 할말도 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순진한 구석도 꽤 있는 듯한 그녀. 둘의 만남에 내 마음이 설레이고 만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가 너무도 편안하다. 그러나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남들은 아는데 그들은 모른다. 그래서 이건은 바보다. 그런 이건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는 자신을 고통 가운데 밀어넣는 진솔 또한 바보다. 그러니까 둘은 사랑을 믿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런 바보들의 행진이 저릿하게 다가오는 건 사랑에 대한 그들의 질량 때문이다. 사랑을 향한 그들의 자존심은 질량에 대해 한치의 양보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굳이 돌고 돌아야 했고 생채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다고 이 책에 아픔만 있는 건 아니다. 알콩달콩 밀당도, 손발 오그라드는 애정의 행각도 간간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 아프고 예쁜 거다. 확인에 확인을 거친 그들의 사랑은 돌아던 것이 결국은 잘 됐던 것임을 증명해 준다. 그들의 아픔이 고통의 바늘이 되어 자신을 찌를수록 사랑의 향기는 짙어져갔다. 그 짙은 사랑의 향기는 제법 긴 시간을 두고 오늘 내게도 전해진다. 소박하고 산뜻한 아카시아향으로.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아카시아향으로 남고 말았다.

 

                      사진 출처: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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