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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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종종, 변화를 위한 누군가의 작은 노력에 대해 폄하하곤 한다. “뭐 그렇게까지 해, 너 하나 바뀐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헛수고야,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잊힐 텐데 뭣하러 건드려서는.” 그들은 과정을 비웃고, 작은 실패가 있더라도 모든 변화가 끝난 것처럼 여긴다. 다시는 성공이 다가오지 못할 것처럼.

엄격한 가톨릭 교리와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큰 사업체와 진보 성향의 언론사를 소유하면서도 독실함과 베풂을 잃지 않아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엄격한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이념과 종교적 교리를 세뇌시키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끔찍한 폭력을 휘두른다. 그는 폭력을 휘두른 다음, 마치 자신이 하지 않은 것처럼 가족을 보듬기도 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어머니는 순응하고, 주인공 캄빌리와 오빠 자자 또한 대부분의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지만, 우연히 고모가 사는 ‘은수카’를 방문한 후 달라지는 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는 여타 성장소설과 비슷한 플롯이라 여겨진다. 화자인 ‘캄빌리’는 마음으로는 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쉴 새 없이 자신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점검하고 판단한다. 계속해서 예상외의 행동을 보이는 오빠의 모습 또한 긴장하며 살핀다. 아버지의 존재는 늘 소녀의 뒤에 있다.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또한, ‘나이지리아’라는 우리에게 생소한 국가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폭력의 피해를 당하면서도 일시적인 도움만 받을 뿐, 결국엔 아버지의 아래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앞에서 언급한, ‘작은 실패를 실패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완벽한 실패담처럼 보일 수도 있는 소설이다. 곳곳에 사회적 한계가 존재하고, 결말은 시원치 않다. 이를테면, 그나마 진보적이라 보였던 이모의 언어에도 뿌리 깊은 관습이 있고,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난 캄빌리는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된 신부님의 말을 마치 하느님의 말씀인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도 한다. 조금의 변화를 띈 어머니와 오빠, 캄빌리의 미래 또한 불투명하다. 노력 끝에 비자를 받아 미국이라는 새 땅에 정착한 이모 가족의 미래도 어떠할지 상상할 수 없다.

주인공들은 시시각각 갈등한다. 자유를 부르짖다가, 수그러들고, 웅크렸다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그저 부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 속 가족의 모습은 그저 개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과하게 말하면 조금 더 확장된 시민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주저하고, 고민하고, 망설이는 작은 마음은 하나하나 모여 언젠가 큰 불꽃이 된다. 무엇보다 특별한 빛과 색을 띄는 히비스커스가 된다.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27쪽)

내가 꿈꾸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려고 검은 미사보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콘로 한 가닥을 잡아당겼다. 왜 그들은, 오빠와 어머니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아버지는 방금 오빠가 말대꾸를 하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일까?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서 나들이용 빨간 원피스를 갈아입으러 위층으로 향했다. - P18

"누니에 음." 이페오마 고모가 부르자 어머니가 돌아봤다.

몇 년 전 이페오마 고모가 우리 어머니를 "누니에 음"이라고 부르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내 아내’라고 부른다는 데 경악했다. 내가 묻자 아버지는 그것이 불경한 전통, 결혼은 남자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의 잔재라고 말했다. 나중에 어머니는, 내 방에 단둘이 있을 때였는데도,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아버지의 아내이니까 고모의 아내이기도 한 거야. 그 호칭은 고모가 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란다." - P96

그리고 벨트가 멈추자 아버지는 자기 손안의 가죽을 가만히 쳐다봤다. 얼굴은 구겨졌고 눈꺼풀은 축 처졌다. "왜 죄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아버지가 물었다. "왜 죄악을 좋아하는 거야?"

어머니가 아버지에게서 벨트를 받아 식탁에 놨다.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홱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 P132

"겁낼 것 없어, 은네. 재밌을 거야." 이페오마 고모가 말했고 나는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고모를 돌아봤다. 고모의 코는 뾰루지처럼 작은 땀방울로 뒤덮여 있었다.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고모를 보고 어떻게 내 주위에 저런 기분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금 내 속에는 불길이 타오르는데, 공포와 희망이 뒤섞여 내 발목을 움켜잡는데. - P215

하지만 고모도 어머니와 나한테는 편지를 보낸다. 두 개의 직업, 전문대의 일자리와 약국 또는 (미국인들 표현에 따르면) 드럭스토어의 일자리에 대해 쓴다. 커다란 토마토와 값싼 빵에 대해 쓴다. 하지만 대개는 그리운 것과 희망하는 것에 대해 쓴다. 과거와 미래에 살기 위해 현재는 외면하는 사람처럼, 때로는 고모의 편지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다가 잉크가 번져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을 때도 있다. 한 번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민주 정치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오늘날의 민주 국가들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처럼. 그것은 걸음마를 떼려다 엉덩방아를 찧는 아기에게 가만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그 아기를 앞질러 가는 어른들은 기어 다녔던 시절이 없는 것처럼.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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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
필립 스테드 지음, 에린 스테드 그림, 김경주 옮김, 마크 트웨인 원작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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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동화를 읽습니다. 예전에 동화를 잘 몰랐을 땐 편견이 있었어요. 이야기 흐름이 비슷하게 흘러간다던가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던가 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세상에 수많은 가지각색 책들이 있는 것처럼, 동화도 생각보다 꽤 다양한 방식으로 쓰인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권선징악에 맞춰진 행복한 동화도 있었고, 어린이들이 봐도 괜찮을까 싶은 어두운 동화들도 있었고, 역사적 사실을 가감 없이 다룬 동화들도 있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을 뿐,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달시켜줄 수 있는 책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 책 또한 꽤 독특한 느낌이 드는 동화입니다. 마크 트웨인 원작이라고 적혀 있지만 리메이크나 재출간이 아니라, 미완성된 동화를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완성한 방식이에요. 1879년에 작가 ‘마크 트웨인’이 두 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는 대략 16쪽의 스토리로 과거를 건너 현재로 오게 되었습니다. 매력적이고 신비스럽지만 완성되지 못했던 동화는 이야기의 얼개를 유지하며 두 작가들에 의해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다시 만들어졌지요. 이러한 사연에 따라 이 동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점은 책의 중간중간 과거의 작가 (마크 트웨인)와 현재의 작가 (필립, 에린 스테드)가 가상으로 대화하며 해설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원작자에게 존경을 표하는 동시에, 툭툭 던지며 장난스레 대화하는 말투 덕분에 그림책의 이야기가 더욱 산뜻하고 독특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동화의 초반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소년 ‘조니’에게 갑작스럽게 슬픈 일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닭 ‘전염병과 기근’을 시장에서 팔아오라는 할아버지의 호통이었습니다. 포악한 왕이 지배하는 세상은 치열하고, 어른들은 각자의 삶만 바라보았지요.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치이고 치이던 조니는 눈물을 흘렸고, 그 앞에 우연히 한 노파가 나타나 ‘한 푼만 달라’며 구걸을 하게 됩니다. 허름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얼굴을 발견한 소년은 그의 친구 ‘전염병과 기근’을 행복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노파에게 닭을 선물하지요. 소년과 진정한 친구 닭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책 제목에 쓰인 ‘올레오 마가린 왕자’는 또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세상은 아름답고도 위험해 / 기쁘기도 슬프기도 해 / 고마워할 줄 모르면서 베풀기도 하고 / 아주, 아주 많은 것들로 가득해 / 세상은 새롭고도 낡았지 / 크지만 작기도 하고 / 세상은 가혹하면서 친절해 / 우리는, 우리 모두는 / 그 안에 살고 있지” (99쪽)

이야기의 중반, 큰 그림으로 표현된 노랫말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됩니다. 무척이나 현실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동화 <올레오 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의 느낌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 같아요. 곧이곧대로만 살 수는 없는 세상, 누구에게나 불행과 행복이 찾아올 수 있는 모순된 삶의 무게를 보여주기에, 이 책은 약간 무게감이 있는 편입니다 (아이들은 행복하게만 볼지도 모르겠지만요). 몽글몽글하게 예쁜 그림들이 가득 차있는 책이지만 글밥도 많은 데다가 현실과 이상을 생각할 수 있는 동화라서 초등학생 고학년 자녀와 어른이 함께 생각하며 보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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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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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살면 편하다. 어떤 것도 고민하지 않고, 어떤 장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지나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는 불편함을 목격하고, 불편함을 생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불편함을 불편하다 인식하기 시작하기부터 피곤해지지만 발을 담근 순간 어쩔 수 없이 바짓단은 젖어든 상태다. 텅 빈 머릿속은 시끄러워진다. 보지 않던 것이 계속해서 보인다. 나 또한, 이런 갈등의 세계를 걷고 있다.

여성이 페미니즘을 생각하게 된다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몸으로 겪고, 수없이 많이 목격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페미니즘이라 굳이 언급하고 규정하지 않아도 여성들은 마음으로 느끼고 은연중에 말한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엔 사실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젠더 규범 속에 남성성을 강조하며 자란 그들이 갈등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어떻게 자신이 속하지 않은 사회를 위해 마음을 쓸 수 있을까.

저자는 문단의 젠더 권력 (페니스 파시즘)을 목격하고 나서 ‘이상한 세계’를 뼈저리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았다. 항시 긴장상태로 많은 것을 점검했다. 그러나 남성인 그가 온전히 여성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어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다분했다. (20쪽)” 언어와 행동, 숨어있는 폭력적인 면모까지 모두 끄집어내어 고쳐야 했다. 많은 부분 압축된 글 너머에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터. 그는 수많은 노력으로 자신을 다듬었다. 그런 도중,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녹내장에 걸려 실명 위기였던 애인을 ‘함께 아프자’라는 말로 붙잡았다. 그들의 결혼은 ‘혼인 의례는 우리라는 삶을 선언하는 날’이라는 문장 아래 철저히 주체적인 신념에 맞추어 진행했다.

이후의 내용은 저자가 ‘임신, 출산, 육아’라는 미지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언뜻 육아일기 같으면서도 진지한 고민들이 세밀하게 담겨 있다. 그는 출산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지 못해도 옆에 꼭 붙어 느끼고, 아내 대신 육아를 전담하며 다른 집은 보통 여성들이 겪는 일들을 체험한다. 머리로 경험하던 일들을 마침내 몸으로 제대로 경험함으로써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늘 긴장감을 유지한 채 올곧은 자신의 신념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아이에게도 올바른 자세를 전해주려 노력한다.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고 해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남성―인간으로서 살아왔고, 남성―무의식 속에서 살게 될 것이고, 남성―질서와 함께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내가 죽기 전까지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87쪽, <두 번째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라 언급하긴 하지만 그가 중요하게 바라보는 대상에는 단연 ‘여성’만 있지 않다. 여성, 장애인, 아이, 동물, 자연…… 억압받는 모든 것들이 있다. 이쯤 되면 대상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같은 상황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그 속의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는 시선의 차이. 내가 존중받는다면 당신도 존중받아야 하고, 세상 어떤 존재도 말이 되지 않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여성인 나는 그에게 진정한 페미니즘, 아니 ‘살아가는 자세’에 대하여 배운다.

 

그 느낌의 세계로의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어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다분했다. 피와 살의 느낌이라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가까워지려는 ‘노력’에 의해서 겨우 가능할까 말까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또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축척해온 젠더 무의식은 꼭 실수를 하고 나서야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릅쓰고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어머니, 이모, 친구와 동료 중 절반이 여성이고 내 안의 여성성도 들끓고 있으니까. 여성들과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몸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반복할 수밖에. 오직 반복뿐. - P20

이사를 하면서 우리는 다짐했다. 집을 근거로 해서 삶을 꾸려 나가겠다. 집을 소외시키지 않겠다. 남성―공적 영역 / 여성―사적 영역으로 성 역할을 분배하는 공간 배치를 거부하겠다. 집을 우리 삶의 장소로서 가꾸겠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집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집을 근거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집을 길들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 바로 집사람. 눈사람이라는 말과 비슷해서 제법 귀엽기도 하다. 이날부터 애인과 나는 서로를 집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물론, 새롭게 태어날 아가도 집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집사람으로 해야 할 몫을 함께 할 것이다. - P66

막달인 당신의 바다에는 요즘 태풍이 자주 부나봅니다. 숨 쉬기가 힘들고, 갈비뼈가 아프고, 배가 뭉치고, 골반이 아픈 당신은 몇 번이고 자꾸 새벽에 혼자 깨어 몸을 동그랗게 말아 새벽을 건넙니다. 나는 가능한 한 질긴 해초 다발이 되어 당신이 떠내려가지 않게 등을, 배를, 허리를, 종아리를 스윽스윽 감아 다시 눕힙니다. - P82

베개를 베고 누워 잠깐 생각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오래된 오해는 아닐까. 오해를 오래 해서 이해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이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이해가 될 때, 이해는 오해가 된다. 이해를 둘러싼 투쟁의 영역에서 물러나 싸움을 그만두었을 때, 늙어간다는 걸 이해한다. 나는 오늘치의 이해를 과다 복용했다. 어딘가 쓸쓸하게 늙은 것 같다. 선크림 발라야겠다. - P103

장/애인과 아이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선의를 조금이라도 내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잠시라도 착해지고 싶었을 테고, 애써 다정함을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연민의 시선에 잘 적응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을 두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어붙은 호수"라고 표현하면서 이러한 시선들이 세계와 주체의 거리감을 체험하게 한다고 말했다. 연민의 시선에서 나는 그들과 나 사이에 얼어붙어 있는 호수가 놓여 있음을 확인한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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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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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비유적 표현으로만 존재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마법을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엄청나게 큰 불행에 휩싸인. 열여섯살의 소년은 지하철역에 버려졌고, 운좋게 집으로 돌아갔으나 또한번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아버지는 단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새엄마와 의붓여동생을 데리고 왔고, 처음엔 상냥했던 그들은 점차 소년을 경멸하기 시작한다. 말을 더듬고, 구박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피하며 살아오던 소년은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살아왔으나, 성추행을 당한 의붓여동생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한 순간 그는 집을 뛰쳐나와 버린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년이 갈 수 있던 것은 종종 끼니를 때우던 ‘위저드 베이커리’. 무뚝뚝한 빵집 주인과 상냥한 알바생의 도움을 받아 빵집의 비밀 공간에 겨우 겨우 숨었다. 그런데 여긴 정말 수상한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왠지 모르게 평범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파티시에 마법사, 그리고 파랑새로 변신하는 소녀 직원, 원하는 마법을 선택할 수 있는 갖가지 맛의 빵. 이토록 신비스러운 마법 빵집에서 내가 원하는 환상을 모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빵집에서는 이러한 우주의 논리 아래, 사소한 마법이라도 충동적으로 쓰면 안된다고 재차 강조한다.

“따라서 저편에서 누군가가 뒤틀어놓은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이편에서 다른 힘으로 붙들거나 되돌려야 한다고. 세상의 마법사들은 모두가 함께 존재하지 않거나, 모두가 같이 존재해야만 하는 딜레마를 안고 살아간다고. 그것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소망이라는 게 없어지지 않는 한 ―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남아 있는 한 계속되는 현상이라고.”

소원을 빌면 뾰로롱,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는 소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악한 사람은 불행하고 선한 사람은 행복한, 무조건적인 법이란 없다(사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이 반대인 것 같기도). 주인공이 고난을 하나 하나 시원하게 해결하고, 훈훈한 교훈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 성장하는 스토리 또한 따라가지 않는다. 이성적이고 시니컬한 소설이 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위저드 베이커리>는 다양한 청소년 소설들 사이에서 분명 다른 색을 띈다.

작가는 약간의 마법(도움)을 가미하며 이 이야기를 통해 ‘선택’과 ‘책임’을 강조한다. 당신의 선택으로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고, 그 선택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환상’을 줄 수 없다면, 어쩌면 이런 따끔한 충고도 약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리 말하는 이들도 실은 알 거다. 이상과 철저히 거리를 둔 현실을,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이 주는 무게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최소한의 금전적인 지원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조금은 감수해야 할 여러 유형의 폭력이 있다는 체념적인 단정. 일단 닥치고 집을 나와 청소년쉼터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아마도 생명의 위협에 가까운 폭력을 피해 도망쳤거나, 견뎌본들 나중에라도 얻을 것 없는 가난한 집에 미련을 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이리라는 폭 좁은 편견. 기타 강간이나 임신 절도 등의 문제는 가난과 폭력의 별책 부록 같은 것이리라고.

때로는 한없이 어리석지만 그것밖에는 선택할 수 없는 남들의 바람을 이루어지게 도와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소원이 없는 사람. 남들의 감사만 받아도 모자랄 마당에 단지 뒤틀린 결과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탓할 상대가 있어서 편할 것이다. ‘당신이 그런 수상쩍은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손대지도 않았을 금기를…….’

옛이야기에서와 달리 지금 사람들이 마법의 과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당장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보다는 대체로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문제 때문. 과열된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소를 가득 담은 풍선만큼이나 끝없이 상승할 수 있다. 감정과 풍선의 공통점은 비가시권의 높이에서 제풀에 폭발해버린다는 것.

그에 비하면 현실이란 그넷줄이나 위로 튀어오르는 공과 같이 얼마나 건조하고 절망적인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까지박에 오르지 못하며, 땅이 잡아당기는 힘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내려오니까.



…… 무엇보다도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치 통조림만도 못한 주제에.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강제와 분리가 없다면 언제고 언제까지고 그 안에서.

― 언제나 옳은 답지만 고르면서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인생에서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나요?

―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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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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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 디스토피아를 주제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새롭게 SF를 그려낸 작가는 그때보다 더 나아갔을까.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제 한국의 대표 페미니즘 소설이 된 <82년생 김지영>의 이름은 작가의 곁에서 늘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책 제목을 대며 많은 기대를 하고, 때로는 불평을 하고, 책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깎아내리려 용을 쓴다. 종종 이런 글들을 보며 한숨을 쉬면서 새 책을 집필하는 부담감이 어마어마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최근 출간 인터뷰에서 ‘페미니즘 작가로 불리는 것에 대해 부담감은 없다’고 밝혔다. 그저 쓰고 싶은 주제를 쓰는 것이라고. 꽤 단단하고 믿음직한 말이다.

2012년부터 구상했고 조금씩 수정해나갔다는 신작 <사하맨션>은 오랫동안 작가가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촘촘히 들어차있다. 소설 속의 사회는 ‘타운’이라는 이름의 기괴한 도시 국가다. 기업의 인수로 탄생한 ‘타운’은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엄격한 통제로 유지된다. 공동 총리제를 도입하고, 무분별한 밀입국을 막기 위해 계급을 두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전문 지식 혹은 기술을 가진 L, 자격심사를 통해 2년 동안의 체류권을 가지는 L2, 그리고 그 둘에 모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하’라는 이름의 맨션에 숨어들었다. 각자의 상황을 가지고, 맨션의 이름을 따 ‘사하’라고 불리며 배척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작 소설처럼 펼쳐진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 모조리 귀 닫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작은 도시국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기시감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거대 기업은 거대 권력과 결탁하고, 주민이라는 이름 아래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타운의 주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2년마다 검사받는 L2의 인생은 비정규직의 일상과 닮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선한 사람들, 수상한 배의 침몰,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은 나비 혁명, 임신 중절이라는 이슈가 등장한다. 소설의 이야기는 격렬하지 않지만 그것을 읽는 내내 마음은 소용돌이친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여타의 한국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남주의 소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부분들이다.

“우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서로 미안하지? 나한테 진짜 미안해야 할 사람은 누구지? 아무도 내게 사과를 안 해.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요즘 분해서 자꾸 눈물이 나.” (117쪽)

사하 맨션에 정착한 사람들은 ‘몰려난’ 사람들이다. 폭력에 대항하다가 죄인이 되고,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죽음을 맞거나 사고를 내고, 조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이용당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들은 사회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약자들이다.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혐오는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밖으로,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매정하게 내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그리고 당연히 그 사람들은 사과를 할 생각도,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데도.

작가는 사하맨션에 들어온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들려주면서 사회의 부조리함을 조용히 고발한다. 연작소설처럼 시점이 바뀌는 소설의 흐름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닫히지 않는 결말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야기의 큰 굴곡보다는 대화나 장면 속에 숨겨진 분노들을 응시하며 읽기를 바란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
진경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고, 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등을 돌려 누우며 덧붙였다.
"나도 타운 주민이 되고 싶어." - P51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 그러니까 진경 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위로도 배려도 보살핌도 격려도 함부로 받지 말아요."
아니요. 위로받아도 됩니다. 위로와 배려를 받게 되면 받는 거고 받았더라도 따질 게 있으면 따지는 거고 그리고 더 받을 것이 있다면 받는 게 맞아요. 진경의 머릿속에 이아의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 P163

원장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만큼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고 그래서 아이를 낳는 곳은 아이를 낳지 않는 곳도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고 부주의할 수도 있고 상황이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P227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쁘지 않아. 어떻게든 둘러대는 사람들이 주로 나쁘지." - P240

―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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