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평점 :
'그립다'는 말은 '보고 싶다'는 말보다 깊다. 그 말 속에 이미 간절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그리움'이라는 말이 가슴에 박혀버렸다. 박혀버린 말은 뽑혀지지 않았고, 뽑을 수도 없었다. 내 그리움의 대상은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늘어나면서 내 마음 속의 그리움이란 웅덩이는 더 커져만 갔다. 커져버린 웅덩이는 밤이 깊을 때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간이 흐리자 그 웅덩이는 아픔의 시간을 추억으로 만드는 질료가 되었고, 나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그들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내 그리운 사람 중엔 박완서 선생도 계신다. 우린 서로 다른 공간 속에 있었지만, 선생의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선생이 가장 힘드셨을 때 나는 저 멀리 있었지만 누구보다 가깝게 대면할 수 있었다. 첫 만남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선생의 모습이었기에 나는 어떤 시기의 독자보다 선생을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 읽게 된 선생의 자전적 소설과 산문들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자의 마음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선생은 동화처럼 구현해 내셨다.
선생을 생각하면 늘 수줍게 웃는 새색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미련하게도 그 미소를 오래도록 볼 줄 알았다. 그러나 선생은 재작년 우리 곁을 떠나셨고 해가 바뀐지 벌써 2년이나 되었다. 한데 고맙게도 선생이 남은 자를 기억하셨나보다. 어느 매체에도 소개되지 않은 글이 곱게 묶여져 남아있었단다. 마치 선생이 살아 돌아 오신 듯했다. 남은 자의 아쉬움을 아신다는 듯 선생은 특유의 정감있는 글로 내 허기진 마음을 다독이셨다. 낮고 소박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선생이 단순한 작가가 아닌 이 시대의 어머니였음을 전해주었다.
이 책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이 소설가로 살게 된 이야기와 지난 시간들의 의미, 그리고 세상을 지탱하는 것들과 소소한 일상들이 담백하니,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려져 있다. 선생이 살아온 지난 삶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더 큰 여운을 남겼다. 날이 갈수록 내 안에서 느껴지는 부모의 흔적들 때문이었다. 내 얼굴에서 친정 엄마의 얼굴을 보거나, 돌아가신 아버지의 미소가 담긴 사진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그리움에 젖곤 했다. 그래선지 선생의 노년기가 마치 인생 후배의 노후를 미리 준비시켜주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들을 잃었을 때, 내 여생에 다시는 근심도 기쁨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장대 같은 아들을 잃은 지옥 같은 고통에 지쳤을 때 겨우 콩꼬투리만 한 새 생명이 기적처럼 나에게 왔다. 그 새 생명을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온몸이 떨리는 듯한 기쁨을 맛봤다. 나에게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예상 못한 일이었다. (...) 근심도 기쁨도 없이 목석처럼 살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은 건 거짓말이었다. 입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그 작은 생명에게 마음을 붙이고 울고 웃고 하였을까." p 115
죽음을 눈앞에 둔 자만이 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볼 수 있듯, 고통의 극점에 섰던 선생이기에 삶의 처절한 바닥마저 기꺼이 드러내셨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기까지의 절절했던 시간들이 눈앞에 드러난다. 생의 추위를 견뎌내지 않고는 완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선생은 자신의 고난을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셨다. 그래서 선생의 글은 위로하는 힘이 크다.
마지막 5부는 이 시대의 어른 박완서가 아닌, 다정다감하며 소녀같은 박완서의 모습을 담겨져있다. 자신이 피천득 선생에게 편애의 대상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귀여운 뻔뻔함을 보면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자의 자산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나이에 구애됨 없이 우정을 나눈 장영희 교수에 대한 마지막 인사 글과, 종교를 떠나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김수완 추기경, 그리고 우리 문학의 거두 박경리, 김상옥 선생을 기리는 글등은 선생이 누군가의 사랑스런 제자로 있는 시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선생이 내 곁에서 책을 들고 글을 읽어주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봄바람이 내 머리를 조용히 스치고 가는 기분이었다. 선생은 가고 안계시지만 글은 살아서 선생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책으로 사랑의 기억들을 나누었다. '그리운 것은 산 너머에 있다'고 어떤 시인은 말했다. 그러나 내게 그리운 것은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있다. 그 그리움이 내 인생 후반부의 아름다운 재료가 되어 삶을 풍성케 할 것을 나는 지금 기쁘게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