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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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는 말은 '보고 싶다'는 말보다 깊다. 그 말 속에 이미 간절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그리움'이라는 말이 가슴에 박혀버렸다. 박혀버린 말은 뽑혀지지 않았고, 뽑을 수도 없었다. 내 그리움의 대상은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늘어나면서 내 마음 속의 그리움이란 웅덩이는 더 커져만 갔다. 커져버린 웅덩이는 밤이 깊을 때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간이 흐리자 그 웅덩이는 아픔의 시간을 추억으로 만드는 질료가 되었고, 나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그들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내 그리운 사람 중엔 박완서 선생도 계신다. 우린 서로 다른 공간 속에 있었지만, 선생의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선생이 가장 힘드셨을 때 나는 저 멀리 있었지만 누구보다 가깝게 대면할 수 있었다. 첫 만남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선생의 모습이었기에 나는 어떤 시기의 독자보다 선생을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 읽게 된 선생의 자전적 소설과 산문들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자의 마음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선생은 동화처럼 구현해 내셨다.

 

선생을 생각하면 늘 수줍게 웃는 새색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미련하게도 그 미소를 오래도록 볼 줄 알았다. 그러나 선생은 재작년 우리 곁을 떠나셨고 해가 바뀐지 벌써 2년이나 되었다. 한데 고맙게도 선생이 남은 자를 기억하셨나보다. 어느 매체에도 소개되지 않은 글이 곱게 묶여져 남아있었단다. 마치 선생이 살아 돌아 오신 듯했다. 남은 자의 아쉬움을 아신다는 듯 선생은 특유의 정감있는 글로 내 허기진 마음을 다독이셨다. 낮고 소박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선생이 단순한 작가가 아닌 이 시대의 어머니였음을 전해주었다.  

 

이 책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이 소설가로 살게 된 이야기와 지난 시간들의 의미, 그리고 세상을 지탱하는 것들과 소소한 일상들이 담백하니,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려져 있다. 선생이 살아온 지난 삶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더 큰 여운을 남겼다. 날이 갈수록 내 안에서 느껴지는 부모의 흔적들 때문이었다. 내 얼굴에서 친정 엄마의 얼굴을 보거나, 돌아가신 아버지의 미소가 담긴 사진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그리움에 젖곤 했다. 그래선지 선생의 노년기가 마치 인생 후배의 노후를 미리 준비시켜주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들을 잃었을 때, 내 여생에 다시는 근심도 기쁨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장대 같은 아들을 잃은 지옥 같은 고통에 지쳤을 때 겨우 콩꼬투리만 한 새 생명이 기적처럼 나에게 왔다. 그 새 생명을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온몸이 떨리는 듯한 기쁨을 맛봤다. 나에게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예상 못한 일이었다. (...) 근심도 기쁨도 없이 목석처럼 살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은 건 거짓말이었다. 입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그 작은 생명에게 마음을 붙이고 울고 웃고 하였을까." p 115

 

죽음을 눈앞에 둔 자만이 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볼 수 있듯, 고통의 극점에 섰던 선생이기에 삶의 처절한 바닥마저 기꺼이 드러내셨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기까지의 절절했던 시간들이 눈앞에 드러난다. 생의 추위를 견뎌내지 않고는 완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선생은 자신의 고난을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셨다. 그래서 선생의 글은 위로하는 힘이 크다. 

 

마지막 5부는 이 시대의 어른 박완서가 아닌, 다정다감하며 소녀같은 박완서의 모습을 담겨져있다. 자신이 피천득 선생에게 편애의 대상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귀여운 뻔뻔함을 보면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자의 자산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나이에 구애됨 없이 우정을 나눈 장영희 교수에 대한 마지막 인사 글과, 종교를 떠나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김수완 추기경, 그리고 우리 문학의 거두 박경리, 김상옥 선생을 기리는 글등은 선생이 누군가의 사랑스런 제자로 있는 시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선생이 내 곁에서 책을 들고 글을 읽어주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봄바람이 내 머리를 조용히 스치고 가는 기분이었다. 선생은 가고 안계시지만 글은 살아서 선생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책으로 사랑의 기억들을 나누었다. '그리운 것은 산 너머에 있다'고 어떤 시인은 말했다. 그러나 내게 그리운 것은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있다. 그 그리움이 내 인생 후반부의 아름다운 재료가 되어 삶을 풍성케 할 것을 나는 지금 기쁘게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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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업 Science Up 1~5권 세트 (전5권 + 체험학습 노트) 아이세움 만화 백과
곰돌이 co.달콤팩토리 글, 박순구.김기수 그림, 김동희 외 감수 / 미래엔아이세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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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창 시절, 과학 과목을 나는 참 싫어했다. 어렵고, 재미가 없었다. 그러니 점수가 안 나왔고, 더 싫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과학 과목에 대한 인상은 점수와 비례한 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내가 어떤 한 세계를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균형있게 공부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간혹 하면서, 내 아이만은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하지만 바람이 현실로 구현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우선 나 자신이 잘 모르고 흥미가 없으니, 책도 자연히 덜 사게 되고 덜 읽히게 되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남자 아이였으면 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여자 아이다 보니 의도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과학을 접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좋아할만한 책을 전집으로 사두었는데 잘 읽는 것 같지 않았다. 난감했다. 책을 읽고 안 읽고를 떠나 과학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또다른 통로이기 때문이다.

 

올 초 기회가 되어 과학학습 만화를 아이에게 보게 했다. 아이의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몇 번을 반복해 읽는 걸 보니 안심이 되었다. 지식이라는 게 한 번 읽고 금방 습득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이제 3학년이 되니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을 읽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책이다. 시리즈물인데 그 중 지진과 화산에 관한 책을 우선 읽혔다. 

 

 

인간이 대단한 듯 해도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때론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도 있다. 설사 그렇다해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당장 해결책은 못되지만 우리가 어떤 지구적 환경속에서 살고 있고, 어떤 대비를 해야하며, 위급시의 메뉴얼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화산과 지진에 대해 다룬다. 예전 대만에 갔을 때 활화산을 갔던 적이 떠오른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뿌연 연기와 유황 냄새로 가득했던 그 곳은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나를 두렵게 했다. 당장이라도 화산이 폭발할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지독했던 유황 냄새를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말로만 들었던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를 여실히 느꼈던 시간이었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며 그 얘기를 들려주니 놀란 얼굴을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화산 폭발이나 지진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만 예외는 아니라고 한다. 올해 들어 자그마치 56회나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게다가 백두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는 몇 년전부터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만일 백두산에서 화산 폭발이 난다면 우리에게도 꽤 피해가 올거라는 건 예상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지구에 어떤 지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가 알아야 할 지식을 만화로 구성해 보여준다. 한 장이 끝나면 뒤에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인 후 사진과 그림을 넣어 실감있게 전한다.

 

 

똑같은 학습이라도 아이들은 공부라면 저항감을 느끼지만 책읽기라면 부담없이 접한다. 우리 자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학습량이 늘어 안쓰러운 아이들이다. 배울 것도 많고 해야 할 것이 많은 아이들에게 이 책이 재미있는 책 읽기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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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단길로 간다 푸른숲 역사 동화 6
이현 지음, 백대승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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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지만 뭔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나라가 있다. 발해다. 발해가 한반도 북부와 중국 만주 및 러시아 연해주를 아우르는 큰 나라였고, 주변 나라와 다양한 문물을 주고 받는 무역국가였다는 말은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실체감은 적다. 이는 우리가 발해에 대해 아는 것이 적기 때문이고, 발해와 우리와의 먼 공간적 거리에 마음의 거리마저 멀어진 데 있다. 실제로 우리가 발해를 유적으로나마 접하려면 중국이나 러시아로 건너가야 하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발해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뭔가 낯설고 심지어 이질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런 발해에 대해 친근하고도 사실감있게 전하는 동화를 만났다. '짜장면 불어요'라는 동화집으로 개성있고 재미있는 글을 선보인 이현의 역사동화 책이다. 이현은 발해에 관한 얼마 되지 않는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발해와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를 좁혔다.

 

 

 

이 책의 주인공은 13살 짜리 소녀 홍라다. 홍라는 발해 상경성에 있는 금씨 상단의 대상주 금기옥의 딸로, 어머니를 따라 일본과 청해진을 다녀오다 어머니를 잃는 큰 일을 당한다. 이제 홍라 곁엔 어머니의 호위무사였던 말못하는 친샤와 열 일곱살짜리 수습 천문생 월보와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어머니의 사고 소식을 안 사람들의 빚 독촉으로 홍라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특히 어머니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섭씨 영감에게 빌린 돈은 비단 천 필에 달하는 금액으로, 이자는 무서울 정도다. 게다가 내년 봄, 부왕의 혼례식에 쓰일 비단 오백 필은 어머니가 바쳐야 할 물품이었다. 그런데 비단은 바닷 속에 가라앉았고, 사장시의 영은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물품을 바치지 못할 때는 관아의 부곡이 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고도 어린 홍라가 딱했는지 영은 상단을 넘기고 아버지를 찾아가라 말한다. 아버지는 홍라가 두 살 때 고향인 흑수로 돌아가면서 소동인이라는 청동인형만 남겼다.

 

홍라는 어머니가 큰 위기를 만났을 때 쓰라고 준 열쇠를 찾아 상단의 묘원으로 가 은화를 꺼낸다. 이 은화를 사마르칸트로 가져가면 큰 돈을 벌 수 있지만 홍라에겐 시간이 없다. 홍라는 머잖은 곳에 있는 솔빈의 소그드人  마을에 가서 은화를 팔고 솔빈의 말을 사기로 마음 먹는다. 솔빈의 말을 당나라 장안으로 가져가면 비싼 값에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비단을 싸게 사온다면 몇 배의 이문을 남길 수 있다. 그러면 금씨 상단을 지킬 수 있다. 홍라는 교역을 떠나기로 하고 주변 사람들 모르게 상단을 꾸리지만 상단 소식이 섭씨 영감에게 전해지고 말았다. 섭씨 영감은 아들 쥬신타를 보내 상단을 넘기면 모든 빚을 탕감하고 홍라가 먹고 살 수 있는 돈과 작은 집을 준다고 했다. 홍라는 매몰차게 거절하고 친샤와 월보, 비녕자, 그리고 쥬신타까지 데리고 길을 떠난다. 

 

여정은 쉽지 않았다. 홍라는 도중에 아버지를 만났고 신라인이라는 사람에게는 큰 사기를 당한다. 그 와중에 월보를 잃었고, 돈도 잃었으며, 친샤는 중병이 든 이모 곁에 두고 오게된다. 무엇보다 비녕자가 부모의 복수를 위해 신라인과 꾸몄다던 이번 일은 홍라에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큰 의지가 됐던 쥬신타마저 구도자가 되기 위해 인도로 떠나자, 홍라 곁엔 아무도 없게 된다. 홍라는 금씨 상단을 섭씨 영감에게 넘긴 후 남은 돈으로 장사를 해 돈을 모은다. 얼마 뒤면 홍라는 사마르칸트로 갈 생각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 볼 계획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비단길을 만들고 싶고,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교역길을 이어가려는 이유에 대해 대답할 계획이다. 

 

 

 

이 책은 어린 소녀 홍라가 어머니를 잃고 세상의 온갖 일에 부딪치면서 참 상인으로 커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우리 역사로 배우긴 했어도 일체감을 가지기 어려웠던 발해가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발해가 고구려, 신라, 백제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책 속에서 만난 발해는 다양한 사람들이 편견없이 사는 나라였고, 비단길 못지 않은 발해의 길을 만든 진취적 기상의 나라였다. 그런 발해와 좀 더 친밀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동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주어져 반가웠다. 역사도 우리가 아끼고 보듬어야 가치를 발휘한다. 단지 역사이기만 했던 발해를 오늘로 불러와 우리의 발해로 만들어준 어린 소녀 홍라가 나는 고맙기만 하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토리버섯마을, 한국경제,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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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컨스피러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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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을 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만났다. 재미핵물리학자 이휘소를 주인공으로 하는 당시 3권짜리 소설을 나는 무슨 로맨스물이라도 되는듯 매우 애틋해하며 읽었다. 그 시절 이휘소에 대한 내 감정은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고 아플 정도였다. 아니 저릿하고 아픈 정도가 아니라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었다는 안타까움과 애국의 의미, 과학자가 갖는 힘의 크기들이 맞물려 어린 내 가슴을 쳤던 것 같다. 김진명이 이 책을 쓰기 전에 이미 이휘소에 대한 글을 읽었지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영화처럼 입체적으로 이휘소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 후 김진명이 쓴 소설을 나는 몇 권 빼놓고는 거의 다 읽었다.

 

김진명이 신간을 냈다해서 관심이 갔다. 눈길을 끄는 제목에 미묘한 시국적 상황이 오버랩되며 궁금증이 더해졌다. 책을 펴니 '바이 코리아'의 개정판이란다. 김이 새는 느낌이 들었지만 읽기로 했으니 읽어내려갔다. 요즘 같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아무리 급박하다해도 10년 전 상황을 읽으려니 긴박감은 아무래도 덜 생겼다. 그런데 김진명은 작가 서문에서 시점만 바꾸면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같다고 했다. 한두 달 전 나는, 정의사제구현단 함세웅 신부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엔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의 불법 비자금 문제와 권력세습을 강하게 질타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국정원보다 앞선다는 정보력으로 자신들의 비자금 문제를 감추기 위한 비열하고도 노골적인 삼성의 압박을 老신부는 고발하고 있었고, 우리의 자부심이자 경제권력인 삼성공화국의 두 얼굴이 정밀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그러니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바이 코리아'가 개정되어 나왔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각설하고, 이 책은 삼성을 전면으로 내세워 과학기술 전쟁에 대한 이 시대의 보이지 않는 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드러나는 것은 과학자와 과학 인재를 둘러싼 국제적 기업이나 단체들의 음모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삼성이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흐름속에서 어떻게 생존해왔고, 적대적 M&A에서 어떻게 구사일생해 귀환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병철 회장대부터 등장하는 도입부는 능력이 되지 않으면 효도도 못하게 하는 자연인 이병철과 기업인 이병철 사이의 고독한 투쟁을 그려내고 있다. 반도체 산업을 일으키기까지의 선대 회장의 비화와, 이건희 회장대에 일어난 여러 급박한 일들이 나라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이 상충됐을 때를 기점으로 앞 뒤로 포진돼 있다. 김진명은 삼성을 밑바탕에 깔고 세계적 흐름과 우리시대의 이공계에 대한 처우 문제와, 우수인력의 해외유출과, 그런 이유로 암울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 상황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제기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됐다.

 

이 책의 구조는 그동안 김진명이 보여준 여타 소설의 구조와 비슷하다.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고분분투하던 한 기자가 죽임을 당하고 그 기자의 석연찮은 죽음에 관심을 가진 다른 기자가 뛰어드는 구조다. 그런 구조하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이지 않는 손들의 행태를 드러내고 있으니 속도감 때문에라도 재미는 있었다. 김진명 소설의 특징인 가독성 또한 여전히 좋다. 아쉬운 것은 딱딱 끊어지는 듯한 구성 때문에 맨 마지막에 이르러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점이다. 좀 더 리드미컬하게 흐름을 탔으면 소설로서의 자연스런 마무리가 됐을텐데 그러지 못해 이야기를 하다 끊은 듯한 느낌이 든다. 또한 박정희의 비자금과 스위스 은행, 바이스로이 재단과 천재과학자, 삼성과 미 CIA가 개입한 적대적 M&A등이 좀더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읽을만 했고 우리가 어떤 세계경제적 상황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한번쯤 생각케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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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2 - 콜드스틸 원정대
이우혁 지음 / 비룡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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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가시적 세계에 매달린다. 그러니 아이들의 관심사가 그 쪽으로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소중한 것들은 돈으로도 살 수 없고, 강제로 하게 할 수도 없다. 또한 내가 할 수 있음에도 누군가를 위해 하지 않을 수 있는 배려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 때야 가능하다. 이우혁은 그런 곳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이끈다.

 

 

'고타마 1'이 듀란의 왜곡된 자아상 회복기라면, '고타마 2'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 무엇이냐는 철학적 질문으로 문을 연다. 전편에서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죽은 자의 망령까지 불러낸 듀란은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을 알고 자책한다. 그러나 실패 없는 성장은 없는 법, 듀란은 마음을 다잡고 콜드원정대를 꾸려 길을 떠난다. 자신의 놀라운 힘을 사용케 하면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한결같은 고타마가 너무나 좋은 듀란은, 어느날 고마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조른다. 고타마는 듀란의 눈을 감긴 채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한다. 고타마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컸고 신비함 또한 형언하기 힘들었다. 그런 고타마가 자신을 친구로 받아들여 주었다는 사실에 듀란은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원정의 길은 지리하고도 험난하다. 깊고 습기찬 숲 속에 가도가도 나무만 보이는 정경으로 원정대원들은 지쳐간다. 그 때 웬 푸른 괴물이 나타난다. 한데 이 괴물은 뭔가 다른 것 같다. 생긴 건 무섭지만 장난기도 있고 착한 것 같다. 그러나 테트리아곤이라 불리는 괴물 또한 크롬웰의 협박하에 있고 듀란을 넘기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테트리아곤은 듀란을 잡기 위해 돌진하고 원정대원은 목숨을 걸고 듀란을 지킨다.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듀란은 테트리아곤이 피투성이가 되어 날뛰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설명하긴 마땅치않지만 원한보다 강하고 동정이나 연민과 비슷한 슬픔은 고타마가 자신의 능력을 내보내는 조건이 되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테트리아곤과 동족들은 듀란을 돕기로 마음 먹는다.

 

테트리아곤의 안내로 듀란 일행은 콜드스틸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지하 터널로 들어선다. 지루한 여정이 끝나고 마침내 터널의 끝에 다달았다. 그러나 지상으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않아 기병단들이 듀란 일행을 덮친다. 플로베르를 비롯한 5명의 대원들은 있는 힘을 다해 싸우지만 결국 듀란을 지키지 못한다. 듀란은 고타마의 급박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듀란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고타마는 영계의 질서를 어기고 듀란을 구해낸다. 이 일로 고타마는 듀란과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드디어 콜드스틸 왕궁에 들어섰다. 차갑고 잔혹한 크롬웰을 만나는 일만 남았다. 이제 마지막이다. 그런데 저렇게 호남형의 화려하고 말끔한 차림의 사람이 크롬웰이라니, 듀란은 당황하고 만다. 듀란에겐 이제 단 한번의 기회만 남아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사랑을 쓸 차례다. 하지만 듀란은 세상에서 가장 큰 드래곤 크락수스보다 크롬웰이 더 무섭고 두렵다. 자기 자신만을 완전히 사랑한다는 크롬웰의 말은 듀란을 공포에 젖게 만들고, 듀란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느낌에 절망한다. 사랑의 힘은 매우 크고 위대하지만 잘못 사용되면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고타마의 말이 이제서야 이해된다. 사랑 때문에 망가졌다던 크롬웰을 차마 죽일 수 없었던 듀란은 자신이 사라지기로 마음 먹고 수백 조각의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진다.

 

듀란은 정말 지상에서 사라지고 만 것일까? 그리고 과연 고타마는 누구였을까? 이렇게만 전해야 할 것 같다. 고타마는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그 무엇도, 또 시공을 초월한 어떤 존재도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또한 고타마를 그 자신일 수 있게 만든 것이 사랑이라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할 것 같다. 사랑은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어내는 승리나 성공을 넘어서는, 자신의 생명마저 마다하지 않는 최고의 고결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여지고 만져지며 즉답이 있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어린 친구들이 이 책을 읽고 가슴이 저릿해졌으면 좋겠다. 환상의 세계에서 벌이는 전투의 향연에 짜릿해 하지 말고, 비록 미물일지라도 생명이 그 안에 있음을 기억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결국 내게 돌아와 나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키워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소설을 통해 삶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하루였다.

 

사진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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