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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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열고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사람은 별처럼 빛난다.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올 땐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온다. 과거의 아픔과 오늘의 영욕, 미래의 불안까지 한 존재의 전부가 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남의 수취인은 자신을 던지는 용기를 내야한다. 사람이 사랑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기심이라는 고약한 습벽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반길 때만큼 아름다울 때가 있을까. 친척 중 손님이 오면 반가운 얼굴로 살갑게 맞이하는 고모가 있었다. 언제나 활짝 웃으며 반겼는데, 고모가 말을 할 때는 사투리마저 감미로워 공기방울이 뽀글뽀글 올라 오는 것 같고 비타민 C를 깨물어 먹는 느낌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만났을 때 고모는 여전히 멋쟁이었지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사람을 반기던 사랑스런 얼굴은 사라지고 마지못해 웃는듯한 시들은 표정의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토록 예뻤던 웃음은 어디로 간 걸까. 그때 알았다. 다른 사람을 반기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반기는 것이었음을.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으며 사람을 살게 하는 힘에 대한 생각을 계속 했다. 『밝은 밤』은 증조모에서 외할머니, 엄마와 나로 이어지는 4대 100년의 이야기다. 여인들의 삶은 격랑 위를 떠다니는 배처럼 늘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세상이 아무리 날뛰어도 남편이 바르면 가정은 평안한데 여인들의 남편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무관심했다. 가까이에서 보듬어주기는 커녕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깨버리며 여인들을 춥게 했다. 이들의 서사 위에 이웃인 새비와 새비의 남편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무척 서글펐으리라.

새비는 백정의 딸로 태어나 사람다운 대접도 받지 못하고 살았던 증조모 삼천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새비는 증조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고, 증조모와 새비의 우애는 험한 세파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어 세상으로 그들을 추동했다.

증조모뿐 아니라 이들에게는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외할머니 영옥에게는 피난지에서 신세를 진 명숙 할머니가, 서술자인 나의 엄마 미선에게는 명희 언니가, 나 지연에게는 지우가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던가. 『밝은 밤』은 ‘여적여’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57쪽)이라는 전언을 보란듯이 뒤집는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받아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힘이며, 생명을 배태했던 여자이기에 더 풍성하고 역동적인 존재로 살 수 있음을 선연히 보여준다.

읽는 동안 안 리즈 그로베티의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이 겹쳐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도 우정을 지킨 두 남자를 그린 이 책은, 무참한 역사속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음을 그려냈다. 막다른 골목 같은 상황에서 파리 목숨보다 낫지 않은 처지에 있는 인간이 우정과 신뢰를 지키려할 때 얼마나 위엄있는 존재가 되는지를 역설했다.

생존을 위해 등을 돌리는 것쯤은 예사인 시대에 유대인 친구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독일인 친구와, 친구에게 피해를 줄까 우려해 아이만 부탁하고 종적을 감춘 유대인 친구는 마치 증조모와 새비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고통의 시간을 우애로 견디며 헤쳐온 그녀들의 이야기는 또다른 삼천과 새비, 영옥과 미선, 지연에게 이어져 오늘도 들려진다. 초라하고 내세울 것 없지만 웅숭깊고, 시간마저도 이길 수 없었던 서로를 향한 우애는 더욱더 강고해져 안타까웠던 삶의 정황을 전복해 이미 충분한 것으로 전환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감싸안으며 나직하게 전하는 그녀들의 목소리에는 태고로부터 이어진 생래적인 힘이 담겨있다. 그 소리는 나직하고 안온하며 오늘도 힘차다.

저 달이 너를 비춰 줄거야. 같이 가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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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Stranger 2021-09-0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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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7
오쿠다 히데오 지음, 정숙경 옮김 / 북스토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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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돈나』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이다. 한여름 더위를 웃으며 날리는 데는 오쿠다 히데오의 책이 제격인데, 어찌 하다 보니 시기를 놓쳤다. 올여름 심장 쫄깃하게 만드는 스릴러물도 읽지 않았고, 복날이라고 딱히 보양식도 먹지 않았으니 깔깔 대며 웃을 수 있는 이 책으로 피날레를 장식할 수밖에.

 

『마돈나』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다루는 소설이다. 이렇게 쓰고 반란이라 읽으련다. 다섯 편의 주인공은 각기 다른데 직급은 한결같이 과장이다. 평사원과 간부급 사이에 낀 중간관리자를 통해 사회의 모순을 짚어보려는 심산이지 싶다.

 

첫 편은 표제작인 「마돈나」다. 주인공은 42세의 영업3과장인 오기노 하루히코다. 하루히코는 결혼 15년 차로 변변한 연애도 못해보고 직장 동료인 노미코와 사내 결혼을 했다. 사랑조차 못해본 자신의 처지가 딱해서인지 아니면 사랑에 대한 한풀이인지 부하 여직원을 자신도 모르게 좋아한다. 지금껏 3번이나 상상 연애를 했다. 물론 그 연애는 늘 적당한 때에 깨졌다.

 

어느날 센다이 출신의 4년 차인 구라타 도모미가 자신의 부서로 오게 된다. 본인의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서는 제발 자신의 이상형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상형이 오고야 말았다. 그때부터 철딱서니 없는 상상 연애가 속도를 내며 진행된다. 그뿐인가. 눈치 없는 부하 직원과 라이벌도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하 직원과 하루히코의 암투는 극에 달하고 마침내 육탄전까지 벌어진다. 다음날 아침 둘은 엉망인 얼굴로 회사에 온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셨는지 그녀의 진짜 미소를 보게 되는 일이 생긴다. 훤칠한 키에 하얀 치아가 멋진 싱그러운 젊은 사원의 등장을 통해. 하루히코는 자신에게 부인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씁쓸해 한다. 소심한 중년의 일탈이 재미있다.

 

「댄스」는 45세의 영업 4과장인 다나카 요시오가 주인공이다. 요시오는 현재 고2 아들과 대립각을 이루고 있다. 아들은 대학도 가지 않고 댄서가 되겠다며 엄마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한다. 세상이 어떤 곳인데, 저런 철없는 소리를 하다니. 요시오는 그 생각이 날 때마다 기가 차고 화가 치민다.

 

집안 일만 이러면 견딜만한데 직장은 한 술 더 뜬다. 직장은 직장대로 그를 구석으로 몰고 집안에서는 아내까지 가세해 아들 편을 든다. 그에겐 설 자리가 없다. 조직과 가정 어디에서도 쉴 곳이 없는 40대 남자의 애환에 가슴이 짠해진다. 한데 웃긴 건 또 뭘까.

 

「총무는 마누라」는 출세 코스를 달리고 있는 40세의 온조 히로시가 주인공이다. 간부가 되려면 현장에서 빠져 내근하는 것이 근무하는 회사의 관례다. 회사의 룰을 따라 히로시는 서무계 과장으로 간다. 가보니 서무계만이 아니라 총무부까지 엉망진창이다.

 

능력 제일주의자인 히로시는 내부의 문제를 규칙에 따라 처리하려 한다. 그러자 부서에서 난리가 났다. 부하부터 시작해 전임 과장, 직속 부장 등 사내 연결된 온갖 사람들이 줄줄이 그를 만나러 온다. 결국 백기를 들고 마는 히로시. 부정을 알고도 묵인하는 조직의 구태의연함과 암묵적 관행이 은근 소름 돋게 한다.

 

「보스」는 여상사를 모시게 된 44세의 다지마 시게노리의 이야기다. 자신이 차기 부장이 될 줄 확신하고 미리 축하까지 받았건만 조직은 중도 채용자인 하마나 요코를 담당 부장으로 보낸다. 신임 부장은 빈틈 없고 합리적인 상사로 사내 여직원들의 우상이다.

 

그녀는 엄마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한 치의 모자람 없이 맡겨진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낸다. 이른 출근과 정시 퇴근, 접대문화의 전향은 시게노리의 재밋거리를 다 빼앗아간다. 시게노리는 호시탐탐 상사의 헛점을 노리지만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결국 원치는 않지만 그도 그녀를 자신의 존경할만한 상사로 받아들이게 된다. 일본 조직 문화의 낙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우리는 어떤지, 일본보다 더하지는 않은지 궁금해진다.

 

「파티오」는 토지개발회사의 과장인 45세의 스츠키 노부히사가 주인공이다. 야심 찬 프로젝트임에도 계획대로 되지 않아 골칫거리로 전락하게 된 주상복합단지가 이야기의 주된 공간이다. 미래형 도시라며 그렇게 광고를 했건만 주말이 되면 이곳은 유령의 도시로 변한다.

 

그때 멋진 노신사를 보게 된다. 파티오의 한적한 공간에 앉아 책을 읽는 노신사. 그를 볼 때면 자꾸 시골에 홀로 계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는 세상사에 흥미를 잃은 듯하고 누나가 수시로 방문해 돌보고 있다.

 

아버지를 못 본지도 벌써 6개월이나 됐다. 당일 다녀올 수 있는 거리지만 자꾸 미루고 있다. 아버지와는 변변한 대화조차 나눠 본 적이 없다. 어느날 노신사에게 용기를 내 말을 건내지만 그를 경계하고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노부히사는 타인과 거리를 두지 않은 자신의 경솔함을 질책한다. 그러다 며칠 뒤 근방에서 노신사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통해 아버지와의 거리도 좁히게 된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짐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 남에게 부담이 되는 걸 어느 누가 좋아하랴. 그러나 사람의 손길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이 책은 우회하여 전한다.

 

물질적으론 풍요로우나 조금 비루해진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마돈나」는 피로회복제 같은 책이다. 조금 늘어진다 싶으면 고삐도 죄고 강약과 완급을 조절해 독자의 콧구멍을 절로 벌렁벌렁하게 만들면서. 하지만 저변의 씁쓸함도 읽혀져 고달픈 삶을 사는 누군가의 자화상을 주인의 동의 없이 본 느낌이다.

 

조금은 쓰고 피곤한 세상, 심각한데 웃기고 엉뚱한데 쓸데없이 진지해서 읽는 이를 조물조물 주무르는 『마돈나』로 이 여름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 안녕, 여름아. 내년에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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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소설을 읽고 있다. 언어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데 담담하면서 다정하고 다감한 소설이다. 나는 작가의 어조에 민감한 편인데 소설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결국은 어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은영의 소설을 처음 읽는다. 『밝은 밤』은 지난 달 말 출간된 그녀의 신작이다. 5일 만에 2쇄가 나왔다. 속도가 무척 가파르다. 4대에 걸친 여인들의 슬프고 아름다운 서사가 아련하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인생은 왜 그렇게 슬퍼야만 하는지. 비애가 묵중하게 가슴을 친다. 나로 치자면 우리 딸로부터 나를 거쳐 우리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이르는 이야기다. 외할머니의 자리엔 친할머니를 놓고 싶다. 나는 외할머니를 잘 모른다. 오래 사셨는데도 말이다. 죄송한 일이다. 그러나 내게 할머니는 친할머니밖에 없다. 그리운 할머니.

-『쇼코의 미소』는 최은영의 첫 작품으로 2016년 소설가들이 뽑은 그 해의 소설이다. 소설가로서의 그녀의 출발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둘 다 표지가 예쁘다. 예쁜 것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라는 생각을 한다.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도 신작이다. 정유정은 압도적이라는 단어와 서사를 하나로 묶은 작가다. 띠지를 본다. 때론 진실이 삶보다 더 무겁다고 적혀 있다. 진실은 불편하고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점성이 강하다. 개인의 고유함 속에서 발생하는 위험한 나르시시스트의 이야기. 나르시시스트는 극도의 이기주의만이 가능하다.

-도서관에서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라는 신간을 빌린 후 읽다 말았다.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일의 기쁨과 슬픔』은 작년에 나온 그녀의 소설집이다. 예전엔 단편 모음집이 끌리지 않더니 요즘엔 작가의 색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좋아한다.

단편집에 대한 생각을 바꿔 준 책은 구병모의 『고의는 아니지만』이다. 그녀의 책을 몇 권 빼놓고는 거의 다 읽었다. 시크함에 있어 구병모를 따라갈 사람이 있을까. 전만큼은 아니어도 지금도 구병모가 책을 내면 한번 쯤은 찾아보게 된다.

참 장류진은 예뻐도 너무 예쁘더라.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런 사람도 결핍을 느낄까.

-출판사 문학동네가 잘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매년 젊은작가상 수상자들의 작품집을 특별 보급가로 내는게 아닌가 싶다. 포스팅 하려고 펴봤더니 작가들의 싸인도 들어있다.

문학동네가 가진 볼륨에 비해 문단 내에서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큰 것은, 또한 팬심에 가까운 열혈 독자의 확보는 이런 부분들을 비롯, 섬세하고도 통 큰 접근 방식과 관리에 있다고 본다.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들을 잘 읽지 않는다. 그것은 내게 성경이라는 책이 있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고 넘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객관적으로도 충분히 나이 들었기 때문이다. 뒤집으면 살만큼 살았고 알만큼 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를 픽한 이유는 자이니치 작가가 쓴 책이어서다.
자이니치 작가들이 쓴 책은 늘 마음을 끈다. 강상중과 서경식, 한국계 소설가들의 책을 읽으면 경계선 위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그럼에도 말하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 가능하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그들의 삶에 동참하고 싶어서다.

-나이를 먹고 보니 부족한 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적은 능력을 가진 나를 볼 때 가슴이 아프다가도, 내게도 장점이 있고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는 나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나는 던져진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책을 읽어서 뭐가 얼마만큼 달라졌는지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면 앞서 살았던 이들의 헌신에 힘입지 않았을까 싶다. 그 헌신이 이어지고 이어져 다른 누군가에 닿는 작은 돌 하나의 역할이 내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이 저녁 나는 이렇게 나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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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만드는 법 - 더 많은 독자를 상상하는 편집자의 모험 땅콩문고
이연실 지음 / 유유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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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은 망했고 빨리 돈이나 벌러 나가자’는 심정으로 문학동네에 입사했다'는 저자 이연실은 15년 차 편집자다. 자칭 잡종 에세이 편집자이고 타칭 잘나가는 편집자다. 뼛 속까지 문학도인 자신이 문학동네에서 맡은 첫 업무가 아닐 비(非)가 붙은 비문학이라 처음엔 속상해서 삐뚤어지고 싶었단다.

"얀마, 너 이건 기회야. 여기서 에세이랑 비소설 편집을 익히잖아? 그럼 나중에 다 할 수 있어! 소설이든 인문서든 논픽션이든 그림책이든 다 척척 만들 수 있다고. 근데 그 반대는 어렵다? 일단 여기서 닥치는 대로 해 봐. 그럼 나중에 네가 원하는 어떤 사람이건 이야기건 다 책으로 만들 수 있게 될 테니까." 12쪽

이연실은 선배 편집자의 위로에 마음을 달랜 후 투지를 다진다. 하지만 에세이가 어떤 장르인가? 진입 장벽이 낮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남기 어려운 장르 아닌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잘할 수 없는 분야가 에세이다. 사람들마다 인생 스토리는 책으로 몇 권을 쓰고도 남을 만큼 있고, 절절함도 이야기 보따리만 풀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넘친다.

이런 가운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만드는 것이 편집자의 몫이다. 예전엔 독자의 눈을 끌기만 해도 어렵잖게 구매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서점에 가보면 예쁜 책표지에 파스텔톤의 사진과 그에 걸맞는 글씨체, 하다못해 여백마저도 이야기가 되는 에세이가 얼마나 많은가. 책을 잘 만드는 것과 책이 팔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편집자의 어깨는 그래서 늘 무겁다.

에세이는 내게도 각별한 장르다. 지금은 다른 단체로 이관됐지만 우수 문학도서의 심의를 했을 때 맡았던 장르가 에세이였다. 촉박한 일정으로 심의를 하게 되어 막판엔 책 4권을 펴놓고 읽다 지치면 다른 책을 읽는 방법까지 동원했는데, 무리를 해서 양쪽 눈에 실핏줄이 터지는 경험까지 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내가 주로 읽는 장르는 에세이다. 비교적 범위도 넓고 선택의 폭도 넓어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고 부담이 없어 좋다. 최근에는 이 책이 출간된 유유에서 나오는 책들을 종종 읽는데, 유유의 책을 만날 때마다 '요즘에도 이렇게 편집하는 곳이 있나' 웃으면서 사고 또 산다. 단순하지만 가독성이 높게 편집 되어 그런 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은 목차가 반을 먹고 들어간다(#뭘먹는다고라 #책을묵는다고요!) 목차를 보면 이연실이 어떤 마음으로 책을 만드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 '제목발' 무시하지 마라, 너는 한 번이라도 제목으로 책의 운명을 움직여 보았는가-내가 제목을 짓는 세 가지 방법
· 띠지 문안은 편집자의 간판이다-눈에 띄지 않으면 띠지가 아니니까
· 계약서를 꺼낼 때와 집어넣어야 할 때-에세이 기획의 타율 높이기
· 유명인의 책에서 인기와 팬덤보다 중요한 것-SNS 팔로워 수와 인지도에 속지 마라
· 나는 예술가보다 생활인이 좋아요-생활의 달인을 작가로 만들기
· 작가들과 잘 놀기, 그들의 말 기억하기-그리고 내상을 다스리는 법에 대하여

이 책의 부제는 더 많은 독자를 상상하는 편집자의 모험이다. 직설적으로 풀자면 읽히는 책은 어떻게 만들고, 많이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책엔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이야기만 담겨 있고 시종 유쾌하다. 때로 심장이 쿵 떨어지는 이야기도 스릴 넘치는 여장부의 활약상으로 느껴진다.

한데 이 책을 읽다보면 영 다른 색깔의 편집자인 글항아리의 이은혜가 떠오른다. 일하는 방식도 책을 보는 관점도 다른데 그녀들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성향은 다르지만 작가를 좋아하고 책에 몰입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가장 좋은 것을 추출해내는 방법이 비슷해서는 아닌가 생각해본다. #여걸들이로구만

이연실은 그간 김이나의 『김이나의 작사법』,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 과 같은 에세이를 만들었다. 다 중쇄를 거듭한 책들이다.

이는 독자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접점은 어디에 있으며, 저자와 독자가 친밀하기 위해 편집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고 고민했기에 얻은 결과이지 싶다.

"사실 난 에세이가 싫었다." 이연실이 이 책에 담은 첫 글이다. 그녀는 그 후 "한번 해 볼까?"를 거쳐 에세이를 만들수록 자유로움에 빠져들면서 그 시간들 속에서 한 시절씩을 살았다. 작가에게서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독보적인 삶을 책으로 만들었고, 매대에 놓인 책이 독자의 손에 잡힐 때까지 궁리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이연실을 추동하는 것은 에세이다. 그녀는 에세이를 통해 세상을 보고, 에세이로 한 사람의 생을 한 권의 책으로 치환한다. 열렬히 사랑하고 치밀하게 준비된 책들은 세상에 나가 제 몫을 감당하기도 했고 때로 실패해 아픈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연실은 나아갔다. 그 행보의 끝이 어느 때까지인지, 어떤 모양으로 그려질지 아직 모른다. 단지 가장 큰 선물이 주어질 수 있다면 스티븐 킹의 쓴 이 말이 아닐까 싶다.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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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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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소망조차 가질 수 없고 작은 출구조차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절망적이 된다. 갈수록 상황은 암담해지고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은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못하는 광야로 변한다. 도움을 청하려 손을 내밀지만 사람들은 연락이 안 되거나 각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존재를 무력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 모아 놓은 돈도 없는데 하루 사이에 12년이나 일했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가르치는 학생의 엄마에게는 수업 중단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토록 사랑했던 고양이는 아침에 교통사고로 이미 죽었다. 


노라에게 더 이상 어떤 일이 생길까 싶은데 최악이라는 말에 걸맞게 그날은 모든 안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이제 소망은 스러지고 남아있는 것은 허무뿐이며 생을 마무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떠오른다. 


"시간이 흘렀고, 노라는 허공을 응시했다. 와인을 마시고 나니 또렷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번 삶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가 둔 모든 수는 실수였고, 모든 결정은 재앙이었으며,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에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수영 선수. 뮤지션. 철학가. 배우자. 여행가. 빙하학자. 행복하고 사랑받는 사람. 그중 어느 것도 되지 못했다." 39쪽


노라는 구차한 삶을 정리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런 우울함과 감당 못할 미래에서 벗어나고 싶다. 시간은 죽기 딱 좋은 밤 11시 22분. 어떤 아쉬움도 없이 약을 먹는다. 죽음만큼은 제대로 되기를 바라며. 더 이상 후회의 늪에 빠져 허덕이지 않기를 바라며. 


그런데 여기는 어딜까? 교회나 작은 슈퍼마켓 크기의 건물에 사방이 온통 초록색 책으로 둘러 쌓여있다. 게다가 학창 시절 그토록 마음이 맞던 도서관 사서 엘름 부인이 이곳에 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곳은 자정의 도서관이다. 삶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서 노라는 다시금 생을 살아볼 기회를 얻는다. 


그간 노라의 삶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너무도 많은 후회가 그녀의 삶을 좀 먹고 옭아맸다. 이제 주어진 시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가장 후회했던 결정으로 제일 먼저 돌아가 삶을 살아보기로 한다. 결혼 이틀을 앞두고 자신의 변심으로 약혼자 댄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노라도 지난 시간을 후회하며 살았다. 그런데 막상 결혼한 상태로 함께 하니 댄은 노라가 알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노라는 실망했고 다시 자정의 도서관으로 돌아온다. 


노라는 숱하게 많은 삶을 살면서 모든 감정을 느낀다. 더 많은 삶을 살수록 다른 삶으로 쉽게 넘어갔고 나쁜 경험이 있으면 좋은 경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자신이 삶을 끝내려 했던 이유는 불행해서가 아닌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새로운 삶을 선택할 때마다 상상력은 더 발달했지만 더 많은 삶을 살면 살수록 어디에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 


"이 도서관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까지 노라가 선택했던 삶은 사실 모두 다른 사람의 꿈이었다. 결혼해서 펍을 운영하는 것은 댄의 꿈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것은 이지의 꿈이었고, 같이 가지 못한 후회는 자신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 단짝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올림픽 수영 메달리스트가 되는 것은 아빠의 꿈이었다...중략...어쩌면 그녀를 위한 완벽한 삶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딘가 틀림없이 살 가치가 있는 인생이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볼 가치가 있는 인생을 발견하려면 더 큰 그물을 던져야 한다는 걸 노라는 깨달았다. " 276~277쪽 


노라는 이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외과의 애쉬와의 삶을 선택한다. 애쉬는 여전히 친절하고 섬세했으며 어리고 예쁜 딸 몰리와 믿음직한 강아지 플라톤과 함께 하며 노라는 이 삶이 완벽하며 멋진 삶이라는 걸 느끼며 이곳에서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야만 했고 자신이 살고 싶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자정의 도서관에서 현실로 넘어온다. 


노라는 이제 어제의 노라가 아니다. 과거에 붙잡혀 후회 속에 사는 어리석은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을 테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 상황 속에서 오로지 지금을 살 작정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선택이 찾아올 때 기회를 만드는 자가 될 것이다. 그 선택은 자신의 운명을 멋지게 바꾸고 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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