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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심하게 살면 편하다. 어떤 것도 고민하지 않고, 어떤 장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지나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는 불편함을 목격하고, 불편함을 생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불편함을 불편하다 인식하기 시작하기부터 피곤해지지만 발을 담근 순간 어쩔 수 없이 바짓단은 젖어든 상태다. 텅 빈 머릿속은 시끄러워진다. 보지 않던 것이 계속해서 보인다. 나 또한, 이런 갈등의 세계를 걷고 있다.
여성이 페미니즘을 생각하게 된다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몸으로 겪고, 수없이 많이 목격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페미니즘이라 굳이 언급하고 규정하지 않아도 여성들은 마음으로 느끼고 은연중에 말한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엔 사실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젠더 규범 속에 남성성을 강조하며 자란 그들이 갈등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어떻게 자신이 속하지 않은 사회를 위해 마음을 쓸 수 있을까.
저자는 문단의 젠더 권력 (페니스 파시즘)을 목격하고 나서 ‘이상한 세계’를 뼈저리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았다. 항시 긴장상태로 많은 것을 점검했다. 그러나 남성인 그가 온전히 여성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어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다분했다. (20쪽)” 언어와 행동, 숨어있는 폭력적인 면모까지 모두 끄집어내어 고쳐야 했다. 많은 부분 압축된 글 너머에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터. 그는 수많은 노력으로 자신을 다듬었다. 그런 도중,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녹내장에 걸려 실명 위기였던 애인을 ‘함께 아프자’라는 말로 붙잡았다. 그들의 결혼은 ‘혼인 의례는 우리라는 삶을 선언하는 날’이라는 문장 아래 철저히 주체적인 신념에 맞추어 진행했다.
이후의 내용은 저자가 ‘임신, 출산, 육아’라는 미지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언뜻 육아일기 같으면서도 진지한 고민들이 세밀하게 담겨 있다. 그는 출산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지 못해도 옆에 꼭 붙어 느끼고, 아내 대신 육아를 전담하며 다른 집은 보통 여성들이 겪는 일들을 체험한다. 머리로 경험하던 일들을 마침내 몸으로 제대로 경험함으로써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늘 긴장감을 유지한 채 올곧은 자신의 신념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아이에게도 올바른 자세를 전해주려 노력한다.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고 해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남성―인간으로서 살아왔고, 남성―무의식 속에서 살게 될 것이고, 남성―질서와 함께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내가 죽기 전까지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87쪽, <두 번째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라 언급하긴 하지만 그가 중요하게 바라보는 대상에는 단연 ‘여성’만 있지 않다. 여성, 장애인, 아이, 동물, 자연…… 억압받는 모든 것들이 있다. 이쯤 되면 대상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같은 상황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그 속의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는 시선의 차이. 내가 존중받는다면 당신도 존중받아야 하고, 세상 어떤 존재도 말이 되지 않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여성인 나는 그에게 진정한 페미니즘, 아니 ‘살아가는 자세’에 대하여 배운다.
그 느낌의 세계로의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어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다분했다. 피와 살의 느낌이라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가까워지려는 ‘노력’에 의해서 겨우 가능할까 말까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또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축척해온 젠더 무의식은 꼭 실수를 하고 나서야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릅쓰고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어머니, 이모, 친구와 동료 중 절반이 여성이고 내 안의 여성성도 들끓고 있으니까. 여성들과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몸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반복할 수밖에. 오직 반복뿐. - P20
이사를 하면서 우리는 다짐했다. 집을 근거로 해서 삶을 꾸려 나가겠다. 집을 소외시키지 않겠다. 남성―공적 영역 / 여성―사적 영역으로 성 역할을 분배하는 공간 배치를 거부하겠다. 집을 우리 삶의 장소로서 가꾸겠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집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집을 근거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집을 길들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 바로 집사람. 눈사람이라는 말과 비슷해서 제법 귀엽기도 하다. 이날부터 애인과 나는 서로를 집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물론, 새롭게 태어날 아가도 집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집사람으로 해야 할 몫을 함께 할 것이다. - P66
막달인 당신의 바다에는 요즘 태풍이 자주 부나봅니다. 숨 쉬기가 힘들고, 갈비뼈가 아프고, 배가 뭉치고, 골반이 아픈 당신은 몇 번이고 자꾸 새벽에 혼자 깨어 몸을 동그랗게 말아 새벽을 건넙니다. 나는 가능한 한 질긴 해초 다발이 되어 당신이 떠내려가지 않게 등을, 배를, 허리를, 종아리를 스윽스윽 감아 다시 눕힙니다. - P82
베개를 베고 누워 잠깐 생각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오래된 오해는 아닐까. 오해를 오래 해서 이해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이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이해가 될 때, 이해는 오해가 된다. 이해를 둘러싼 투쟁의 영역에서 물러나 싸움을 그만두었을 때, 늙어간다는 걸 이해한다. 나는 오늘치의 이해를 과다 복용했다. 어딘가 쓸쓸하게 늙은 것 같다. 선크림 발라야겠다. - P103
장/애인과 아이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선의를 조금이라도 내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잠시라도 착해지고 싶었을 테고, 애써 다정함을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연민의 시선에 잘 적응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을 두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어붙은 호수"라고 표현하면서 이러한 시선들이 세계와 주체의 거리감을 체험하게 한다고 말했다. 연민의 시선에서 나는 그들과 나 사이에 얼어붙어 있는 호수가 놓여 있음을 확인한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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