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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의 사나이 ㅣ 그리폰 북스 16
필립 K. 딕 지음, 오근영 옮김 / 시공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본작을 손에 쥐고 끈기있게 읽게 된 계기는 순전히 어언 10년전에 감상했던, 암울한 SF서정시인 [블레이드 러너]가 던져준 애잔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그 영화와 이 필립 K. 딕이라는 작가의 소설은 별개라는 생각이-읽어보지도 않았음에도-거의 단정적으로 들어버린다.
가뜩이나 얼어붙은 출판업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항상 서점가의 안방자리는 동서양의 고전작품들이 차지하고 있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것들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작품이 시대적,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한, 한마디로 '검증된'결과물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본 소설은 위의 두 한계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마치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봄직한 전형적인 3류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독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동양에 대한 무지와 인종에 대한 집착이다.
본작이 만약 현 시점에 신간으로 나왔다면 아마 일주일도 못가서 온갖 혹평을 들으며 매장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심사과정에서 아예 빛(?)도 보지 못하고 사장되었을지도.
본 소설이 씌여진 시기는 1960년대 초. 대부분의 미국인이 아직은 동양에 대해서라고는 일본에 대해서만, 그것도 막연하고 단편적으로 알고 있을 시기였다. 결국 작가도 무지했던 당시의 한 미국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점은 분명히, 그가 과연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의심을 가져보게 하는 대목이다. 적어도 '작가'라면 동시대의 범인들과는 다른, 최소한의 지성은 지녀야 하는 것 아닐까.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부실함 또한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본작은 일종의 옴니버스, 스핀오프 형식을 띤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서로서로가 조금씩 연결되어있다. 작가의 의도는 소설속의 상황하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을 대비시킴으로서 전체적인 주제를 그려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응집력마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 의도했던 주제는 완전히 퇴색,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서평에서는'불확실하지만 자발적인 자기발견의 길'이라는 긴 말로써 이 옴니버스 소설 각각의 연결고리와 주제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 '자발적인' 부분은 소설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갑작스럽게 등장할 뿐이며 그 발단과 전개의 연결과정은 한없이 취약하다.
어쨌든. 이것이 정말 미국의 SF블록버스터를 양산해내는 베스트 작가의, 베스트 작품이라니 할말이 없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부터 최근의 페이첵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이 필립 K. 딕이라는 작자의 이름이 많이 회자되고 있기에 씁쓸함은 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