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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평점 :
조남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 디스토피아를 주제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새롭게 SF를 그려낸 작가는 그때보다 더 나아갔을까.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제 한국의 대표 페미니즘 소설이 된 <82년생 김지영>의 이름은 작가의 곁에서 늘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책 제목을 대며 많은 기대를 하고, 때로는 불평을 하고, 책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깎아내리려 용을 쓴다. 종종 이런 글들을 보며 한숨을 쉬면서 새 책을 집필하는 부담감이 어마어마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최근 출간 인터뷰에서 ‘페미니즘 작가로 불리는 것에 대해 부담감은 없다’고 밝혔다. 그저 쓰고 싶은 주제를 쓰는 것이라고. 꽤 단단하고 믿음직한 말이다.
2012년부터 구상했고 조금씩 수정해나갔다는 신작 <사하맨션>은 오랫동안 작가가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촘촘히 들어차있다. 소설 속의 사회는 ‘타운’이라는 이름의 기괴한 도시 국가다. 기업의 인수로 탄생한 ‘타운’은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엄격한 통제로 유지된다. 공동 총리제를 도입하고, 무분별한 밀입국을 막기 위해 계급을 두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전문 지식 혹은 기술을 가진 L, 자격심사를 통해 2년 동안의 체류권을 가지는 L2, 그리고 그 둘에 모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하’라는 이름의 맨션에 숨어들었다. 각자의 상황을 가지고, 맨션의 이름을 따 ‘사하’라고 불리며 배척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작 소설처럼 펼쳐진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 모조리 귀 닫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작은 도시국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기시감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거대 기업은 거대 권력과 결탁하고, 주민이라는 이름 아래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타운의 주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2년마다 검사받는 L2의 인생은 비정규직의 일상과 닮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선한 사람들, 수상한 배의 침몰,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은 나비 혁명, 임신 중절이라는 이슈가 등장한다. 소설의 이야기는 격렬하지 않지만 그것을 읽는 내내 마음은 소용돌이친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여타의 한국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남주의 소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부분들이다.
“우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서로 미안하지? 나한테 진짜 미안해야 할 사람은 누구지? 아무도 내게 사과를 안 해.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요즘 분해서 자꾸 눈물이 나.” (117쪽)
사하 맨션에 정착한 사람들은 ‘몰려난’ 사람들이다. 폭력에 대항하다가 죄인이 되고,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죽음을 맞거나 사고를 내고, 조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이용당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들은 사회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약자들이다.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혐오는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밖으로,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매정하게 내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그리고 당연히 그 사람들은 사과를 할 생각도,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데도.
작가는 사하맨션에 들어온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들려주면서 사회의 부조리함을 조용히 고발한다. 연작소설처럼 시점이 바뀌는 소설의 흐름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닫히지 않는 결말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야기의 큰 굴곡보다는 대화나 장면 속에 숨겨진 분노들을 응시하며 읽기를 바란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 진경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고, 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등을 돌려 누우며 덧붙였다. "나도 타운 주민이 되고 싶어." - P51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 그러니까 진경 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위로도 배려도 보살핌도 격려도 함부로 받지 말아요." 아니요. 위로받아도 됩니다. 위로와 배려를 받게 되면 받는 거고 받았더라도 따질 게 있으면 따지는 거고 그리고 더 받을 것이 있다면 받는 게 맞아요. 진경의 머릿속에 이아의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 P163
원장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만큼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고 그래서 아이를 낳는 곳은 아이를 낳지 않는 곳도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고 부주의할 수도 있고 상황이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P227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쁘지 않아. 어떻게든 둘러대는 사람들이 주로 나쁘지." - P240
―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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