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이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7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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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장기판' 위에서 움직이는 법 <황야의 이리 -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는 나에게 아주 짧은 시선을 던졌다. 그것은 연사의 말을, 나아가 그의 전인격을 비판하는 시선, 아 정말이지 그 의미에 대해서만해도 책 한권은 거뜬히 써낼 만한, 잊을 수 없는 무서운 시선이었다... 그 눈빛은 사실 빈정댄다기보다는 차라리 슬픈 쪽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슬픈 눈빛이었다. 어느 정도는 안정된, 어느 정도는 습관과 형식으로 굳어져버린, 조용한 절망이 눈빛의 내용이었다. 그건 절망이 내뿜는 밝은 빛으로 허식에 가득찬 연사의 인간성을 관통했을 뿐 아니라, 그 순간의 상황을, 청중의 기대와 기분을, 어딘가 젠체하는 그 강연의 제목을 비꼬아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야의 이리의 눈빛은 우리 시대 전체를, 바쁘게 돌아가는 모든 부질없는 짓거리들을, 모든 허망한 노력, 모든 허영을, 망상에 가득 찬 천박한 정신의 모든 표피적인 장난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아! 불행히도 그 시선은 더욱 깊어만 갔다. 우리의 시대, 우리의 정신, 우리의 문화와 궁핍과 절망보다도 더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시선이었고, 어쩌면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한 사상가가 인간의 품격이라는 것에 대해, 나아가 인생의 의미 자체에 대해 품고 있는 회의를 한 순간에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시선이었다." -18p

 

 

헤세의 작품의 성격이 나뉘어지는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 있다. 1920년대 헤세 그리고 많은 작가들은  계몽주의가 팽배하던 독일과 혼란스러운 세계 안에서 자아에 대해 강하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데미안>, 그리고 두번째로 이 <황야의 이리>라는 책을 보면  그 전의 서정적인 작품(모범적이고 교훈적인 작품)들과는 다르게 보다 헤세가 정신적인 혼란과 고통을 서술하고 존재와 문명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 면을 확인 할 수 있다. 책은 편집자의 서문과 하리할러의 수기로 되어있다. 하리할러의 수기 옆에는 '미친 사람만 볼 것'이라고 적혀져있다. 혼란스러웠다. 리뷰를 쓸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다. 하리할러의 수기, 이 황야의 이리가 남긴 글들은 의식에 따라 이야기가 서술되면서 그 의식속으로 쉽사리 내가 파고들 수 없었다. 특히나 하리할러의 수기 중 '황야의 이리론'은 도대체 집중이 안되어 입으로 읽으면서 넘어갔더니 다행히 그럴듯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헤세의 작품을 여러 권 읽고난 후 이 <황야의 이리>라는 제목을 발견했을 때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여 가슴이 뛰었었다.  그 당시 아주 과감하고 문제작이었던 <황야의 이리>는 그야말로 나에게 굉장한 작품이다. 어쩜 이렇게 감정과 의식이란 놈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인상적인 구절들이 많아서 다소 지저분한 리뷰가 될지도 모른다..)

 

 

 

* 담아두기

 


하리 할러는 개성적 인간이다. 자신을 황야의 이리라고 지칭하는 이 인물은 또한 흔히 말하는 시민들의 가벼운 사회에 들어갈 수 없는 일종의 사회 부적응자이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으로 그 사회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 한 쪽 구석에서는 그 사회에 대한 동경이, 그 사회의 존재로써 끼어있고 싶은 욕망이 숨어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마술극장'과 세계로서의 연결자 헤르미네를 만나고 (헤르만의 여자이름, 헤르미네는 헤세의 생각이 투영된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회의 쾌락과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하리할러의 내면에는 '인간과 이리, 즉 <사상과 감정의 문화와 잘 길들여진 승화된 본성의 세계>와 <충동과 야성과 잔인함의 어두운 세계, ㅡ승화되지 않은 거친 본능의 세계>가 동거하고 있다.' 그 혼돈의 내면안에서 그는 고민한다.

 

 

 

 

 

이 사내의 고통스런 병은 그의 본성의 어떤 결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그의 천부의 재기와 능력이 너무나 풍요로워서 좀처럼 어떤 조화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나는 할러가 고통의 천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니체가 말한 의미에서 무한하고 무서운 천재적인 고통의 능력을 내면에서 길러왔던 것이다. 또한 나는 그의 이러한 염세주의의 토대는 세상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자기 경멸이라는 것도 알았다. - 20p

 

과거의 유럽, 과거의 참다운 음악, 과거의 참된 문학을 잘 알고 존중하는 우리들은, 내일이면 잊혀지고 조롱당할, 어리석고 머리가 복잡한 소수의 노이로제 환자에 불가한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던 것, 우리가 정신, 영혼, 아름다움, 성스러움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멸한 한갓 허깨비에 불과하며, 단지 바보들이나 아직도 그런 것들이 살아 있고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실재한 적은 한번도 없지 않을까? 우리 같은 바보들이 애써 얻고자 하는 건 어쩌면 항상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건 아닐까? - 56p

 

 모래와 자갈 사이에서도 작은 행복의 꽃은 핀다. 황야의 이리도 그랬다. 그가 대체로 몹시 불행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그가 그들을 사랑하거나 그들이 그를 사랑하는 경우에 말이다. 왜냐하면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 항상 그의 한 면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섬세하고 이지적이고 괴팍한 인간으로 사랑하다가 갑자기 그의 속에 있는 이리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실망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하리는 누구나 그렇듯이, 전(全) 존재로서 사랑받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가 사랑을 받고 싶어한 바로 그 사람들에게 이리의 모습을 감추고 기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황야의 이리는 자기 자신의 이중성과 분열성을 그가 접촉한 모든 타인들의 운명 속에 불어 넣었던 것이다."(p62)

 

 

 

 

 

 

우리의 황야의 이리도 가슴 속에 두 개의 영혼을 품고있다고 믿고, 그래서 자신의 가슴이 이미 몹시 좁아졌다고 생각한다. 가슴, 즉 육신은 언제나 하나지만, 거기 살고 있는 영혼은 들도 다섯도 아니다. 영혼은 무수하다 인간은 수백 개의 껍질로 된 양파이고,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다. - 85p

 

황야의 이리는 죽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손으로 그 지긋지긋한 현존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지 않으려면 새로운 자기 성찰이라는 죽음의 불에 용해되어 자신을 변화시키고, 가면을 찢어버리고, 새로이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 이런 과정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도, 미지의 것도 아니었다. - 95p

 

그날 나는 다시 우연이 운명임을, 내 존재의 폐허가 신의 파편임을 알았다. 내 영혼은 다시 숨쉬기 시작했고, 내 눈은 다시 시력을 되찾았다. 스스로 형상의 세계에 들어가 불멸의 존재가 되려면, 흩어진 형상 세계를 함께 모아 저 하리 할러의 <황야의 이리>의 삶을 전체로서 형상으로 고양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나는 잠시나마 달아오르는 가슴으로 느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삶이 추구하고 시도하는 목표가 아니었던가? - 201p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유희를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 할 수 있겠지 - 308p


 

하리할러는 시대의 교차로에서 헤매고 있는 방랑자이다. 시대의 변화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갈피를 잃은 불쌍한인간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 또는 과거의 사람들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실제로 헤세는 이 작품을 쓸 당시 가족과의 관계나 우울증 때문에 정신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낼 하리할러의 말을 통해서 자신 또한 희망적인 삶을 그려낸다.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일까. 진정한 '나'라는 게 무엇일까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게 무엇일까? 내 안에 시민적 영혼 그리고 이리의 영혼 또는 그 무엇들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통일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은 수없이 많은 생각의 뿌리인 영혼을, 그 영혼들을 충돌하지는 않게 마음 속 파도에서 떠다니는 것들 처럼 그렇게 남겨둔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저 유머와 얘깃거리를 통해 의미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을 가르고, 우연과 운명을 갈라 어떤 곳으로 나아가야 할지 선택하는 것. 그렇게 해서 심각하지 않게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은 하리가 이제부터 나아갈 장기말 놀이의 winner로 가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헤세는 이 혼돈의 자아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머'라는 키워드를 던졌지만 보다 상세한 것들에 대해서는 다음 작품인 <유리알 유희>에 집약해 놓았다고 한다. 어떤 이야기로 도움을 줄지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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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평전 - 부치지 않은 편지
이윤옥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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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 <김광석 평전 - 이윤옥>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마루에 프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어든

살아 이 한 몸 썩어져 이 붉은 산하에 살아 해방의 횃불 아래 벌거숭이 산하에...."

 

故 김광석이 처음으로 인정을 받아 홀로 부른 노래 '김지하의 녹두꽃'. 김광석의 음악인생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함께 흘러왔다.  

"우리가 김광석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는 그런 그의 젊음의 여정이 우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의식에 대한 의무감과 더불어 젊음의 혈기를 풀어놓고 싶다는 욕구, 하지만 대부분 결국은 한쪽에 치우치거나 숨겨버린다. 김광석은 그야말로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려'했던 솔직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노래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그러한 음악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음악에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사회변혁적인 노래로 대중을 일깨우려는 다른 가수들의 노력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각할 거리를 주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노래의 힘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민중가요를 부르던 그가 대중가요의 길로 들어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나는 김광석 노래를 참 좋아한다. 부모님 시대의 가수였고 어쩌다 흘러나오는 노래에 그렇게 열광하지는 않았었지만

성인이 된 지금, 언제부터인지 김광석의 목소리에 빠져버린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 김광석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다... 하는 이야기도 요즘들어 흘러나오고

노래를 들으면 어딘가 구슬프고 무거운 인생을 산 것 같은 느낌에 도대체 이 분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궁금해졌다. 그런데 한가지 착각이 있었다. 김광석의 유명한 노래는 모두 김광석이 작곡했는 줄 알았다. 그런 만큼 마치 자신과 한몸처럼 또는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그는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보니 여러 유명 작곡자들이 만든 노래라고. 물론 <일어나>처럼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도 많지만 (역시 체념적인 사회에 희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모든 노래에 감정을 담아서 부를 수 있었던 건, 그가 노랫말이 특별히 마음에 드는 노래들을 선택하곤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김광석의 유명한 노래 중 하나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는 녹음 당시 가사의 '막내아들 대학시험'이라는 대목에서 김광석의 목이 메어와 계속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은 술먹고 녹음했다는 이 노래.

 

 

 

 

 

책을 읽고나니 참 솔직하고 재치도 있고 때로는 우울한,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밤의 창가에서'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데 신인 PD와 함께 '자신들이 들려주고 싶은 노래'위주로만 진행했다는 줏대있는 방송이었다고 한다.

청취자들의 신청곡을 무시하면서 '이 곡은 다른 프로그램에 많이 나오니까 그 방송 들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며... 하하

무려 천번을 넘게 했었던 공연. 그 공연 동안 만류하는 관계자들을 무시하고 관객들을 향해 부르고 싶은 만큼 원없이 노래를 불렀던 가객.

 

사람들은 그의 슬픈 노래를 좋아한다. 나또한 그렇다. '그날들', '너무 아픈 사랑은....','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그도 사랑했다는 '먼지가 되어'.

 그치만 김광석은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노래보다 희망적이고 밝은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언젠가 그는 무언지 모를 상실감에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 불안한 마음이 가득한 채로 삶을 지냈던 김광석. 그는 우울하고 감상적인 노래에 빠져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결국 왜인지 모르게 방에서 전깃줄로 삶을 마감했다 . "누군가 살아가면서 삶에 비극적인 요소들은 갖고 있다. 그것이 삶의 어느 순간에 뛰쳐나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또한 비극이다. 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 비극을 김광석은 극복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행복하세요'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본인은 행복한 삶을 선택하지 못했다." -204p

 

 

 

 

유명세를 치르고 나서 하루하루 바쁜 나날들을 보내면서 그는 '잘하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가수로서도 가장으로서도 자신의 역할들을 다 잘해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고.... 팬들에게도 아저씨라 불릴정도로 친근하고 장난스럽던 그도

조금은 내려놓은 삶을 살았다면 행복했을까? 그 시대로 돌아가 나도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쫓아다녀보고 싶다.

해맑게 눈웃음 짓고 있는 김광석의 사진이 떠오른다. 오늘은 그의 노래를 듣고 자야지.

 

"우린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은 김광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닮아 있는 그의 노래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이해해줄 것 같아 인간적으로 끌리기도 했다. 김광석에게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 이었듯이 남아있는 우리에게도 그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이다" -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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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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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산 수도원 72개의 지하 방에서 엄청난 분량의 벽서가 발견된다. 사치스러울 만큼 장식적 서체로 필사된 [켈스의 책]에 비견될 만한 화려한 장식과 신비로운 그림들. 천산 벽서에 숨은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깊이 파헤칠수록 역사와 사건은 미궁으로만 빠져드는데.. 천산 벽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개인들의 굴절된 욕망과 왜곡된 역사의 정치권력, 그리고 비극의 희생양이 마침내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처음에 이 책을 가지고 '장미의 이름'에 비견되는 소설이라는 카피를 보고서는 추리소설을 상상했었다. 뭐, 수도원이란 배경은 같았으니까. 그렇지만 <지상의 노래>의 배경은 수도원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또한 이 장미의 이름을 보고 수도원 안에서의 이야기만 다뤘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도원의, 정확히 말하면 수도원의 <켈스의 책> 벽서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았다. 소설에서는 이 '벽서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위해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벽서에는 온갖 것들이 집결해있다. 70년대의 굴절된 사회와 사람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그 모든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각 개인의 감정들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

 

 

 


라면은 그의 내부에서 털어낼 수 없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원료로 작용했다....아무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관련은 서울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과 뉴욕을 덮친 태풍사이의 관련만큼 비정형적이고 무의식적이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태풍은 일어날 것이다. 혹은 나비가 수만 번 날갯짓을 해도 태풍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태푸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 될 것이 없는 사소한 현상들이 태풍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풍을 유발한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40p

 

연희가 없어지자 그의 마음은 불안해졌고, 걷잡을 길이 없어졌고, 그리하여 연희에 대한 자기 안의 감정의 정체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게나마 생겨났고, 그러나 그것을 직시할 수는 없었고, 직시할 수는 없었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고, 그 때문에 더 큰 혼란과 죄의식에 사로잡혔고, 그러다가 마침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박 중위를 지목함으로써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식과 혼란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냈다. - 87p

 

그것은 성경이 큰 거울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비추지 못하는 것, 비출 수 없는 것은 없다.......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형제는 거울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형제는 성경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것이다. - 111p

 

그들은 세상을 버리고 떠나왔지만 세상은 그들을 잊지 않고 찾아와서 과거의 시간을 불러냈다. 너는 누구냐? 하는 질문 앞에서 그들은 당황했다. - 140p

특히나 주목했던 점이 이 감정묘사 부분이었다. 굉장했다.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듯 했다. 잠시 멈출수도 없을정도로 내리치는 문체들에 겁을 먹었다. 그치만 어느새 빠져들어 읽고 있었다. 나는 이승우 작가의 작품을 이 지상의 노래로 처음 접하였는데 여러 곳에서 들어온 정보로는 이 분의 책에서는 신앙적인 부분이 대체로 많이 보여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소설자체도 '신'의 시점아래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고, 모든 일들이 생겨나고, 모든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누군가에게는 이 종교적인 색채가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그닥 신앙적인 사람이 아닌 나에겐 불편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다뤄지는 성경과 맞물린 이야기들, 특히 '후'라는 인물의 삶과 너무나 닮은 성경의 압살롬 이야기는 죄의식에 대해서 다룬 이 소설의 무게를 더욱 묵직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상의 노래'라는 제목도 묘하게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나온다. 작가는 이 제목을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또 이 제목으로 쓴 다른 글도 있을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얼마전 있었던 북콘서트에서 만난 작가 이승우는 지상의 노래라는 제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상'이란 단어는 오래된 느낌을 주지만 '땅'이란 말보다 관념적이다. 이 세상의 불완전함을 상기시키는 느낌이랄까. '노래'는 모든 것을 '0'으로 만드는 느낌이다. 사랑이든 기도든 무엇이든 '0'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즉, 불완전한 세상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집어넣는 느낌이 담긴 제목이다." 라고.

 

 

평생을 들여서 해야할 일을 한순간에 해치워 버린 후에 남는 생의 공허를 어쩔 것인가.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은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한다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삶 때문이다. 일을 위해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끝남과 동시에 삶이 끝나기도 한다. 일을 끝냈으므로 삶을 끝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삶을 끝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일을 끝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아니다. 과제를 해치운 다음의 공허를 피하기 위해 그가 일부러 과제를 소홀히 하거나 미루거나 회피했다는 뜻은 아니다.... 선명하게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살기 위해 그 일을 필요로 했다. 그의 삶을 위해 그 일은 한없이 연장되어야 했다. -245p

 

책 속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사람이 '후'라는 인물인데, 삶에서 죄의식으로 작용했던 그 평생의 일을 수행하는 과정으로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 밖에도 70년대 독재자였던 장군아래 충성하던 한정효, 그리고 비밀을 알고있는 '장'과 '차동연 교수'등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개인의 욕망속에 치우쳐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벽서의 존재와 맞닿아있다. '후'가 먹었던 라면과 같이, 그런 사소하고 우연같은 상황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벽서는 시대의 것이었다. 그 벽서가 있었던 수도원은 시대의 아픔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시대의 공기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 속으로 스미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빚어낸다 존재를 만드는 것은 공기다. 공기를 마시고 살면서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사는 것처럼 살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의 수인이다. - 150p


 

 

이승우 작가는 원래 자신이 책의 유일한 독자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지상의 노래>를 쓰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작가와 연결될 수 있는 '책'을 읽고 공감하는 것에 오직 기쁨을 느끼고 있지만 작가 또한 그런 공감을 알아주고 있다면 독자로서 감사할 뿐이다. 작가의 이름을 말하면 다소 낯설게 들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치만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책을 내셨고 그 중 <생의 이면>은 외국에서도 낭독회를 할정도로 인기가 있는 작품이라 한다. 이승우라는 작가의 첫 책을 읽은 지금, 작가의 또다른 책들을 속속들이 더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설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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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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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이야기가 때론 더 즐거운 법!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무라카미 하루키>#42

 

 

 

 

 
두달전 이 책에 대한 리뷰들이 쏟아져나올때마다 귀엽고 예쁜 제목에 눈에 담아놓았었다. 나에게 하루키의 에세이는 처음이었고 (뭐 이렇게 처음인 게 많은가.... ㅎㅎ) 왠지 '소설처럼 의미깊은 말들이나 무거운 주제가 가득 들어있을 것 같다!' 했는데 어라? 이건 왠지 너무 가벼운 느낌이다.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서 바로 읽은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낯설고 새롭다. 하루키하면 생각나는 소설들이 깊게 파고들어야 될 책인 반면 이 에세이는 기분 좋아지는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알고보니 20대 여성들을 독자로 둔 '앙앙'이라는 잡지에 연재하던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글을 모아둔 것인데 (책도 나왔었다.) 이것이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이다. 일종의 칼럼, 잡지 에세이 같은 느낌인것 같다.  제목 참 귀엽다.

 


  

채소의 기분.

 

 


  

"에세이라는 것은 내 경우, 본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미도 아니어서 누구를 향해 어떤 스탠스로 무엇을 쓰면 좋을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대체 어떤 걸 쓰면 좋을까 하고 팔짱을 끼게 된다. 그렇긴 하지만 내게도 에세이를 쓸 때의 원칙, 방침 같은 건 일단 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뭐가 자랑에 해당하는지 정의를 내리긴 꽤 복잡하지만).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물론 내게도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 그걸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진다)"

 

그가 본업인 소설보다 쓰기 어렵다는 에세이.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속에서 하루키는 원래부터 쓸데없는 이야기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가끔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가 때론 더 즐거운 법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받는 사람에 따라 의미를 부여할 수도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벼운 말들. 가끔은 책보다는 잡지속 글들을 보고 싶은 마음과도 같을지도.. 사실 일본어를 한글로 가져오게 되면 왠지 특별한 느낌이 든다. 아직은 일본도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번역의 특징일수도, 하루키의 문체때문일 수도 있겠다.

 


 


 

"여러 체형의, 여러 생김생김의, 여러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당히 섞여

적당히 느슨하게 사는 세계가 정신건강상 가장 바람직한 것이구나 싶다."

 

사실 작가들이 무언가 글을 쓰는 소재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치열하게 다니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그들은 사소한 것들에서 생각을 뽑아내는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떤 하나에 대해 남들보다 특별한 생각을 하는 것. 너무나 고만고만하게 평범한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부러운 능력이기도 하다. (너무 특별하면 또 안되겠지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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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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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콘서트의 행사에서 이병률 시인을 만난적이 있다.

조금 특이하기도 하고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우물우물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똑부러지던 모습.

수많은 시간과 세계를 읽는 것 같던 여행에세이 대신에 이번은 그의 본업인 '시'를 읽었다.

그의 시는 아름답게 빛나고 가끔은 날카롭고 가끔은 독특한 생각에 재밌기도 하다. 그리고 솔직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3개의 시를 담아보았다.

 

 

찬란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않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찬란, 참 문학적인 단어이기도 하고 평소엔 잘 안쓰는 단어이다.

눈부시고 화려한 뜻의 단어인 '찬란'.

찬란함에 대한 시인데 그 빛나는 단어의 찬란한 것들이 뭔가 애절하고 슬퍼보이기도 한건 왜일까?

 

 

있고 없고

                                                      이병률

 

혼자 보내서 어떡하나 했다

가는 것은 가는 것이나

가고 마는 것은 또 어쩌나 했다.

 

 

 

사과나무

                                            이병률

 

사과나무를 사야겠다고 나서는 길에 화들짝 놀란다 어디에 심을지 아니면 어디에 기대놓을지를 생각하다 혹 마음에 묻으려고 하는건 아니냐고 묻는다 이 엄동설한에 사과나무는 뭐하게요 없다고 말하는 화원의 사내는 사과나무 허리 같은 난로를 껴안고 있다

 

나에게 혹 웅덩이를 파고 싶은 건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 웅덩이에다 세상 모든 알들을 데려다 버리고 욕 묻은 손들을 데려다 숨기면서 조금 나아지려는 게 아니냐며 나는 난로 대신 두툼한 머리 언저리를 감싼다

 

사과나무를 사려했던 것은 세상 모든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만유인력을 보고자 했던 것이므로 누군가 만유인력을 알아차렸다는 그 자리로 간다 사력을 다해 간다

 

숲과 대문, 그 사이에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누구나 저 사과나무한테 빚진 게 있다 어디 먼데서 오는 길이냐고 물어오지도 않고 낙과들을 지키고 서 있는 나무는 장엄하였다 그 나무 아래 누군가가 내려놓은 수많은 가방들이 있었다 누구나 들여놓아야할 가방이 있다

 

문득 누군가 만유인력을 알아차렸다는 그 나무 밑에 함부로 혼자 있고 싶은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  

"지나는 것은 지나는 것이리. 보이지 않는 것은 애써 덮은 것이리."

 

 

 

시인의 생애 속에서가 아니라 시인의 영혼 속에서 우리는 시인을 찾을 수 있다. - F.G 로르카

 

여행수필가의 이병률 작가도 멋지지만

시인의 삶 속에서의 작가는 그보다 더 솔직한 모습이어서 정감이 간다.

그가 끄적인 글들과 멋진 사진, 그리고 역시 시도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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