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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천산 수도원 72개의 지하 방에서 엄청난 분량의 벽서가 발견된다. 사치스러울 만큼 장식적 서체로 필사된 [켈스의 책]에 비견될 만한 화려한 장식과 신비로운 그림들. 천산 벽서에 숨은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깊이 파헤칠수록 역사와 사건은 미궁으로만 빠져드는데.. 천산 벽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개인들의 굴절된 욕망과 왜곡된 역사의 정치권력, 그리고 비극의 희생양이 마침내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처음에 이 책을 가지고 '장미의 이름'에 비견되는 소설이라는 카피를 보고서는 추리소설을 상상했었다. 뭐, 수도원이란 배경은 같았으니까. 그렇지만 <지상의 노래>의 배경은 수도원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또한 이 장미의 이름을 보고 수도원 안에서의 이야기만 다뤘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도원의, 정확히 말하면 수도원의 <켈스의 책> 벽서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았다. 소설에서는 이 '벽서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위해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벽서에는 온갖 것들이 집결해있다. 70년대의 굴절된 사회와 사람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그 모든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각 개인의 감정들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
라면은 그의 내부에서 털어낼 수 없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원료로 작용했다....아무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관련은 서울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과 뉴욕을 덮친 태풍사이의 관련만큼 비정형적이고 무의식적이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태풍은 일어날 것이다. 혹은 나비가 수만 번 날갯짓을 해도 태풍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태푸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 될 것이 없는 사소한 현상들이 태풍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풍을 유발한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40p
연희가 없어지자 그의 마음은 불안해졌고, 걷잡을 길이 없어졌고, 그리하여 연희에 대한 자기 안의 감정의 정체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게나마 생겨났고, 그러나 그것을 직시할 수는 없었고, 직시할 수는 없었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고, 그 때문에 더 큰 혼란과 죄의식에 사로잡혔고, 그러다가 마침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박 중위를 지목함으로써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식과 혼란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냈다. - 87p
그것은 성경이 큰 거울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비추지 못하는 것, 비출 수 없는 것은 없다.......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형제는 거울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형제는 성경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것이다. - 111p
그들은 세상을 버리고 떠나왔지만 세상은 그들을 잊지 않고 찾아와서 과거의 시간을 불러냈다. 너는 누구냐? 하는 질문 앞에서 그들은 당황했다. - 140p
특히나 주목했던 점이 이 감정묘사 부분이었다. 굉장했다.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듯 했다. 잠시 멈출수도 없을정도로 내리치는 문체들에 겁을 먹었다. 그치만 어느새 빠져들어 읽고 있었다. 나는 이승우 작가의 작품을 이 지상의 노래로 처음 접하였는데 여러 곳에서 들어온 정보로는 이 분의 책에서는 신앙적인 부분이 대체로 많이 보여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소설자체도 '신'의 시점아래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고, 모든 일들이 생겨나고, 모든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누군가에게는 이 종교적인 색채가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그닥 신앙적인 사람이 아닌 나에겐 불편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다뤄지는 성경과 맞물린 이야기들, 특히 '후'라는 인물의 삶과 너무나 닮은 성경의 압살롬 이야기는 죄의식에 대해서 다룬 이 소설의 무게를 더욱 묵직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상의 노래'라는 제목도 묘하게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나온다. 작가는 이 제목을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또 이 제목으로 쓴 다른 글도 있을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얼마전 있었던 북콘서트에서 만난 작가 이승우는 지상의 노래라는 제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상'이란 단어는 오래된 느낌을 주지만 '땅'이란 말보다 관념적이다. 이 세상의 불완전함을 상기시키는 느낌이랄까. '노래'는 모든 것을 '0'으로 만드는 느낌이다. 사랑이든 기도든 무엇이든 '0'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즉, 불완전한 세상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집어넣는 느낌이 담긴 제목이다." 라고.
평생을 들여서 해야할 일을 한순간에 해치워 버린 후에 남는 생의 공허를 어쩔 것인가.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은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한다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삶 때문이다. 일을 위해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끝남과 동시에 삶이 끝나기도 한다. 일을 끝냈으므로 삶을 끝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삶을 끝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일을 끝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아니다. 과제를 해치운 다음의 공허를 피하기 위해 그가 일부러 과제를 소홀히 하거나 미루거나 회피했다는 뜻은 아니다.... 선명하게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살기 위해 그 일을 필요로 했다. 그의 삶을 위해 그 일은 한없이 연장되어야 했다. -245p
책 속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사람이 '후'라는 인물인데, 삶에서 죄의식으로 작용했던 그 평생의 일을 수행하는 과정으로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 밖에도 70년대 독재자였던 장군아래 충성하던 한정효, 그리고 비밀을 알고있는 '장'과 '차동연 교수'등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개인의 욕망속에 치우쳐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벽서의 존재와 맞닿아있다. '후'가 먹었던 라면과 같이, 그런 사소하고 우연같은 상황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벽서는 시대의 것이었다. 그 벽서가 있었던 수도원은 시대의 아픔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시대의 공기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 속으로 스미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빚어낸다 존재를 만드는 것은 공기다. 공기를 마시고 살면서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사는 것처럼 살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의 수인이다. - 150p
이승우 작가는 원래 자신이 책의 유일한 독자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지상의 노래>를 쓰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작가와 연결될 수 있는 '책'을 읽고 공감하는 것에 오직 기쁨을 느끼고 있지만 작가 또한 그런 공감을 알아주고 있다면 독자로서 감사할 뿐이다. 작가의 이름을 말하면 다소 낯설게 들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치만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책을 내셨고 그 중 <생의 이면>은 외국에서도 낭독회를 할정도로 인기가 있는 작품이라 한다. 이승우라는 작가의 첫 책을 읽은 지금, 작가의 또다른 책들을 속속들이 더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설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