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이름 푸른숲 새싹 도서관 10
호세 안토니오 타시에스 글.그림, 성초림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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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페이지 안되는 책이었지만 읽은지 십여일이 지났음에도 어떤 말도 쓸 수 없었다. 단순히 무거운 주제여서라기보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의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 아이에게 견딜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 모습을 즐기는 또래 아이들을 보는 건 힘들었다. 이미 구조적인 문제처럼 되어버린 상황이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짐작했듯이 이 책은 학교폭력을 다루고 있다. 최소한 중학생은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가 학교에서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 아이의 심정은 이렇게 표현돼 있다.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햇살, 오븐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 발끝에 닿는 푹신한 잔디,

이런 것은 베르타, 카를로스, 다니엘, 플라비아, 헤르다를 위한 거야.

 

살랑살랑 부드러운 미소, 깔깔대는 웃음소리, 소곤소곤 속삭이는 말,

이런 것을 하이메, 누리아, 오리올, 파울라를 위한 거야.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 라이사, 타니아를 위한 것!

나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어.

 

아이의 심경은 처절하다. 자신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아이의 말은 어떤 외침보다 더 강하다. 결코 입밖으로 나오지 않을 그 말은 그래서 더 슬프다. 한때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자친구도 아이들의 훼방으로 끝내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아이 곁엔 아무도 없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이름대신 '공부벌레'나 '겁쟁이'로 불리고, 학교는 감옥과 같다. 아이는 수업이 끝나서도 곧바로 집으로 갈 수 없다. 다른 아이들이 돌아갈 때까지 운동장에서 서성인 후, 아이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집으로 갈 수 있다.

 

지금 아이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곳은 엘리베이터 안이다. 아이는 자신이 왜 남과 다른지 고통스러워한다. 이제 아이는 계단으로 발길을 돌려 옥상으로 향한다. 난간 사이로 보는 저 밑은 그리 무서워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그 아이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곳의 배경은 스페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상황과 이렇게 똑같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다르지 않다. 놀라야 하는가, 비통해해야 하는가. 왕따, 학교폭력은 이제 전세계적인 현상이 된 듯하다. 피해 학생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어른들은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쉬쉬 하거나 입막음하려 한다. 피해 학생은 도움을 받기 보다 오히려 질책을 듣는다. 아이 또한 그랬다. 아이가 도움을 청할 곳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는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쉽고도 아주 작은 답을 조용히 제시한다.

 

사진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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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비룡소 클래식 3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에드워드 윌슨 그림, 박광규 옮김 / 비룡소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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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책은 묘한 긴장감을 동반한다. 결코 남의 얘기일 수 없으며 오늘날에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대척점에 있어야 할 선과 악이 한 인간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은 때론 전율을 넘어 공포를 불러온다. 그래서 점잖고 교양있는 사람의 이중성이 폭로될 때 우리는 더 충격을 받는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책이다. 로버트 스티븐슨은 절대 그럴리 없어 보이는 신사 지킬을 통해 어떻게 하이드가 나올 수 있는지를 도발하듯 그려낸다. 그래서일까, 백 년이 넘는 시간 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인간 안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선함만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다분히 충격적이다. 잠자는 아기의 천사같은 얼굴이나,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는 이타적 행위는 고귀함을 넘어 숭고함마저 보여준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인간 안에 숨어있는 야수와 같은 본성은 인간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어떤 이는 인간의 역사를 살륙의 역사라고까지 표현했다. 아유슈비츠 수용소나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인종청소와 같은 비열한 전쟁은 인간이 동물보다 나음을 찾을 수 없게하는 난감하고도 불편한 진실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인간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의학박사이자 민법학 및 법학 박사이며 왕립협회의 회원인 지킬박사는 사회적 지위와 명망까지 두루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방종과 쾌락을 누르지 못해 결국 파멸의 길을 자초한다. 지킬은 약물 실험을 통해 자신을 하이드로 변화시켜 마음껏 일탈을 맛본다. 그가 만들어 낸 하이드는 악으로만 이뤄져있어, 하이드 곁에 있기만 해도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는 미움과 분노를 느낀다. 한번 손댄 약물의 유혹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지킬은 도덕적 무감각증은 말할 것도 없고 마침내 사람까지 죽이고 만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제어하지 못한 악은 결국 지킬을 삼켜 애꿎은 사람들과 친구인 대니언 박사의 목숨마저 앗아간다. 친구이자 담당 변호사인 어터슨은 지킬을 지키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 속에 내재한 악을 우습게 여긴 결과는 참혹했다. 일탈에의 유혹과 더이상 지탱키 어려운 위선은 지킬을 금단의 열매를 향해 달려가게 했고, 달콤하기만 했던 열매는 독이 되어 지킬을 찔렀다. 지킬이 죽고 난 후 어터슨은 자신에게 보낸 지킬의 편지를 읽는다. 편지 안엔 비탄과 후회로 가득찬 지킬의 심경이 참회록처럼 그려져 있다.

 

지킬과 하이드는 인간이 지상에 발을 딛는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어둠의 증표다. 지킬의 위선 또한 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쩌면 지킬과 하이드가 벌이는 전쟁터일지 모른다. 지킬과 하이드를 통해 인간 속에 내재한 악과 당시 런던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스티븐슨은 고발했지만, 책은 시간의 현재성으로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의 하이드는 어디에 숨어있냐고. 이 자아분열의 시대에 그런 인간의 양태를 서슴없이 보여주고 있기에 이 책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읽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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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이야기 지식은 내 친구 5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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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이 일을 하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사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그런 슬픈 운명을 가진 사람의 글은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무엇일까? 이런 양가감정 속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이자 사진작가인 호시노 미치오는 평소 자신이 우려하던 일을 만났고 그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96년, 한 TV 프로그램의 취재차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를 방문하던 중 호시오 미치오는 이른 새벽 불곰의 습격을 받아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의 나이 마흔셋이었다. 책을 읽기 전 작가의 약력부터 읽어선지 애잔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dl 무거워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우려와는 달리 호시노 미치오의 글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친절하고 따뜻한 느낌을 담고 있다.

 

 

호시노 미치오는 자신이 어떻게 알래스카에 발을 디디게 됐는지부터 소개한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알래스카에 관한 책 속에 들어있던 한 장의 사진은 그의 운명을 가르게 된다. 사진을 보고 시슈마레프 마을에 흠뻑 반한 호시노 미치오는 알래스카에 가고 싶어 다짜고짜 그곳에 사는 촌장에게 편지를 쓴다.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어느날 알래스카의 시슈마레프에서 편지 한 통이 날라든다. 호시노 미치오는 짐을 꾸려 알래스카로 떠나고 그곳에서 대자연이 무엇이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배우게 된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사진작가가 되어 다시 알래스카로 가기까지 6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알래스카에서 호시노 미치오는 동물에 대한 공부를 한다. 그러던 어느 새벽, 텐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곰 한마리를 보며 곰의 일년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곰을 지켜보며 호시노 미치오는 어미 곰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과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곰은 그렇게 호시노 미치오의 삶에 방점을 찍어 놓는다.

 

 

 

 

 

2년 째 되던 해 여름엔 카약을 타고 빙하 탐험을 나선다. 높은 빌딩처럼 우뚝 솟아 있는 빙하는 갑자기 무너져 내리기 일쑤라 촬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멀쩡하다 한꺼번에 무너지면 커다란 폭발음에 섬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진동과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든다.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물에 빠지면 30분만에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위험 앞에서도 알래스카의 모습을 담고자 호시노 미치오는 혼신의 힘을 다한다. 이외에도 틈틈이 그는 바다표범과 혹등고래, 순록도 카메라에 담는다.

 

 

알래스카에도 봄은 온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을 수 없던 작은 꽃들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철새들은 둥지를 틀러 들른다. 다람쥐와 여우는 겁없이 텐트를 두드리고, 어미 곰과 새끼 곰은 긴 겨울동안 놀지 못했던 아쉬움을 풀겠다는 듯 눈위에서 논다.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때론 모닥불이, 때론 오로라가 호시노 미치오의 친구가 되어준다. 절대 고독 속에서 호시노 미치오는 자신에게 팔을 벌리는 알래스카를 더 느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은 어쩌면 인생 최고의 영예일지도 모른다. 가수들은 무대에서, 배우는 촬영지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꿈꾼다. 그렇다면 호시노 미치오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것일 터다. 자신이 사랑한 알래스카에서, 좋아한 사진 작업을 하다 취침 중 곰으로부터 맞게 된 죽음은 가장 그다운 죽음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이렇게 우리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 자신만의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거두어간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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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한순간
KBS 강연100℃제작팀 지음 / 김영사on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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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견딜만한 일이었는데, 지나는 중에는 말할 수 없이 힘든 것이 인생길이다. 다른 사람들은 쉬운 길을 가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답답하고 괴로울 때, 같은 여정을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힘이 된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닌 누구나 겪고 아파하며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좌절을 딛고 일어날 때 마치 자신이 일어선 듯한 느낌이 드는건, 아마도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제대로 설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인생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한 순간'은 이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떻게 삶의 굴곡을 헤쳐왔으며 어떻게 다시 시작했는지를 들려주는 이야기집이다. 이들 가운데는 대학교수와 한의사, 의사도 있고, 대기업 임원을 했던 사람도, 작은 기업의 대표도 있다. 또 운전기사 출신의 은행지점장도, 소년원 출신의 노무사도, 최고령 사시 합격자도 있으며, 사업실패로 한때 노숙자였던 창업지도사도, 구두 수선공도, 산악인도, 의대 출신 요리사도 있다. 이들 23명의 이야기는 인생이 누구에게도 만만치 않았음을 웅변하듯 보여준다.

 

입을 열지 않으면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자신의 속내를 보였을 때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그랬을까? 또래 친구들이 선망하는 의대를 자퇴하고 그녀가 요리사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명 산부인과 의사가 청국장을 만드는 회사의 대표가 된 이유는, 소년원 출신 노무사가 아픈 과거를 털어놓으며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자기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불편한 몸으로 동생들 돌보길 주저하지 않았던 소년은 어떻게 해서 구두수선점을 운영하게 됐을까? 자신을 공개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이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증이 더해갔다.

 

23 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르지만 같았다. 나이도, 성별도, 하는 일도 달랐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려는 목적은 같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했고, 각자가 자신만의 인생을 살기를 바랐으며, 혹여라도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누군가를 붙잡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통이 영원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언젠가 웃을 날이 있으니 조금만 더 견디라고, 그런 말을 하고픈 마음들이 모였기에 이책은 뜨겁다.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생의 처절함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증인들의 고백이기에 희망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스물세 살, 육군 소위로 복무하던 어느 날이었다. 부대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데 '펑'하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통증이 몸을 덮쳤다. 뿌연 연기와 흙먼지 속에 주위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고,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뜬 곳은 병원 침상이었다. 내 몸은 미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침상 곁을 지키고 있던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수류탄 폭발 사고가 났다고 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른손이 잘려나갔다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용감한 군인으로 당당하게 살려고 했는데 이런 불행이 내게 닥치다니! 환한 세상에서 쫓겨나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에 갇힌 기분이었다. 손 하나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p. 153 -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위기는 기회가 된다.' 조서환 전 KTF 부사장

 

조서환씨가 활동하던 시대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일반 기업에 취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든 시대였다. 지금처럼 복지의 개념이 서 있을 때도 아니었다. 몸이 성한 사람도 취직이 힘들다는데, 하물며 한손을 잃은 그가 '마케팅계의 전설'이란 말을 듣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을런지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남편과 헤어진 후 어린 자식과 살기 위해 시장통에서 밤늦게까지 김을 구워 팔며 자립을 꿈꾸었던 한 엄마가 작은 업체를 이루기까지 겪었을 어려움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외에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는 좌절한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북돋워준다.

 

이 책에 소개된 23 명은 모두 삶으로 말하고, 삶으로 증명했다. 없는 것에 눈 돌리며 좌절하기보다 지금 이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주목했고, 차라리 손쉬울 수 있는 죽음의 길보다 고통스런 삶을 선택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칠 때, 이들이 먼 훗날 누군가를 위로하는 자리에 서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스스로를 돕는 과정이라 되내이며, 날마다 더 좋은 나를 꿈꾸고, 자신이 이룰 꿈을 위해 포기하지않고 한걸음씩 나아갈 때 그들은 미래를 오늘로 만들었다. 그 자취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

 

사진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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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 일주 비룡소 클래식 31
쥘 베른 지음, 세바스티엥 무랭 그림, 윤진 옮김 / 비룡소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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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책을 펴내거나 읽을 때는 출판사나 독자 모두 모험을 시도해야 한다. 이미 알려진 것 외에 특별한 무언가가 쌍방간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한 권의 동화로 가볍게 읽었던 책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그 시대의 정서와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면, 땅속에 묻힌 보물이 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줄이고 줄이느라 사라져야 했던 세세한 내용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완성된 모습은, 신간을 읽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재발견의 기쁨을 선사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에 선보인 책이다. 현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시대의 이야기인데도 읽으면 순식간에 동화되는 느낌이 든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부푼 기대와 여행에 대한 호기심, 다른 문화에 대한 궁금증은 모험심과 맞물리며 재미를 더한다. 쥘 베른은 기발하고 탁월한 상상력과 방대한 지리학적 지식을 통해 독자들을 소설 속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단순히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급박한 상황에 놓이게 해 일체감을 조성한다. 그래서인지 쥘 베른이 신문에 이 책을 연재하던 당시 구독자들 사이에선 실제 내기까지 벌어졌다 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단순히 세상을 여행하는 모험기만은 아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한 개성의 소유자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부자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점잖으며 말이 없는 필리어스 포그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포그는 일가친척도, 친구도 없으며 내력도 알 수 없는 신비한 인물로 집과 클럽만 오가며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포그 곁엔 불과 몇 시간 전에 채용된 프랑스인 하인 파스파르투가 있다.

 

“필리어스 포그와 잠시 말을 나누는 동안 파스파르투는 재빨리, 하지만 꼼꼼하게 주인으로 모시게 될 사람을 관찰했다. 마흔 살 정도 되는 것 같았고, 고상하고 잘생긴 얼굴에 키가 크고, 밉지 않을 정도로 살이 붙었고, 머리카락과 구레나룻은 금빛이고, 이마는 관자놀이에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하고, 혈색은 약간 창백한 편이고, 가지런한 치아가 아름다웠다……침착하고, 차분하고, 눈빛이 맑고, 눈을 많이 깜박이지 않고, 한마디로 영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냉정한 영국인, 그 학구적인 태도를 안젤리카 카우프만이 붓끝으로 잘 표현해 낸 바 있는 차가운 영국 신사의 표본이었다.” pp. 21~22

 

 

파스파르투는 고용된지 반 나절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기겁할만한 이야기를 듣는다. 필리어스 포그가 당장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며 짐을 싸라는 것이다. 그것도 80일 안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와야 하며, 2만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걸렸단다. 게다가 일이 꼬이려는지 하필이면 필리어스 포그가 영국은행 강도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끈질긴 픽스 형사로부터 추적 당하는 일마저 생긴다. 픽스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필리어스 포그를 범인으로 생각한다. 포그의 인상착의도 그렇고, 비밀에 쌓인 사생활도 픽스의 추정을 확고히 하는데 일조한다. 한편 파스파르투는 이 여행길이 조바심도 나고 지루해지기도 한다. 다혈질에 쾌활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주인에 대한 충성심도 많지만 파스파르투는 일도 잘 저질러 포그에게 손해도 꽤 끼친다.

 

냉정하리만큼 계산에 밝지만 포그는 사람을 구하는데 쓰이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 책의 별미를 여기서 맛볼 수 있다. 포그는 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시간을 앞당기려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진정 신사라면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쥘 베른은 넌지시 알려준다. 그런 포그에게 힘든 사건이자 인생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생긴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어야만 하는 어린 부인을 보게 된 것이다. 아우디 부인의 구출 작전은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지만 포그는 파스파르투의 활약에 힘입어 안전하게 구출해낸다.

 

여행길은 예상도 못했던 난관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포그는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주위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을 원망할만한 사건, 사고가 많았음에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을 철썩같이 범인이라고 믿었던 픽스조차도 마음의 변화가 생기게 할 만큼 포그는 신사적인 행동을 잊지 않았다.

 

 

그후 포그 일행은 홍해와 인도양을 거쳐 홍콩과 일본,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거쳐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기까지 힘든 여정을 잘 마친다. 지나치거나 거쳐가는 여행지의 풍물과 여러 나라 사람들의 풍속은 독자의 기분을 환기해주며 세계 일주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동시적으로 전한다. 그간 홀로 지내며 다른 사람과 필요할 때만 어울렸던 포그는, 이 여행으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며, 여행경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은 파스파르투와 픽스에게 나누어주며 기쁨을 함께 한다.

 

만일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생생하게 현장만 전달하고 모험만 강조했다면 당시에만 반짝 뜨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 시대에만 통하는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나면 관심도 사라지고 책의 가치마저 떨어진다. 그런데 이 책이 아직도 변하지 않는 생명력을 가지는 것은 그 안에 작가의 세계관이 들어있기 때문일 터다. 자신이 냉정히 판단한 후 내린 결정에 대한 믿음과 약속을 지키려는 책임감,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타날 땐 약속보다 더 나은 가치를 붙들었기에 이 책이 공상과학 소설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고 본다. 모험과 환상 뿐 아니라 가치까지 담겨있는 책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특히 삽화를 보는 맛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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