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행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갖지 않은 채 읽은 책이다. 표지가 전하는 독특한 분위기에 끌려 집어 들었다. 또한 '우행록'이란 제목도 범상치 않았다. 책의 표지는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반전, 정교한 구성으로 전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걸작 미스터리'라고. 읽기 시작했다.

 

스토리는 단순했다. 도쿄 시내의 한 주택가에서 일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견 사원으로 자리한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얼굴에 고급스런 분위기를 지닌 사랑스런 부인, 그리고 부모를 닮아 예쁘고 깜직한 남매가 어떤 원한 때문인지 죽임을 당했다. 일년이 지나도록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일반 장르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을 같은 장르의 책과 구분짓게 하는 것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한 축은 수시로 화자가 바뀌며 죽은 부부에 대한 자신들의 느낌을 술회하고, 다른 한 축은 여동생이 오빠에게 전하는 편지거나 독백같은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보인다.

 

전자는 죽은 부부와의 만남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인터뷰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각으로 죽은 부부와의 짧거나 길었던 만남을 상기한다. 사람들의 증언이나 추억담이 늘어갈수록 완벽하리만큼 근사해 보였던 죽은 자들의 삶에 爲裝이란 단어가 끼어든다. 수면위로 부상하는 죽은 부부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의 외양과 반비례해지면서 비열하다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한편 오빠에게 건내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차마 듣기 힘들 만큼 고통스럽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학대를 받고 자랐는지에 대한 자각조차 못할 정도로 부모에게 소외되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무관심과 폭력에 노출된 그녀는 삶에 대한 조소만이 남아 있고, 그녀에게 의지가 되는 보호자이자 가족은 오빠 밖에 없다. 그녀의 계속되는 이야기는 점점 커지면서 어느 한쪽을 향한다.

 

무관할 것만 같은 두 축은 톱니바퀴처럼 서서히 아귀를 맞추어 간다. 소리없이 맞추어졌던 이야기는 언제 그렇게 좁혀졌는지 이제 완벽에 가깝게 모습을 갖추어 간다. 앞과 뒤, 겉과 안이 겹쳐지면서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하나의 모양이 나타날 것 같다.

 

작가 누쿠이 도쿠로는 게이오대라는 귀족학교를 빗대어 일본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첨예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 안에서 보이는 인간군상의 모습과 외부인의 유입을 불허하는 귀족학교 특유의 폐쇄성은 상상 이상이다. 결국 이 부정적 동류의식이 비극적 사건을 초래한 요인이 됐음을 비추며, 부조리한 인생사를 조소하듯 모사함으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망가져버린 가정이 배태한 암울한 미래를 보는 것이 내겐 가장 섬뜩한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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