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 년 동안에 세계 경제는 심오한 변환을 겪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금융 영역에서 발생한 극적인 변화일 것이다.

금융 거래의 규모와 중요성 모두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왔으며, 금융 시장과 이 시장에서의 행위자들은 경제에서 점점 더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 결과, 이제 금융 부문은 단순히 우리의 경제 활동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보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정하고 구성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금융 정보와 지식은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서점의 경제 코너에는 금융 수익률을 보장하는 다양한 지침을 가르치는 책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차현진의 <숫자 없는 경제학>(인물과사상사 펴냄)은 그런 '속물학'으로서의 경제학이 아니라 '물질생활에 대한 철학'으로서의 경제학을 '문·사·철(文·史·哲)'에 기초하여 개진하고 있다.

"문(文)이란,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를 말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파토스(pathos)의 영역이다. 이에 비해 철(哲)은 논리와 사상,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로고스(logos)의 영역이다. 사(史)는 사회의 배경이나 제도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는 사회적 관습 또는 사회 구성원의 기질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와 일맥상통한다." (머리말, 8쪽)


▲ <숫자 없는 경제학>(차현진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이 책은 경제 이론과 제도에 담겨있는 치열한 논쟁과 반목의 사회적 배경을 다룬다. 그러나 "인물·철학·열정이 만든 금융의 역사"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런 내용을 관계된 사람의 내면세계를 통해서 전달함으로써, 무미건조할 수 있는 경제학설사에 생동감을 줘 이론과 역사가 잘 버무려진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논쟁적인 주제로 시작해서 중앙은행의 존재 근거를 도출하고(1~2장), 한 은행가를 통해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의 성장 과정을 조명함으로써 금융 혁신의 비판적 해석을 제공하며(3장), 뉴딜 개혁 시기 중앙은행법 개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재무부와 중앙은행의 갈등을 통해 중앙은행의 독립성 획득 과정을 보여준다(4장).

특히 6장에서 금융 시장의 효율적 작동에 대한 믿음을 맹신의 수준까지 밀고 나간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철학적 배경은 매우 흥미롭다. 그의 미국적 객관주의는 인간의 의식과는 별개의 객관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철학사조의 한 아류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이기적 행동을 옹호하는 시장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논리적·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이 6장에서는 작은 정부, 규제 완화, 시장의 자율, 개인의 이기심 등을 옹호한 시장주의가 왜 "개똥철학"인지를 자세히 살핀다. 이런 부분을 보면서, 금융 시장 및 경제가 작동하는 원리로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던 시장주의가 최근의 금융 위기로 그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 즉, 책 전반에 '문·사·철(文·史·哲)'에 기초하여 전개된 풍부한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으로 보인다. 금본위제 하에서 화폐의 발행은 존재하는 금의 양에 구속되는데 반해서 법정 화폐(fiat money)는 그러한 제약이 없기 때문에 화폐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며 그 안전장치가 바로 독립된 중앙은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따라 한국은행의 탄생과 독립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가장 많은 지면이 할애되고 있다(8~10장). 최초의 한국은행법을 두고 한국은행 측의 위법과 로비 의혹을 제기한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을 구체적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반박하는가 하면, 군사 정권에 대항해 한국은행 기능 축소에 반대한 제7대 한국은행 총재 민병도의 삶도 자세하게 소개한다.

최근 이명박 정부에서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 기획재정부 관료가 10년여 만에 참석함에 따라 한국은행 독립성 훼손 논란이 일기도 했고,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부 정책의 압력에 굴복하여 금리 인상 시기를 놓쳐서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비판이 한국은행 총재에 집중되기도 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포퓰리즘 단기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를 예방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이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누구로부터의 독립성이며 무엇을 추구하기 위한 독립성인가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은행의 독립이 과연 최선인가?

통화 정책을 추진하는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 3인, 정부 2인, 재계 2인 추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사 결정이 이자율이나 환율과 같은 거시 경제 변수뿐만 아니라 나아가 실업률과 소득 분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정부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시장, 재계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구조에서 시장이나 재계에 프렌들리(friendly)한 정부의 경우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사결정 내용은 불 보듯 뻔하다. 이뿐만 아니라 독립성이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중앙은행의 목표가 현재와 같이 물가 안정에만 지나치게 맞추어져 있다면, 금융 시장의 과도한 과열과 붕괴로 인한 경제 전반의 불안정과 고통은 고스란히 취약 계층에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

중앙은행의 독립이 누구로부터의 독립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독립인지에 대한 논쟁 지점만 유념한다면, <숫자 없는 경제학>은 현상 분석에만 집중하는 화폐·금융 경제학 교과서보다 풍부한 논의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경제학은 돈을 넘어선 것을 탐구하는 철학"이며 "자신의 범위를 확장해서 새롭게 정의된 경제학"의 등장을 기대하는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는 독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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