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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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가는 좋은 작품을 만든다

 

TV 프로그램을 볼 시간이 거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유일하게 본 드라마가 '대조영'이었다. 발해를 건국하기 위한 대조영의 고난의 시간들이 화면에 펼쳐졌다. 한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역경이 닥칠 수 있는지, 참으로 힘든 시간들이 초반부를 채웠다. 노예로 팔려가서 당하는 온갖 수모와 목만 내놓은 채 구덩이에 묻혀서 보내는 암흑의 시간들은 드라마라는 걸 알면서도 입 안의 침을 마르게 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도 그 드라마를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 드라마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칼의 향연으로만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장 속에서 피어나는 깊은 인간애로 전환해 드라마의 격을 한단계 높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래서 그 드라마는 단순한 주말극이 될 수 없었다. 서로를 죽여야하는 적장들이지만, 마음 속에는 이미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가슴을 울리고도 남을 만큼 짙게 그려냈다. 살상이 초미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도 그들은 상대의 실수나 곤경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 틈을 타지도 않았다. 비록 상대의 아픔에 동참할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 그 아픔을 지켜봐 주었다. 어떤 작품을 봐도 등장인물만 보이던 내게 그 드라마는 뒤에 있는 작가를 보게 했다. 그 웅장한 서사는 분명 그의 인간애에서 비롯됐을 것이고, 나는 작가가 가진 세계관이 결국은 작품의 질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부담스러웠던 책......그러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또한 그랬다. 그러나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 책은 내게 부담스런 책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에 읽다 만 경험이 있었고, 읽다 만 책에 대해 나는 차라리 안 읽느니만 못하다는 판단을 암묵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끝까지 읽고 나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만약 안 읽었다면 나는 얼마나 위대한 작품을 놓치고 말았을 것인가.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안 읽었을지도 모른다.

 

노인은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었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지 않으면 굶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노인의 삶이었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가족도 없으며 오로지 아내를 사랑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런 노인에게 고기잡이는 생계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자그마치 84일이나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 그 좌절을 언어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좌절을 상쇄하고도 남을 보물이 노인에게는 있다. 노인 산티아고의 유일한 친구이자 말동무인 소년은 남인데도 피붙이와 같은 신뢰를 준다. 그 소년이 있었기에 노인은 살 수 있었다. 지금은 소년의 부모 때문에 고기잡이를 함께 할 수 없어도 노인과 소년은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흔들림이 없다. 언제나 위로를 주는 아이. 그 아이의 신뢰는 한결 같다.

 

노인에게도 다시 행운이 찾아올까. 몇 번의 행운을 거머쥐었던 젊은 날도 있었지만,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삶의 터전이 거기 있기에 향할 뿐이다. 바다는 정겹게 노인을 반기지만 화나면 손도 못 쓸 정도로 무서운 곳이다. 바다로 향하는 노인의 등은 넓고도 좁다. 이제 더이상은 미룰 수 없는 운명의 손길을 그는 감지한다.

 

노인과 5.5 미터의 그 녀석, 그리고 소년

 

느낌이 온다. 뭔가 거세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운 힘이 느껴진다. 엄청난 무게, 꿈쩍도 않는 고기의 영리함. 지금껏 이런 고기는 만난 적이 없다. 지치지 않는 녀석과는 달리 노인은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 벌써 몸 여러 군데서 힘들다는 징후를 보인다. 노인의 배보다도 더 큰 녀석. 녀석과의 사투는 보통 각오 없이는 안 될 것 같다.

 

마침내 아름다운 녀석이 배를 보인다. 두려움을 모르던 고상했던 녀석. 고기의 질과 맛으로 볼때 최고임이 분명하다. 녀석을 죽여야 했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같은 마음으로 노인은 사랑했고 그 녀석을 상어떼로부터 지키고 싶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노인은 이미 모든 힘을 소진했고, 피냄새를 맡은 상어떼는 무지막지하게 살점을 뜯어간다. 이제 남은 것은 대가리와 뼈대만 남은 몸체와 꼬리뿐이다.

집에 돌아와 잠자고 있는 노인을 소년이 지켜본다. 소년은 노인이 죽었을까봐 숨부터 확인하고는 손을 보며 울고, 커피를 가지러 가는 동안도 울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운다. 간신히 어린애티를 벗어난 소년이 노인을 지키고 있다. 지금껏 노인을 지탱케 했던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어린 소년의 사랑이었던 듯 싶다. 소년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인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젊은 시절 꾸었던 사자가 나오는 단 꿈을.

 

그럼에도 내일의 해는 떠오른다

 

노인과 바다는 노인과 큰 고기와의 사투를 다루지만 그 얘기가 는 아니다. 왜냐하면 헤밍웨이는 사투 이면에 가려진 생의 본질을 그려내길 원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시작은 고기잡이로부터지만 싸움이 진행되면서 나타난 생의 진면목은 원초적이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혈혈단신의 노인에게 가혹하리만큼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한 후, 선물처럼 주어졌던 엄청난 고기를, 차라리 잡지 않으니만 못하게 만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노인에게 주어진 선물이 겨우 형태만 남은 쓸모 없는 고기덩어리였다 해도, 이는 온전한 고기를 가져온 것 보다 더한 선물이 된다. 고기를 팔면 돈은 손에 쥐어지지만 희망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85일 만에 잡은 고기 외에 노인이 앞으로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노인은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훌훌 털고 바다로 나갈 것이고, 그런 노인에게 희망은 생존의 필수 조건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기는 형태만 남긴채 조각 났어야 했다.

 

헤밍웨이가 그리고자 한 것은 불쌍한 노인에게 주어진 축복같은 행운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변함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어린 소년이 보여주는 호의에 기대는 초라한 삶일지라도 그 작고 큰 사랑에 기대어 사는 것이 생을 빛나게 한다는 것을 헤밍웨이는 알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아름답고 멋진 고기의 숨통을 끊을 때도 노인은 한치의 가책도 받지 않은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생의 초라함과 그와 상반된 강인한 의지를 삶의 원형으로 그려냈기에 노인과 바다는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나 또한 이 책을 소설이 아닌 대하 서사라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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