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와서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불끈 솟아올랐을 때 집 근처 어덜트 스쿨에서 하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에 등록을 했다. 매일 가기는 귀찮은데 마침 클래스 중에 비디오를 집에서 보고 일주일에 한번 선생님을 만나서 비디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있길래 그걸 신청했다.
그 비디오가 얼마나 재미있던지! 보스톤에 살던 싱어송라이터인 주인공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음악학교에 가려고 낡은 차로 미국을 가로 지른다. 중간에 차에 문제가 생겨 고생하다 잘생긴 (내 눈에는 느끼했지만)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나중에 이 남자의 형과도 썸씽이 있게 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막장이네) 보통 공부건 운동이건 해야지 하고 어디 등록했다가도 한달을 못 넘기는 나였는데 이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는데다 과연 주인공이 형과 동생 중 누구랑 연결될 지 궁금해서 드라마 끝날 때까지 클래스를 다녔다! 물론 드라마 끝나고 바로 그만 둠 ㅜㅜ
주인공이 보스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는 에피소드를 보고 온 날 선생이 나한테 물었다. "너네 나라는 끝에서 끝까지 얼마나 걸려?" "응 한 5시간?" "비행기로?" "아니 차로" 그랬더니 놀라더라구. 그래서 좀 기분이 나빴었다. 지네 나라가 크면 뭐 얼마나 크다고 흥
그때만해도 나는 미국이라는 곳이 얼마나 큰 지 별로 느끼지 못했던거 같다. 동부, 중부, 남부, 서부, 북부는 거의 다른 나라 만큼이나 문화도 풍경도 다르다. 캘리포니아 하나만 해도 얼마나 큰지. 그 선생이 캘리포니아에서 쭉 살아왔다면 자기가 사는 주보다도 작은 나라가 있다는거에 놀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사실 많은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에 대해 무척이나 무지하다.) 얼마 전 둘째와 함께 북가주를 다녀왔는데 우리집에서 목적지까지 780km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400km니까 거의 서울 부산 왕복인데도 이게 캘리포니아 끝에서 끝이 아니다. 아 멀다. 지금껏 샌프란시스코까지 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주로 남편이 주 운전자로, 내가 가끔찍 바꿔주는 역이었지 이렇게 내가 아이만 데리고 간 적은 없었기 때문에 살짝 긴장이 되었다.
우리집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은 5번 도로를 타고 오랫동안 북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그리로 계속 가면 주도인 새크라멘토까지 가게 되고 우리는 그 전에 서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5번 고속도로는 엘에이를 통과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에는 교통체증이 엄청나다. 그래서 새벽6시에 출발해서 길이 많이 밀리기 전에 엘에이를 지나가기로 했다.
출발은 좋았고, 슁슁 잘 달리고 있었는데, 카풀차선에서 길이 갈라지는 걸 모르고 표지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가 아차 하는 순간 길을 잘 못들었더니 이게 다른 고속도로로 바꿔다는 길이다. 아뿔싸! 다음번 출구로 나가 돌아가려고 하니 네비가 이 길로 가도 5분 차이밖에 안 난다고 한다. 그래? 그렇다면 그냥 가자. 그 길은 57번 고속도로. 그리로 쭉 가다가 210번 고속도로로 바꿔 타면서 보니 앗 여기는 라로님이 사시는 동네! 괜히 반갑다. 라로님 저 이렇게 지나갑니다~
5번을 다시 타러 가는 길은 무척 밀렸다 그 사이 시간이 지나 출근 시간 정체가 시작된 것.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짜증이 좀 났지만 아마 5번은 훨씬 더 밀렸을거야. 그랬을꺼야 라며 신포도 여우가 됨.
엘에이를 벗어나자 길이 다시 쓩쓩 뚫렸다. 엘에이를 지나, 꽤 유명한 놀이동산인 식스 플래그를 지나면 큰 산이 나온다. 그 산을 낑낑대며 (내가 낑낑대는 건 아니지만 운전 중에는 차와 이미 한 몸을 이뤘으므로) 넘고 나면 주유소와 패스트 푸드점들이 있는데 거기에 인 앤 아웃 버거가 있다. 샌프란시스코쪽으로 갈때면 항상 그곳에 차를 세우고 햄버거도 먹고, 기지개도 켜고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자 하면서 자 여기만 지나면 인 앤 아웃 버거가 기다린다고! 하며 달려갔는데 막상 근처에 가서 확인해보니 인 앤 아웃 버거는 10시 30분이 되어야 문을 연다. 흑흑. 우리 너무 부지런했나봐. 그래서 그냥 지나쳐 달리다가 만난 패스트푸드 점에서 간단히 요기만 하고 다시 출발했다.
산을 넘은 뒤 5번 도로는 쭉 펼쳐진 직선도로다. 주변에 과수원이나 농장같은 것이 있을 때도 있지만 보통 황무지라 황량하다. 트럭이 많아 주의해야 하지만 속도가 높은 거 말고는 운전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에 운전대를 둘째에게 넘겼다. 운전한지 일년이 넘기도 했고, 아이가 차분한 성격이라 그런지 상당히 안정적으로 운전을 했다. 황무지를, 가끔 소 떼들을 보면서 방탄소년단과 워너원과 함께 오랫동안 달렸다. 드디어 서쪽으로 가는 고속도로 580번을 만나니 슬슬 주변의 모습이 도시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밥도 먹을 겸, 차에 기름도 넣을겸 도속도로에서 가까운 코스코에서 기름도 넣고 근처 몰에 가서 간단히 점심도 먹었다. 길이 밀리기 전에 출발한다고 새벽부터 서둘렀더니 엘에이에서 좀 밀렸는데도 계획한거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이대로 호텔로 가면 너무 이른데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