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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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음울하지만, 그것을 서술해 나가는 과정이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고 부분적인 묘사에 있어서도 선이 굵지가 못해 독자에게 분명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웠던 것은 외국소설의 환영이 군데군데서 드러났던 부분이었다. 이런 생각이 왜곡 혹은 비약으로 들릴수도 있겠지만, 어떤 작품을 좋게 평가하건 나쁘게 평가하건 다양성있는 비평은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소설의 한가운데서 언급한 것처럼 카프카도 카프카지만, 조지 오웰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진하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조지 오웰의 소설에다 약간의 로맨스, 그리고 한국의 특수한 시대배경만 조금 입힌것으로 밖엔 소스가 드러나지 않는다. 로맨스라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조지 오웰이 비해서 그냥 단순히 더 언급이 되어있었던 것일 뿐 '사랑'에 관해서도 별달리 감동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좀 더 뜨겁고(외설이 아닌) 격정적인 묘사가 있었더라면 소설은 한층 더 숨가쁘고 살아움직이는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배경이며 스토리 구조가 참 식상하다. 특히 마지막에 명준(주인공)을 그렇게 처리한 것만큼 유치하고 딱한 부분도 없을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고뇌를 그다지 감동적으로 그리지도 못했으면서 갑자기 죽여버렸다.

많은 예술 작품들이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 본 작품이 쓰여졌을 시기또한 이데올로기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아쉬운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다. 사랑에 관하여, 그리고 당시의 상황에 관하여, 좀 더 다채로운 상상을 해보는 것이 작가는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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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 최협 교수의 인류학 산책
최협 지음 / 풀빛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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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이라는 말 자체만 놓고보면 사람들은 굉장히 따분하고 딱딱한 것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편견을 깨고 조금이라도 인류학에 대해 열린 자세로 접근을 해 본 사람이라면, 분명이 이 분야에 제법 흥미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 책은 인류학의 본래 취지와 특성에 굉장히 충실하게 부합하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저자는 문화와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인류학을 소개하고 있어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더더욱 친숙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키스를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저자는 일반인들의 시각에서부터 출발하여 세계 여러나라의 예를 찬찬히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쉽게 풀어놓은 인류학 방법론으로 결론을 맺는다. 즉 대중성과 학문적 깊이 어느 것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역시 인류학 학자답게 사회학, 역사학, 철학, 심리학 그리고 일반 상식에 이르기까지 그 지식의 범위가 굉장히 해박하다. 그러나 더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책을 쓰는 '필자'로서의 센스와 그 자신만의 철학이다. 각 지식들 하나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를 잘 파악하고 그것들을 적재적소에 배치시키는 능력이 탁월해 읽는이로 하여금 굉장한 설득력을 갖게 만든다. 동시에, 책 후반부에 나타나 있듯이 비록 일반적인 내용들이긴 하지만 여러 양심적인 문구들로 본인의 인간적인 철학을 엿보이고 있다.

우리나라같이 인류학의 저변이 취약한 상황에서 이렇게 훌륭한 입문서가 나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딱딱한 학술서적들을 대신해 일반 교양서 형식을 취한 입문서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는데, 본 책은 그 중에서도 퀼리티가 보장된, 참 괜찮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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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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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는 무엇을 할때 뭔가 고삐가 풀려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희한한것이, 도대체 우리의 고삐를 풀리게 한 그 범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을 마음놓고 두들기기 시작하면, 때리면서 계속 더 포악해져서 뒤에 가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고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내가 왜이랬나 하고 내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이러한 증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어린이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흔히 어린이 하면 '순수'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순수라는 말이 '광기의 극단'이라는 말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좀 위험해진다.

어린시절의 경험을 한번 떠올려 보면 소설은 의외로 쉽게, 동시에 충격적이고 심지어는 공포스런 느낌으로까지 다가올 것이다. 어린이들은 자기 컨트롤을 잘 할줄 모른다. 그래서 어른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펼쳐지는 공간은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곳이고, 단 한명의 어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이 집단은 두 파로 나누어지고, 다수파가 소수파를 으르렁거리며 짓누르고 소수집단은 도주한다. 이 상황을 극단적인 양상으로 몰아보면 과연 어떤결과가 나올까?

소설인 굉장히 명쾌하게 마무리된다. 굳이 독자가 생각해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작가가 배려라도 한 것 같다.

쉬운문체, 쉬운 내용이지만, 이미 오래전에 기억의 저편에 묻혀져 있던(즉 어린시절의) 까닭모를 공포감을 작가는 간단하게 상기시켜 버리기 때문에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제법 가슴이 뛸것이라 본다....우리의 어린시절. 우리는 나쁜짓을 많이 했다. 그런데 만약 그때 고삐가 풀려버리고, 그걸 컨트롤 해주는 어른들이 없었다면?

파리대왕 - 순수하고 자연적이며 더없이 원초적이다. 그래서 더더욱 소름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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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혜원세계문학 83
장 폴 사르트르 / 혜원출판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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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멀더는 엑스파일에서 항상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에요'. 이 친구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는 항상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 존재와, 나의 모든 감각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모든 현상들이 과연 진실인지. 이러한 명제가 나는 항상 의문이었다. 저기 저 책, 김치냄새, 시계바늘 소리, 손끝 상처의 통증, 밥맛, 그리고 마음의 감정. 이 모든 감각이, 과연 '내'가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메트릭스의 한 부분처럼 누군가가 입력시킨 신호를 나의 뇌가 센서역할을 할 뿐인 것인지...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주위의 사물들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 예를 들어 예전엔 그저 평범해 보이던 부모님의 방이, 당신들의 사후에는 굉장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느낌의 수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지고 어지러워진다. 어지러움은 다시 메스꺼움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구역질을 한다.

이상이 본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이 너무나도 획일적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사람이 읽은 만큼 이 소설에 접근하는 독자들의 시각도 다양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떠올랐다. 만약 나의 모든 감각들이 메트릭스에 의한 것이거나, 절대신-이것을 메트릭스라 표현해도 좋으리라-에 의한 것이라면, 결론은 하나에 귀착된다. '내 존재의 의미는?' 전혀 대답할 수 없다. 아니, 알 수 없다. 그래서 부조리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도 처음부터 해답(이 세상에 '정답' 혹은 '해답'이 있을까?)을 찾으려는 의도로 이 책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영원한 의문점(존재의 의미)에 대한 조그마한 참고점이라도 발견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애초에 뭔가 구체적인 답안지를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었다. 이 친구의 글이 맞을지도 모른다. 본질에 접근하려고 언저리만 뺑뺑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왔을 뿐이다. 느낀 것이 있다면 '없다'가 아니라 '모르겠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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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7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철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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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이 서양 고전소설들은 왜 하나같이 확실한 결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지 않는지 궁금해지는 경우가 많다. 전체적으로, 더 정확히 말해서 전체의 3/4까지는 아주 재미있었지만, 나는 마슬로바가 네흘류도프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시몬손을 선택하든지 어떻게든 결말이 났으면 했다. 이런 바램이 과연 깊이없는, 유치하기만 한 발상일까...

톨스토이는 글 내용중에서 마슬로바가 '부활'하고 있었다고 적었지만, 분명히 그 '부활'의 촛점은 주인공 네흘류도프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나는 과거의 불행을 딛고 다시 새 삶을 힘차게 시작하는 마슬로바의 모습을 작가가 좀 자세히 묘사해 주었으면 했다. 어디까지나 동정이 가는 존재는 드미트리가 아닌 카츄샤였다. 처음부터 톨스토이는 소설의 주인공, 그러니까 부활의 주체를 남자로 잡았던 것이다. 이건 분명히 작가 자신의 모습이었으리라.

특히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사랑하기에 서로를 포기한다'라는 명제에 대해 독자들로부터 깊이있는 성찰을 유도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견에 대해 별로 찬성하지 않지만, 사랑을 논함에 있어서 '희생'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점에 대해서는 대폭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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