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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씨어터 (Dream Theater) 노래 / 워너뮤직(WEA)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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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매니아의 한사람으로서 드림 씨어터라는 밴드를 지켜보면, 대부분의 락팬들과 마찬가지로 현란한 연주력과 그에 우선하는 작/편곡 센스 그리고 심도깊은 컨셉설정에 매료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밴드가 가져다주는 또다른 부러움은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음악적 토양이다.

드림 씨어터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받는 본작조차도 전 세계 판매량이 60만장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이 '프로그레시브 메틀'이라는 장르는 여전히 마이너 음악이라는 꼬리표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15년이 넘는 세월동안 밴드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 그 배경이 바로 미국의 두터운 음악적 토양인 것이다.

천문학적인 미국 음반시장의 규모를 생각하면, 발표하는 음반마다 십만장도 제대로 팔지못하는 그룹이 어떻게 15년 넘게 존속할 수 있는지, 대중음악을 바라보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이전의 레드플러스같은 국내그룹이 15년 동안 국내 음반시장(돈에 죽고 돈에사는 그 살벌한)에서 생존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중음악의 기반이 취약한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이런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미국 락 뮤지션들의 주머니 사정이 우리의 그것보다 홀딱 좋아빠진 것은 아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락 뮤지션은 배고프다. 이렇게 별반 차이없는 경제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판이한 결과가 나타나는데는 다름 아닌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적 풍토가, 선진국으로 갈수록 잘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대가 조성되어 있기에 드림 씨어터는 맘껏 자신들의 재능을 드러낼 수 있었다.

본작은 이들의 전(全) 디스코그래피를 통해 연주력 면에서나 곡의 서정성, 변별력, 작품성과 전체적인 일관성 등등 거의 모든 기준에서 최고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 작품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현재는 팀을 등진 키보디스트 케빈 무어가 재적하고 있었는데, 본작에서 두드러지는 서정적인 어프로치는 거의가 이 멤버의 영향이라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케빈이 참여했던 마지막 작품인 'Awake'이후 드림 씨어터는 뚜렷한 하향세를 그리게 된다.

스래쉬메틀을 연상케하는 폭발적인 헤비리프가 압권인 'Pull Me Under'를 필두로 본작은 그 포문을 연다. 기본적으로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쥐고 있는것은 묵직한 기타리프인데, 베이스 연주와 키보드 연주 역시 '양념'이상의 역할을 해주고 있어 듣는 이의 귀를 조금도 쉬지못하게 만든다. 폭풍같은 성량의 보컬리스트와 중후한 톤으로 곡에 무게를 더하는 드러머까지. 이후 다른 곡들을 추가로 들을수록 실감하겠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다.

국내에는 그저 평범한 락발라드의 하나로 소개되어있는 두번째 트랙 'Another Day'는 락팬들 사이에서는 보컬과 키보드의 하모니보다는 드러머의 다이내믹한 하이햇 연주로 더 잘 알려져있다.

이후 추가되는 곡들은 주로 노래보다는 연주력에 포인트를 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네번째 트랙 'Surrounded' 역시 보컬 멜로디가 강조되긴 하지만 특유의 서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키보드와 기타연주이다.

그외 'Take The Time', 'Metropolis', 'Learning To Live' 등도 멤버들이 기타 키보드 베이스 드럼으로 보여줄수 있는 하모니를 마치 연주력의 한계에 도전하듯이 숨가쁘게 엮어내는, 베스트 넘버들이다.

지난해 한국의 지상파 가요대상을 모조리 휩쓸었던 '이효리쇼크'에 많은 비평가, 그리고 많은 대중들이 공허해했다.

유명한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사회의 지체현상을 타파하는 것은 엘리트가 아니라 기층민중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저급한 대중문화 환경 역시, '파괴'를 실행할 주체는 우리 대중 스스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전쟁을 하듯 힘들게 총칼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 그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그리고 저급한 행동을 일삼는 이들에겐 쓴소릴 조금 적극적으로 해주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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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7집 - Issue
서태지 노래 / 예당엔터테인먼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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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이제 겨우 절반에 도달했을 뿐이다.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아이돌 그룹을 통해 대한민국 문화사에 끼친 영향이 어느정도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4장의 정규앨범을 발매하며 그가 보여준 음악성이 너무도 탁월했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 당시의 음악이 서태지의 모든 역량이 총집결된 작품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이제 서태지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싶은 음악의 한 셋트만 만들어냈을 뿐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기의 음악은 냉정하게 말해서 에피타이저에 지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겨우 만 4년을 조금 넘길 뿐이다. 이제 우리나이로 서른 셋에 이른 서태지. 15년 넘는 그의 음악행보 속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차지하는 시기는 고작 4년 뿐이다. 물론 이 당시의 음악이 대한민국 음악사를 다시 쓰게 할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태지 본인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부분'일 뿐이다.

양현석과 이주노는 악기 연주자가 아닌 댄서였던 까닭에, 서태지는 그들과 함께 락음악을 지속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고로 그룹의 해산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리고 서태지 본인의 음악적 행보를 위해서도 그것은 '반드시 거쳐야만 할' 과정이었던 것이다.

은퇴라는 과정을 통해 서태지는 100%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게 된다. 이후 나온 앨범들은 그 전의 것들과는 달리 앨범 전체가 하나의 색깔을 띠는 일관성을 갖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앨범이 여러장르가 짬뽕된 백과사전식 구성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당시 그가 100% 자기만의 의향대로 음악을 만든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본작. 감성코어라는 다소 부드러운 느낌의 말로 포장되어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도처에서 헤비리프들의 끓어오르는, 굉장히 터프한 앨범이다. 그리고 이 점이 본작이 솔로 1집과 2집의 연장선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책성 강한 어조로 변한 가사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본작에는 분명히 어떤 마무리의 조짐이 보인다. 은퇴 후 서태지는 얼마간의 자유를 맛본게 확실하고, 그것을 은둔, 폭발, 수습 이 세가지 단계로 컨셉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결국 결론은 본작을 통해서도 서태지는 자신만의 음악을 할 뿐...으로 내릴 수 밖에 없겠다. 이미 거대한 락 뮤지션이 되어버린 그에게는 솔직히 이제 자신만의 순수예술이 존재할 뿐이지 대중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이젠 누구도 그의 행보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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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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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떤 문학작품을 읽음에 있어서 '감동'을 기대한다는 것이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버린 걸까. 이를테면 닥터 지바고 류의 '감성'을 현대소설로부터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고지식한 발상인가.

집착 배신 악마. 이 세가지 단어로 요약 될 수 있을 내용을 이처럼 장황하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군데군데 괜찮은 구절이 숨어있는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나는 의심스럽다. 쿳시라는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내면을 파헤침에 있어서...독자는 일관된 흐름을 감지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설령 '도스토예프스키의 감정 자체가 일관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니 틀린것이 아니다'라는 반론이 있을수 있더라도 말이다.

겉으로 주인공은 분명히 도스토예프스키인데, 이상하게도 뭔가 그는 소설속에서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시점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데, 문체 자체로 보면 분명이 전지적 작가시점인데 각 챕터마다 글을 읽고나면 이상하게도 이게 3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나 하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뭔가가 분명하지 못하고 기승전결에 뚜렷한 느낌이 없다.

본래 기승전결이라는 것 자체가 이 소설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라 한다면, 내용자체가 이렇게 길 필요가 없다.

죽은 아들의 젊음, 섹스, 글 이 세가지에의 집착을, 기승전결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 방대한 페이지로 장식(?)한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이 소설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분명히 두고봐야 할 부분이다.

만약 최근 노벨문학상의 선정성향-성향같은게 존재한다면-이 철저히 컬트적이라 한다면..그때는 이런식의 지저분한 감상문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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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의 사나이 그리폰 북스 16
필립 K. 딕 지음, 오근영 옮김 / 시공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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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작을 손에 쥐고 끈기있게 읽게 된 계기는 순전히 어언 10년전에 감상했던, 암울한 SF서정시인 [블레이드 러너]가 던져준 애잔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그 영화와 이 필립 K. 딕이라는 작가의 소설은 별개라는 생각이-읽어보지도 않았음에도-거의 단정적으로 들어버린다.

가뜩이나 얼어붙은 출판업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항상 서점가의 안방자리는 동서양의 고전작품들이 차지하고 있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것들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작품이 시대적,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한, 한마디로 '검증된'결과물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본 소설은 위의 두 한계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마치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봄직한 전형적인 3류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독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동양에 대한 무지와 인종에 대한 집착이다.
본작이 만약 현 시점에 신간으로 나왔다면 아마 일주일도 못가서 온갖 혹평을 들으며 매장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심사과정에서 아예 빛(?)도 보지 못하고 사장되었을지도.

본 소설이 씌여진 시기는 1960년대 초. 대부분의 미국인이 아직은 동양에 대해서라고는 일본에 대해서만, 그것도 막연하고 단편적으로 알고 있을 시기였다. 결국 작가도 무지했던 당시의 한 미국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점은 분명히, 그가 과연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의심을 가져보게 하는 대목이다. 적어도 '작가'라면 동시대의 범인들과는 다른, 최소한의 지성은 지녀야 하는 것 아닐까.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부실함 또한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본작은 일종의 옴니버스, 스핀오프 형식을 띤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서로서로가 조금씩 연결되어있다. 작가의 의도는 소설속의 상황하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을 대비시킴으로서 전체적인 주제를 그려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응집력마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 의도했던 주제는 완전히 퇴색,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서평에서는'불확실하지만 자발적인 자기발견의 길'이라는 긴 말로써 이 옴니버스 소설 각각의 연결고리와 주제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 '자발적인' 부분은 소설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갑작스럽게 등장할 뿐이며 그 발단과 전개의 연결과정은 한없이 취약하다.

어쨌든. 이것이 정말 미국의 SF블록버스터를 양산해내는 베스트 작가의, 베스트 작품이라니 할말이 없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부터 최근의 페이첵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이 필립 K. 딕이라는 작자의 이름이 많이 회자되고 있기에 씁쓸함은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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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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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있어서 '허클베리 핀'이라는 이름은 역시 문학적 이미지보다는 시각적인,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만화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글로 씌여진 실제 작품을 '읽어'보아도, 당시에 우리 세대가 느꼈던 만화적인 이미지가 전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과는 친화적인 요소가 더 많이 느껴졌고, 만화로 제작된 이유또한 이런 부분에서 연유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승전결식의 고전적 작법을 벗어나 에피소드 모음 형식으로 소설을 전개한 점 역시 쪼개어서 방영해야만 하는 TV 만화프로그램과 딱 맞아떨어지는 코드를 가진 부분이다. 더해서 1인칭 주인공 시점, 그것도 갓 열살을 넘은 사내아이에 의해 스토리가 전개된 형식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으로서의 허클베리핀, 그리고 고전 작가로서의 마크 트웨인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얼마간 엄격한 재고가 필요할 듯 싶다.

동시대의 다른 고전문학과 비교했을때 마크 트웨인의 본 작품은 상당부분 메인스트림에 접근해있다. 물론 영미지역의 문화성향이 경험론과 주류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렇게 특기할만한 상황은 못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마크 트웨인의 저작들이 위대한 고전들과 어깨를 같이 한다는 건 역시 곱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마크 트웨인의 문학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헤게모니에 힘입은 바 크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음악생활을 한 베테랑 뮤지션보다 미국 출신의, 갓 만들어진 꽃미남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 수십배는 더 유명해지듯이 말이다.

특유의 토속적인 표현과 문구들이 미국 본토 독자들의 감정을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자극했을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한민국의 독자들까지 이런 부분을 아무런 가감없이 받아들이는 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차라리 그것이 유럽 '대륙'의 고전처럼 번역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유실되는 부분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철학적 깊이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하다.

미국 본토의 사투리를 대한민국의 전라도 사투리에 대응시켜 번역을 시도한 점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사투리보다는 속어부분에 있어서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을 현대화 하겠다는 민음사 측의 취지에 어울리게끔 말이다.

일단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싫든 좋든 계속해서 재평가를 받는다. 대한민국 사회와 그간의 역사에 있어서 미국의 행동이 재조명되고 있듯이, 이들 문화전반에 대해서도 분명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미 미국은 대한민국을 정치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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