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아는 얼굴이 있어 무심코 인사를 했노라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는 사람이 아니었고 한창 즐겨보던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을 자주 내비치는 사람이었다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냥 웃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책의 저자에 대해 그런 경험이 빈번하다. 얼굴을 보기는커녕 목소리도 들은 적 없는데도 동일한 필자의 글을 자주 접하다 보면 나는 그 누군가를 잘 알고 있는 듯 착각을 하곤 한다. 정상호가 그런 필자 중 하나이다. 그래서 나는 우연히 정상호를 학술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을 때 다른 어떤 이보다도 반갑게 인사하고 말았다. 물론 그는 내 반가움의 실체를 눈치 못 챘겠지만 말이다.


▲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화>(정상호 지음,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그가 쓴 논문들이 최근 한 권의 책,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화>(모티브북 펴냄)로 엮였다. 이번 책에서도 그의 문제의식은 일관된다. 나는 감히 그의 현실적 문제의식과 연구의 지향점을 '정치의 복원' 한 마디로 정리하고 싶다. 한국 사회의 낡은 정치에 대한 비판이 결국 탈정치로 귀결되었던 그간의 정치 경험에서 그는 정치의 복원을 꿈꾼다. 정치의 복원을 위해 그는 '생활 정치'와 '이익 정치'를 씨줄과 날줄로 배치하였다. 생활 정치와 이익 정치가 한국 정치를 종횡으로 교차할 때 이를 아우르는 역할은 '정당'이다.

그런데 나는 왜 정상호의 글을 자주 읽게 되었을까? 세칭 학계의 말석에 끼기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상호의 논문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말장난 같지만 안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 답답함을 느끼고 소박한 수준에서라도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쓴 논문을 피해가기 어렵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은 논문이라는 학술적 형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한국 정치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에 상응하는 성실한 경험 분석과 정책적 제안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이 땅에 발 딛고 있는 사람이라면 외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청목회 입법 로비나, 최근 행정안전위원회의 정치 자금법 개정 논란이 있을 때 그의 논문은 책에 갇혀있는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주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정치 후원금을 무조건 대가성으로 치부하여, 정치 후원금 제도가 유권자들의 정치 행위 중 하나이며, 국회의원이 유권자들의 후원을 통해 입법 활동에 나서는 것이 대의 과정의 하나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현실에서 이 책에 담긴 '정당과 조직화된 이익 집단과의 안정적이고 제도화된 연계의 강화'라는 그의 주장은 학계의 이론적 견해에서 시민사회나 정계의 진지한 검토 대상이 된다.

비록 그가 제안하는 여러 가지 차원의 제도적 대안들, 예를 들어 청원 심사제 활성화나 지방 정당, 비례대표 비율 확보 등에 이미 다른 입장을 갖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제안에 진지하게 화답해야 한다. 로비 제도 도입에 대해 그가 견지하는 비판적 태도 하나만 확인해보더라도 그가 지적하는 한국 정치의 퇴행-권력 불평등과 의회 정치의 비정상성-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지 답변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는 로비 제도의 도입이 '기존의 정치 권력의 형평성을 저해할 것인가 아니면 제고할 것인가', '정당과 의회 정치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인가 아니면 폐쇄성과 경직성을 심화시킬 것인가' 하고 묻는다. 때문에 로비 제도 도입에 대한 그의 비판적 견해는 정당의 정상화와 풀뿌리 정치, 생활 정치 강화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정당의 이익 표출 및 집약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총론적 주장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로 당장 동감을 표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고질적인 한국 정당의 후진성과 병폐에 넌더리를 내거나, 시민 정치 운동 등 다른 방식으로 정치 현실을 직접적으로 개선하려고 하는 경우 정당에 초점을 맞추는 그의 주장은 너무 원론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의 문제제기가 매우 솔직하고도 정확하게 한국의 정치 수준을 진단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책에 담긴 문제의식을 제대로만 좇아간다면 이익 정치에 대한 삐딱한 시선과 정당의 정상화에 대한 과잉 정치화된 편견에서 벗어나 이참에 한국 정치의 재구성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한다면 어떤 이보다도 사회운동을 중심에 놓고 운동과 제도를 대립적인 구성물로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개방적인 태도와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실린 그의 주장에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이익 정치 개념 -'회원들에게 이득을 주기 위하여 정치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이익 집단의 활동'-에 고개를 끄덕거리지 못한다. 만약 그의 정의를 따른다면, 경제적 이익 집단과 공익적 시민단체에서 이익의 개념이 동일한 것으로 유추되는데, 이는 이론적 영역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또한 그는 매우 여러 편의 논문에서 재정의 출처가 이익 집단의 전략과 전술을 규정한다는 슐로즈만과 티어니, 워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시민단체는 아웃사이드, 이익 집단은 인사이드 전략을 구사한다는 결론을 반복하고 있다. 이익 집단과 재정 구조, 재정 원천과의 관련성으로 이익 집단별 이익 표출 전략이 상이하다는 주장은 다양한 차원에서 변주된다.

한 예로 그는 시민단체의 영향력 평가나 접촉 빈도에서 유달리 지방자치단체가 높게 나타나게 된 것도 시민단체에 대한 지방의 보조금 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즉 재정 출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자 단체나 시민단체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 각 집단에서 다루는 이슈 등도 중요한 변수로 취급해야만 할 것이다. 포괄적으로 시민단체로 분류된다고 할지라도 입법 운동 전략을 주요한 운동 방식으로 선택하지 않는, 선택할 필요가 없는 단체들이 많은 현실에서 전략적 선호에 대한 분별을 하는 의의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가 이미 잘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사업자 단체는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이익 수호를 목적으로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익 증대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나 반발을 우려하여 아웃사이드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할 필요가 없다.

반면 시민단체는 정책 목표 실현이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적 담론 형성과 시민 참여를 동반하고 이를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하므로 인사이드 전략과 더불어 아웃사이드 전략에도 큰 힘을 들여야 한다. 실제 시민단체의 입법 운동 경험에서 볼 때 대중 캠페인,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전략, 공익 소송 등 다양한 운동 레퍼토리가 동시적 또는 종합적으로 구사되었을 때 성공했다는 점이 관찰된 바 있다. 또 한국 사회가 사회운동과 저항이 일상화된 운동사회(Movement Society)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시민단체의 일반적 관계는 대항적 혹은 갈등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현실에서 비추어 볼 때도 그러하다. 때문에 회비 의존도가 높은 사업자 단체는 인사이드 로비에 집중하고 정부 보조금과 기부금에 의존하는 시민단체는 아웃사이드 로비에 적극적이라는 주장은 일면적인 사실만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이는 한국 시민사회가 회비압도형(fee-dominant)라고 주장했던 그의 이전의 견해와도 달리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책에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현실 진단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이렇게 사소한 트집에 아까운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정상호에게 갈 길이 멀다며 재촉을 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연구 주제는 나에게 있어, 많은 독자들에게 있어 현실에서 해결해야 할 주요한 사회적 의제이다. 때문에 그가 정당의 정상화와 이익 정치의 활성화, 생활 정치의 강화라는 한국 정치의 길을 기왕에 닦아 왔으니, 향후 다가올 정치의 계절에 누구에게라도 교과서처럼 읽히는 한국 정치의 교본을 하나 펴냈으면 좋겠다.

또한 내가 그의 책을 탐독하는 열혈독자라는 이유로 이것저것 청하는 무례함이 조금 더 용인될 수 있다면 생활 정치에 대한 그의 이론적 지평이 지역을 넘어 더욱 확장되어야 함을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생활 정치의 맥락은 유럽과도, 그리고 생활 정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과도 매우 다르다. 무엇보다 정치의 성립은 정체성에서 출발한다. 정치의 주체가 정치의 내용과 방향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기대하는 것처럼 생활 정치가 한국 정치의 구태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 건설을 위한 길잡이가 되려면, 생활 정치의 유력한 공간으로 지역을 상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생활세계 전반에 대한 정치의 재구성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사회 집단별로 이익 표출 행위의 양상이 왜 다른지, 왜 서로 다른 전략에 치중하는지에 대해 좀 더 종합적인 연구를 제안하고 싶다. 정치적 성격의 변화가 이익 정치 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는 시급히 이명박 정부를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국제 비교 연구에 대한 그의 야심(?)을 발견하곤 했는데 그의 이후 연구 대상이 한국의 경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제 비교 연구로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정상호는 저자 서문에서 학계의 글쓰기 풍토에 대한 나름의 불만을 토로하였다. 학술지에 게재되는 연구자들의 논문은 폭증하고 있지만, 꼭 그만큼 대중과의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그는 엄격한 논문 형식에서 탈피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책에 엮인 논문들이 학술지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라건대, 나는 누구보다 실천적 문제의식이 풍부한 정상호에게만큼은 학계의 제왕적 권력이 비껴나가 자유로운 글쓰기를 허하는 세상이 되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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