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 스웨덴>(후마니타스 펴냄)의 저자 신필균은 스웨덴 정부 장학생으로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를 취득한 사회복지분야의 실천적 전문가로, 참여정부의 정책기획수석실 비서관,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렇듯 사회복지의 이론과 실물에 밝은 전문가가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향한 긴 여정에 나설 우리에게 길라잡이 역할을 하게 될 소중한 참고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스웨덴 복지국가의 역사적 형성과 현황을 실천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기술한 복지국가 스웨덴에 관한 개설서이다.

이 책은 스웨덴의 역사와 정치뿐만 아니라, 행정체계, 아동가족정책, 노후소득보장과 노인복지정책, 장애인정책, 여성정책, 교육정책, 보건의료정책, 주택정책, 노동시장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스웨덴의 사회정책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복지국가 스웨덴이라는 숲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기존의 스웨덴 관련 저서들이 복지국가 스웨덴의 정치이념과 정치경제학적 논리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면, 이 책은 복지국가 스웨덴의 역사와 정치이념 속에 사회정책의 각 분야별 구체성을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국민의 집"을 스웨덴 복지국가의 이념이자 정신으로 본다. 스웨덴을 세계 최고의 복지 선진국으로 이끈 힘의 원천으로 "국가는 모든 국민을 위한 좋은 집이 되어야 한다."라는 스웨덴의 복지국가 이념을 꼽고 있다. 또 저자는 "현재까지 달성된 복지국가 스웨덴은 국민의 삶 구석구석에 보편주의와 평등주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꾸준히 노력한 결과"라고 말한다. 이는 저자가 책을 통해 읽고 배운 것뿐만 아니라 스웨덴 사회보험청의 연구원 생활과 스톡홀름 광역시의 공무원으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국민의 집"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몸으로 체득한 것일 게다. 그래서 이 책은 더 설득력을 갖는다.


▲ <복지국가 스웨덴>(신필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티나스
현재 스웨덴은 인구 930만 명의 작은 나라다. 스웨덴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당시 인구의 약 25%에 해당하는 100만 명의 인구가 빈곤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가난한 나라, 주로 농업에 의존하던 유럽의 주변국이었으나 약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쳐 전후 복지국가의 황금시기를 거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국가, 민주국가, 복지국가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는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어렵사리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쳤으나,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 양극화 성장체제를 구조화함으로써 민생 불안이 심화되고 있고, 여기에 복지체제마저 선별주의의 시혜적 복지를 강고하게 견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미래의 국가 발전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특히, 지난 6.2 지방선거 이후 우리사회의 시대적 과제로 부상하기 시작한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온몸으로 받아 안고 이 흐름을 이끌어 나가야 할 시민정치운동 진영과 복지국가 정치세력의 입장에서 복지국가 스웨덴의 경험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매우 유익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도 구조적 수준에서 경향적으로 악화되었던 신자유주의 양극화는 이제 각자도생의 시장적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중산층을 포함한 다수의 국민이 인정할 만큼 우리네 민생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이미 2007년부터 <복지국가 혁명>(밈 펴냄)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사회의 만성적인 민생 불안으로 일자리 불안, 보육과 교육 불안, 주거 불안, 의료 불안, 노후 불안 등 소위 '5대 민생 불안'을 제기해왔다. 이제 '5대 민생 불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우리사회의 상식이 되었다.

그렇다면, 복지국가 스웨덴은 어떨까? 우리는 어떤 정치 전략과 정책 수단을 통해 민생의 5대 불안을 복지국가 스웨덴 수준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우리시대의 당면과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같은 싱크탱크의 연구 과제이자, 풀뿌리 시민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힘을 모아줘야 할 시민정치운동의 과제이자, 진보개혁진영에서 정치적으로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만큼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이 책은 1장에서 스웨덴의 역사와 환경을 다루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흔히 스칸디나비아 국가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지식이 아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3국을 지칭한다. 이들 3국에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를 추가하면 노르딕협의회의 구성 국가들인 노르딕 5개국이 된다."

"1523년 스웨덴은 구스타프 바사의 지도하에 덴마크 지배의 칼마 연합으로부터 독립하였고, 1527년 종교개혁을 선포하여 루터교를 국교로 삼았다."

"스웨덴은 1809년 헌법을 제정하면서 입헌군주제 국가로 자리 잡았다."

"의회 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국회, 광역 지방의회(란드스팅), 기초 지방의회(코뮨)의 각급 선거에서 직선으로 선출된다."

"국회는 현재 349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전원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전국 29개의 대선거구제)로 선출된다. 21개 광역 지방의회는 총 1656개의 의석이 있으며, 290개의 기초 지방의회는 1만 3078개의 의석을 갖고 있다."

2장에서는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운동을 다루고 있다.

"1920년대의 스웨덴은 경제 불황과 실업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당시 사민당의 지도자였던 페르 알빈 한손은 '국민의 집' 건설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932년 다수당으로 집권에 성공한 사민당은 한손을 총리로 하는 정부를 구성하면서 스웨덴 복지국가의 근간을 마련하였는데, 이후 1976년까지 내리 44년 동안 집권하였다.

이러한 '국민의 집' 개념은 이후 에르란데르 총리와 팔메 총리에 의해 현실적 정책으로 승화되었다. 한손의 전임자였던 브란팅 역시 이 개념을 공유하였으므로 '국민의 집' 개념은 브란팅에서 팔메까지 이어지는 60년 남짓 동안 사민주의 지도부가 공유하고 실천했던 사민당의 정치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민의 집' 이념은 1996년 페르손 총리에 의해 생태의 가치가 통합된 '녹색 국민의 집'으로 발전한다. 2005년 사민당의 의장인 모나 살린은 '녹색 국민의 집'에서 사회구성원의 연대의식과 사회적 책임을 다시금 강조하였다."

그리고 4장부터는 스웨덴의 구체적인 사회정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은 개별 복지정책들의 역사적 발달과정과 현황을 문화와 제도적 수준으로까지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천천히 읽다보면, 마치 스웨덴 사람들의 구체적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된다. 때로는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빈틈이 없을 수가! 촘촘하게 잘 짜인 보편주의 복지체계가 평생의 소득보장에서부터 생애주기별 사회서비스의 제공에 이르기까지 물샐 틈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복지정책은 단순한 복지 프로그램들의 패키지나 사회정책에 그치지 않는다. 스웨덴에서 복지정책은 바로 경제정책이다.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인 대립물 또는 이분법적 상치(相馳)의 구조가 아니라 긴밀하게 연계된 유기적 통합체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하나로 잘 짜인 통합적 구조물이다. 스웨덴에서 복지와 경제는 동시에 발전하였다. 이하의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민생의 5대 불안과 주로 관련된 복지제도를 중심으로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아동 및 가족정책이다. 스웨덴의 아동정책은 출산 후 18세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사회적 보호를 내용으로 한다. 스웨덴에서는 "모든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1960년대 전후 경제발전이 활발해지면서 여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늘어났고, 동시에 저출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아동정책을 확대하고 어린이집을 확충하는 일이 절실해졌다. 출산 후, 보통 480일의 출산휴가가 끝나면 어린이집 등에 아이를 맡기게 되는데, 이러한 학령 전 아동센터로는 어린이집, 자유 유치원, 파트타임 유치원, 가정탁아 등을 이용한다.

그리고 12세까지의 아동시설로는 '방과 후 학교'가 있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완벽에 가까운 사회적 보호를 받는다. 출산휴가는 480일이며, 부모가 나누어 사용하되 어느 한쪽도 60일 미만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 기간 동안 평균소득의 약 77%를 급여로 보장받는다. 12세 미만의 자녀가 질병에 걸렸을 경우 부모 가운데 한 명은 간병급여가 지불되는 60일간의 임시부모휴가를 얻을 수 있다. 자녀의 수에 따라 추가적으로 더 늘어나는 방식으로, 자녀의 연령이 16세가 될 때까지 매월 20일에 아동수당을 지급한다. 이러한 아동 및 가족정책은 중앙정부의 정책 가이드라인에 따라 기초 지방정부(코뮨)가 수행한다.

둘째, 노인복지정책과 연금이다. 현재 스웨덴의 노인인구 비율은 18%다. 하지만 잘 구성된 노인복지는 보편주의 복지의 전형을 보여준다. 1913년에 도입된 노령연금제도는 모든 노인을 대상으로 국가가 연금을 지급했다는 의미에서 구빈법과는 성격이 다른 최초의 보편적 복지제도였다. 이 노령연금은 1935년 급여액이 상승하면서 명실상부한 기초연금으로 개혁되었다.

이에 더해, 1959년에는 정치적 우여곡절 속에 고용기간과 소득에 비례한 부가연금제도(ATP)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연금체계는 세계화와 고령화 등의 경제사회적 환경 변화에 따라 1998년의 연금개혁 입법을 불러왔고, 이 법에 따라 2000년부터 새로운 연금제도가 시행되었다. 보장연금, 소득비례연금, 프리미엄연금의 3층 연금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에델 개혁을 통해 노인돌봄서비스와 노인의료서비스가 기초지방정부(코뮨) 수준에서 통합적으로 제공되도록" 하였다. 또 노인복지의 탈 시설화와 재가노인서비스의 강화를 통해 인본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를 통해, 노인정책의 질적 향상과 함께 거시적 효율성도 높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인보지서비스 제공에 민간(사회적 기업)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다는 점도 특이할 만한 사항이다. 노인복지서비스 공급자의 공공-민간 혼합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서비스의 질적 향상과 효율성을 높이려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셋째, 보건의료정책이다.

"스웨덴의 의료제도는 중앙정부, 광역지방정부, 기초지방정부의 3단계로 나뉘어 그 역할과 기능이 상이하게 조직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책임단위는 광역지방정부이다. 독자적인 조세징수권을 보유하고 있는 광역지방정부 업무의 90%가 보건의료에 관한 것인데, 각 광역정부는 의료제도의 운영에서 책임성과 자율성을 가진다."

"진료비는 기본적으로 무상이나 의료기관 방문 시에 미리 정해진 기본진료비를 지불해야 하며, 진료 비용의 연간 상한선이 정해져있다. 의료서비스는 1차, 2차, 3차로 구분되며, 현재 1차 의료기관의 약 25%인 300여개의 진료소가 민영화되어 있다."

의료재원은 거의가 광역지방정부의 조세를 통해 공적으로 조달되는 반면, 1990년대의 의료개혁 이후 의료공급은 공공-민간 혼합을 선택한 것이다. 복지국가 스웨덴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하나의 대응방식인 셈이다. 하지만, 의료재정의 공공성만큼은 끝내 사수하였던 스웨덴 정부의 경험에서 민간의료재정체계 중심의 미국과 대비되는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스웨덴의 대형병원은 거의 모두가 공공병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스웨덴에서 의료서비스의 대부분은 광역지방정부가 책임지며, 노인장기요양서비스는 기초지방정부가 담당한다. 중앙정부는 지역 간 의료수급의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한 교부금을 제공한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의료서비스 제공과는 별도로 중앙정부 차원의 의료보험제도가 있는데, 이는 질병 시기 동안 소득의 손실을 보전하는 상병급여를 담당한다.

넷째, 모든 국민을 위한 살기 편한 집(주택) 정책이다. 주택정책은 삶의 기본요소인 주거를 다루는 사회정책인 동시에 건설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경기를 부양하는 경제정책의 일환이다. 스웨덴의 주택정책은 보편주의를 기반으로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연계 하에서 발전되어 왔다.

"스웨덴 사람들은 18세가 되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을 가든, 직장을 선택하든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립적으로 생활한다. 이때 자신의 주거지를 마련하는 것이 생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다. 학생원룸은 주택 마련의 첫 단계다. 가족이 생기면 아파트를 신청할 수 있다. 사회 초년생들은 코뮨이 운영하는 임대아파트를 빌리거나 조합이 설립한 아파트를 매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개인주택을 마련할 수도 있다."

2007년 연말 현재 스웨덴의 주택 수는 440만 채인데, 그 중 소유권 보장 단독주택은 45%, 조합이 제공하는 소유권 인정 임대주택이 15%, 그리고 임대주택이 40%(이중 22%는 기초지방정부가 제공하고, 18%는 민간 기업이 제공)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스웨덴 국민의 40%는 지방정부 관할 하의 임대주택에 살고 있는 셈이다. 임대료와 주거권 보호를 위해 스웨덴 정부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총체적으로 볼 때, 이러한 스웨덴의 주거정책이야말로 보편적 주거복지라 할만하다.

다섯째, 모두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노동시장정책이다. 스웨덴의 노동시장정책은 전통적으로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010년 현재 스웨덴의 실업률은 8.1%인데, 이는 27개 유럽연합 국가들의 평균 실업률 9.6%에 비해서는 조금 낮은 편이다. 스웨덴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약 84% 수준으로 아주 높은 편이다".

특히,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75%로 유럽연합의 평균에 비해서 15% 포인트나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스웨덴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경제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가히 스웨덴의 고용보험은 빈틈이 별로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우선이며, 실업급여는 노동시장정책에서 최후의 수단이다. 실업급여는 이전 소득의 80%를 지급받으며, 노동일당 상한액이 정해져있다. 실업급여의 기간은 14개월이다. 우리나라의 고용보험이 보여주는 광범위한 사각지대는 스웨덴과 비교해볼 때 사회보험에서 사각지대 없는 실질적 보편주의가 왜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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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당근과 채찍-행동주의 심리학의 용어로는 보상과 처벌-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한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이라는 당근을 주어 달래거나 숙제를 하지 않는 아이에게 벌이라는 채찍을 줌으로써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당근과 채찍은 사회집단 그리고 개인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데 매우 유용하며 그렇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고전적인 경제학에서는 이 당근과 채찍을 주로 경제적 관점에서만 다뤄왔다. 예를 들면 2만 원은 만 원에 비해 두 배의 경제적 가치가 있으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2만 원을 선택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경제적 가치만을 기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6개월 뒤에 사과를 한 개 받을래, 아니면 그 다음날에 사과를 두 개 받을래' 하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6개월에서 하루를 더 기다려 사과를 두 개 받겠다고 대답한다. 사과 한 개보다는 두 개가 두 배의 경제적 가치가 있으므로 이는 고전적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사과를 하나 받을래 아니면 내일 사과를 두 개 받을래' 하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늘 사과를 하나 받겠다고 대답한다. 경제적 가치만을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하루를 더 기다려서 두 배의 가치가 있는 사과 두 개를 받아야 함에도, 사람들은 오늘 사과를 하나 받는 것을 선택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좀 단순하게 대답하자면 사람은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심리적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즉 분명히 사과 두 개는 한 개에 비해 두 배의 경제적 가치가 있지만, 내일의 당근은 오늘의 당근에 비해 심리적 만족도가 낮으므로 사람들은 오늘의 당근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먼 미래에는 사과 2개를 원하면서도 오늘 당장은 1개의 사과를 원하는 '동태적으로 비일관된 선호(time-inconsistent)' 현상이나 경제적 가치가 똑같음에도 손실을 이익보다 2배나 더 크게 보는 '손실회피 경향(loss aversion)' 등은 경제적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경제적 관점만을 근거로 당근과 채찍을 사용한다면 실패를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


▲ <당근과 채찍>(이언 에어즈 지음, 이종호·김인수 옮김, 리더스북 펴냄). ⓒ리더스북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근과 채찍>(이종호·김인수 옮김, 리더스북 펴냄)의 저자 이언 에어즈는 심리학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당근과 채찍 전략을 정교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그는 누군가가 체중을 감량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단순히 100만 원을 벌금으로 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100만 원을 그 사람이 싫어하는 안티단체에 기부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경제적으로는 똑같은 100만 원의 손실이더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에게는 자기 돈 100만 원을 보수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벌금 100만 원보다 훨씬 더 큰 심리적 손실, 채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당근과 채찍 전략을 정교화 시킨 것 중 하나가 '약속실천계약'-자기결박계약(hand-tying contract)-이다. 약속실천계약의 핵심은 미래에 할 선택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데 있다.

"경제적 유인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문제지만 약속실천계약은 전적으로 선택의 폭을 없애거나 줄이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CEO에게 스톡옵션을 부여하는 것은 일종의 유인계약이지만 흡연을 할 경우 친구에게 5000달러를 주는 것은 일종의 약속실천계약이다."

'너무 좋아서 거절할 수 없는 당근과 너무 나빠서 받아들일 수 없는 채찍'을 통해 미래의 선택범위를 축소시킨다면 잘못된 행동을 할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지만, 금연에 성공하면 100만원을 받게 되지만 실패할 경우에는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단체에 500만원을 기부하도록 약속한다면 금연성공률은 가파르게 높아지지 않겠는가.

저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듯이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심리적 가치까지 고려하는 정교한 당근과 채찍 전략은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하는데 커다란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잘 짜여 있더라도 당근과 채찍이라는 행동교정수단을 사용할 때에는 특정한 당근과 채찍이 인간심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사람은 당근과 채찍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내고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이다. 문제풀이에서 정답을 맞추는 대가로 돈을 주게 되면 수행정도가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돈을 위해 문제풀이를 한다고 느끼게 되어 흥미를 잃기 때문이다. 또한 벌금 제도를 도입하자 지각이 오히려 늘어났다는 보고도 있는데, 그것은 지각을 해도 돈을 내면 그만이므로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근과 채찍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데, 이런 점을 면밀히 고려하지 못하면 원치 않았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에 기초한 당근과 채찍은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근과 채찍으로 단순한 인간행동은 변화시킬 수 있지만 인간심리를 변화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병에 입을 대고 우유를 마시지 않겠다는 단순한 약속을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내에게 말하는 태도를 바꾸고 싶다. 이런 문제들은 명확하지 않다."

약속실천계약으로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더라도 또다시 다른 중독에 빠지는 '중독전이(addiction transfer)' 현상, 어떤 약속실천계약이 종료되는 순간 그 효력이 상실되는 교정효과의 단기성 등은 당근과 채찍이 단순한 행동은 바꿀 수 있지만 그 행동의 원인이 되는 심리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따라서 근본적인 사람의 변화,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당근과 채찍이라는 수단 이상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약속실천장치를 지속적으로 정교화 하고 영구화하면 이런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인생의 너무 많은 면에서 보상금을 주어 어떤 일을 장려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그 여부가 궁금하다. 극단적인 경우 자신의 모든 행동을 완벽하게 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엄격하게 계산하고 확인하는 끔찍한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약속실천장치는 적절히 활용되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는데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보상이나 약속실천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 역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어쨌거나 당근과 채찍을 위주로 움직이는 세상은 분명 각박한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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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2>(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창비 펴냄)는 "토머스 핀천과 더불어 미국 포스트모던 소설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돈 드릴로의 1991년 작품이다. 펜/포크너 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또 돈 드릴로의 소설 중에서는 <화이트노이즈>(강미숙 옮김, 창비 펴냄), <리브라>(정회상 옮김, 창비 펴냄), <바디 아티스트>(정영문 옮김, 새물결 펴냄)에 이어 국내에서 네 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통일교, 반정부 활동으로 수감된 남한의 작가 등 한국적인 요소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등장하기도 해서 더 흥미를 끈다.

빛바랜 스펙터클

<마오 2>는 원래 '통일교 집단결혼식'이라는 낯설고 기괴한 장면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1991년의 미국 독자가 아니어서인지, 나에게 이 장면은 충격적이거나 압도적이지 않다. 그것은 종교적이기보다는 경제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결혼에 대해 낭만적이고 근대적으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자들이 3~4일 출장으로 베트남 우크라이나, 키르키즈스탄 처녀들과 손쉽게 결혼할 수 있는 산업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집단결혼식'이라는 관념은 더 이상 이상하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 <마오 2>(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창비 펴냄) ⓒ창비
또 이 소설의 핵심은, '군중'이라는 스펙터클을 이룬 타자들이 촉발하는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는 '테러리즘'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의해 구체화된다. 하지만 이 역시 국내 독자들에게 특별히 효과적인 장치 같지 않다. 이는 소설이 타자화하는 대상을 타자로 느낄 수 없는 한국 독자의 처지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테러를 신비로운 공포로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테러를 익숙한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몇 배는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는 지난 20년간 수많은 '테러'와 '테러에 대한 테러'를 겪어왔다. 알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찬 타자의 테러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향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은 많은 독자들에게 놀라운 것이 아니라 새삼스러운 것이다. 그런 독자들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으로 빠뜨리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이, 문명의 탈을 벗고 드러낼 끔찍한 맨얼굴이다.

아무튼 그래서 소설이 꽤 공들여 동원하고 있는 '군중의 스펙터클'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 통일교 집단결혼식의 신랑신부들, 홍위병들과 천안문광장의 시위 참여자들, 호메이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들, 톰킨스 스퀘어의 노숙자들…… 이들이 소설 속에서 워홀의 실크스크린 같은 효과를 낸다는 점만 기억하면 될 것 같다.

줄거리

편의상 줄거리를 요약해보자. 어차피 이 소설에서 플롯은 중요한 요소가 아닌데다가, 이미 다른 서평들, 인터넷서점 책 소개 등에서 다양한 판본으로 요약되어 유통되고 있는 마당이라,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가의 비서(이자 소설가의 가장 충성스러운 독자) 스콧이 여성 사진작가 브리타를 데리러 뉴욕으로 온다. 그들은 뉴욕 근교 어딘가에 있는 소설가 빌 그레이의 거처로 간다. 브리타는 거기서 빌의 사진을 찍고, 빌의 또 다른 비서인 캐런을 만난다. 캐런은 통일교도로 양키스타디움에서 집단결혼식을 올렸던 수많은 신부들 중 하나다. 어쩌면 사진작가 브리타와의 만남을 계기로, 빌은 비밀스런 유배의 기간을 끝내고 세계로 나오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스콧은 빌이 세 번째 소설을 영원히 퇴고만 하고, 발표하지 않는 것이 그의 소설 세계를 완성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원칙을 강조한다. 브리타를 통해 빌의 옛 친구인 편집자 찰리가 소설가에게 도움을 청한다. 빌은 스콧의 만류를 뿌리치고 뉴욕에 있는 찰리의 출판사를 방문한다.

찰리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고결한 어떤 위원회"의 위원장인데, 이 위원회는 출판업자와 학자들로 구성된 신생 단체다. 찰리는 레바논의 신흥 공산주의 조직에 의해 억류된 스위스의 무명 시인을 석방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빌이 런던에서 그 시인의 시를 낭송하면 좋겠다고 제안한다(이는 테러 조직이나 찰리의 위원회를 똑같이 뉴스의 중심으로 끌어올릴 만한 사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폭탄 테러로 인해 낭송회와 기자회견은 무산된다. 빌은 레바논의 테러 조직과 찰리의 단체를 이어주는 그리스의 정치학자 조지를 찾아간다. 빌은 시인을 대신해 인질이 되고자 하지만, 엉뚱한 사고로 베이루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얼마 후 브리타가 테러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의 사진을 찍기 위해 베이루트로 간다. 브리타는 이제 더 이상 작가들의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이 소설은 수많은 흥미로운 문제들을 '이미지화'해서 그 적은 분량에 꾸역꾸역 욱여넣고 있다. 그 이미지들에서 어떤 의미를 취하고 버릴 것인지는 보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가령 믿음의 문제("저는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 저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집착해요. 그것도 많이, 그리고 모든 곳에서. 그들이 없다면 지구가 식어버릴 거예요"), 혹은 일에 대한 생각("그녀는 이만하면 됐다는 느낌이 든 후에도 일을 더 하기를 좋아했다. 계속 일을 하며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도 넘어서 은밀한 축복의 순간을 접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진가의 시점에 관한 생각("저는 만리장성 위를 걷고 있는 어떤 남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둘이 반대쪽에서 서로를 향해 걷고 있다더군요. 그 사람들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저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아요. 만리장성이 풍광 속으로 굽이치고 조그만 두 인간 형상이 먼 지방에서 서로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모습 말이에요. 저는 이게 지구에 대한 존경의 이야기, 우리가 이 지구에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속해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제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런 고공에서의 풍경을 생각해내는지 신기하고요")…. 타자기와 워드프로세서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개인적으로 유용했던 통찰은 출판업자와 작가와의 관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모든 주제들이 서로 다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연관성을 살피려면 수백 페이지짜리 논문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소설과 테러의 공통점

무엇보다 <마오 2>가 던지는 문제 중에 가장 의미심장하고 시의적절한 것, 그래서 가장 재미있는 주제는 이것이다. 오늘날 소설의 경쟁상대는 누구인가? <마오 2>는 아주 노골적으로 '테러, 혹은 테러를 다루는 뉴스'를 지목한다.

"소설가들과 테러리스트들을 묶어주는 야릇한 끈이 있다오. 서구에선 우리가 쓴 책이 뭔가를 형성하는 힘과 영향력을 상실함에 따라 소설가들은 유명한 화형식용 허수아비가 되어버렸어요. (…) 수년 전 나는 소설가가 문화의 내적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폭탄 제조자들과 총잡이들이 그 영토를 빼앗아 가버렸지요. 그들이 인간의 의식을 공략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포섭돼버리기 전에 작가들이 하던 바로 그 일을 말이오. (…) 우리가 테러에 밀려나고, 테러 뉴스에 밀려나고, 녹음기와 카메라에 밀려나고, 라디오와 라디오에 장착된 폭탄에 밀려나는 것을 말입니다. 재난 뉴스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유일한 서사가 되었지요. 뉴스가 암울하면 암울할수록 서사는 더 웅대해지고, 뉴스는 마지막 중독, 그 뭐랄까, 그다음에 오는 건 알 수가 없소."(64~65쪽)

"선생님은 종말론적 힘을 갖는 뉴스의 등장으로 인해 작가들이 소멸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 비슷한 이야기를 내게도 했어요."

"소설은 우리의 의미 추구를 만족시켰지요, 빌의 말을 빌리자면 말입니다. 과거에 소설은 위대한 세속적 초월이었지요. 언어, 인물, 그리고 가끔씩은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는 라틴어 미사 같은 것. 하지만 우리의 절망이 우리를 좀 더 거대하고 더욱 어두운 뭔가에 이끌리도록 만들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파국의 분위기를 제공하는 뉴스로 끊임없이 눈을 돌리는 겁니다. 뉴스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서적 경험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죠. 우린 소설이 필요 없게 되었어요. 빌의 말에 따르자면. 우리에게 파국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지요. 단지 보도와 예측과 경고만 있으면 되니까." (112쪽)

이런 구도는 일견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다. 소설과 테러가 어떻게, 왜 경쟁을 한단 말인가? 소설이 테러만큼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소설이라는 근대적인 서사양식이 종교를 대체했듯, 이제 테러라는 폭력이 소설을 대체한다는 좀 더 복잡한 이야기인가? 물론 어떻게 해석해도 다 말은 된다(이 소설 최대의 장점은 무슨 해석을 가져다붙여도 다 말이 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이 돈 드릴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은 논문이 아니므로, 해당 지면 안에서 수습 가능한 정도로 범위를 좁혀두려고 한다. 일단 경쟁을 하려면 공통의 자원, 공통의 목표, 공통의 대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최소한의 공통점이 필요하다. <마오 2>에 따르면, 소설과 테러의 공통점은 둘 모두 사람(그것이 개인이든 군중이든)에게 가장 근본적인 서사, 즉 정체성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그 소설은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거울이다. 소설을 쓰는 한 그는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 걸어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라고 말해본 적"(324쪽)도 없다.

"나는 언제나 문장 속에서 나 자신을 보아왔어요. 문장을 만들면서 나는 한 단어 한 단어씩 나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지요. 내 책의 언어가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형성시켰단 말입니다. 하나의 문장이 갓 만들어지면 거기엔 하나의 도덕적 힘이 있어요." (75~76쪽)

이는 독자에게도 적용된다. 스콧은 빌의 소설을 읽고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누군가가 제게 빌의 첫 소설을 읽으라고 주기에 저는 우아, 이게 뭐야, 그랬지요. 그 책은 어떤 면에선 저 자신에 관한 책이었어요. 너무 놀라지 않기 위해 저는 그 책을 천천히 읽어야만 했어요. 저 자신을 보았죠. 그건 제 책이었어요. 제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대한 어떤 것. 그는 이리저리 모든 걸 다 포착했어요. 모든 것들이 거의 어디에건 들어맞고 또 어떤 것도 완전히 망각되지 않게 말이죠." (81쪽)

스콧은 그 후 빌에게 열정적으로 편지를 보내고, 급기야 몇 년에 걸쳐 집요하게 그를 찾아냈다. 이제 그의 삶은 빌이 그의 소설과 삶을 가장 완벽하게 완성하도록 돕는 일이 되었다.

레바논의 테러 조직은 소년들에게 지도자의 사진을 준다. 소년들 주변에 그들의 삶을 바꿀 만한 소설책을 쥐어주는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년들에게는 삶을 성취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소년들에게 필요한 서사는 더 강렬하고 단순한 것이다. 지도자의 이미지. 혹은 가장 완벽한 결말을 가리키는 지도자의 손가락. 이는 이제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자랑하는 근본적인 서사가 이미지에 가장 가까워진 서사, 아니 이미지 그 자체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정체성과 목적의식을 가르칩니다. (…)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뭔가 강력하고 자주적인 것에 속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아이들은 유럽의 발명품이 아니에요. 이 아이들은 신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아이들을 천국에 가도록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여기엔 순교자는 없어요. 라시드의 이미지가 그들의 정체성이죠." (347쪽)

우리 시대의 가장 지배적인 매체가 소설이 아니라, 뉴스 혹은 테러라는 말은, 또 이 시대의 지배적인 서사가 시작에 관한 것(창조론)이 아닌 결말에 관한 것(종말론)이라는 말이기도 하고, 또 이 시대의 지배적인 감정구조가 파국을 향한 갈망, 희열/불안, 공포라는 말이기도 하다. 당대에 관한 <마오 2>의 통찰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소비자본주의, 미디어산업 같은 것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대목들이다.

"이루는 게 뭐냐고요? 이 아이들에게 비전을 주고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할 겁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하는 협소한 기능을 넘어서는 하나의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무기력하게 잊혀진 그들 부모와 조부모들의 삶을 완전히 넘어서는 그 무엇 말입니다." (346쪽)

"이분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 인민들에게 세계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찾아주는 게 바로 테러라는 뜻입니다. 일을 통해 성취되던 것들을 우리는 테러를 통해 획득하는 것이지요. 테러를 새로운 미래를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 되게 해주지요. 과거 어느 때와 달리 지금 인간은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분 말씀은 우리는 매순간 역사를 만들고 바꾼다는 뜻이지요. 역사는 책도 아니고, 인간의 기억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침에 역사를 만들고 점심식사 후에 그것을 바꾸는 거예요." (350쪽)

오늘날 가장 희소한 자원은 대중의 흥미다

"지금껏 나는 소설가들과 테러리스트들이 일종의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소."

"흥미롭군요. 어떻게 그렇지요?"

"테러리스트가 얻는 걸 소설가들은 잃으니까. 대중의 의식에 그들이 영향을 미치는 크기는 감성과 사상의 형성자로서 우리가 쇠락하는 정도와 같으니까. 그들이 대변하는 위협은 우리가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위협의 크기와 일치한다는 말이오."

"우리가 테러를 명확히 꿰뚫어보게 될수록 예술로부터 받는 영향은 더 적어진다는 말씀이군요."

"내 생각엔, 그걸 측정만 할 수 있다면 이 관계는 긴밀하고 정확하다고 보오." (239쪽)

소설과 테러, 그리고 뉴스가 경쟁한다. 이데올로기로서도 그렇지만 상품으로서도 그렇다. 살아남기 위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영토는 무엇인가?

"불명료하고 과포화된 사회에서는 테러가 유일하게 의미 있는 행위입니다. 모든 게 너무 많아졌고, 우리가 천 번의 생애를 되살면서 음미해도 남을 만큼 메시지와 의미들이 도처에 널려 있지요. 무기력-히스테리아. 역사가 가능한가요? (…) 예술가도 흡수돼버리고, 길거리의 광인도 흡수돼서 관리되고 편입돼버리지요. 돈 몇 푼 집어주고 텔레비전 광고에 내보내니까 말입니다. 테러리스트만이 체제 바깥에 서 있지요. 문화는 아직도 테러리스트를 동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겁니다. 그들이 선량한 시민을 죽이면 혼란이 일어나지요.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이 주목을 받기 위한 언어, 서구세계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가 아닌가요. (…) 은밀한 삶, 모든 불인정과 무시 근저에 깔려 있는 분노를 이해하는 사람이 바로 소설가란 말입니다. 당신들은 절반의 살인자들인 셈입니다." (240~241쪽)

정보와 의미가 과포화된 사회에서 이제 희소해진 것은 정보의 '제공자' 혹은 '정보' 그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수용자'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경쟁의 진짜 구도는 소설 대 테러, 소설 대 뉴스가 아니다. 서사 대 이미지도 아니다. 오히려 정보의 '제공자'(생산자) 대 '수용자'(소비자)다.

이는 오늘날 '언어'로 먹고사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용자의 관심을 받기 위해 정보는 최대한 강렬해져야 하고 단순해져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도, 일국 차원이 아닌 세계적 차원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는 가장 강렬하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언어가 무엇인지 고민한다.

새로운 서사의 특징

그렇다면 뉴스를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뉴스에서 무엇을 얻는가? 가령 캐런은 테러 조직원이 되는 대신 통일교 신도가 되었고, 이제 재난 뉴스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소설에서 가장 미래적인 인간형이다.

"그녀는 주관이 약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믿었다. 고통, 환희, 애완견 사료, 모든 거룩한 것들,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기 천사의 희열. 스콧은 그녀를 쳐다보면서 기다렸다. 그녀는 미래의 바이러스를 지니고 다닌다, 빌의 말을 인용하자면." (182쪽)

캐런은 뉴스 이미지에서 앵커가 전하는 말보다 훨씬 많은 것을 듣고, 뉴스 속 이방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사람이다. 새로운 서사는 '독창성'을 통해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소설은 타자를 다루기보다는 '나'를 다루기에 적합한 양식이다. 뉴스는 타자를 다루는 양식이다. '내'가 아닌 '타자'를 다루는 서사에는 윤리나 도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보다는 공포나 믿음이 어울린다.

"캐런은 자신이 테헤란 남부의 빈민가로 들어갈 수도 있고,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어버이를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는 그들의 말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기상나팔에 잠을 깨는 모든 빼앗긴 자들. 슬픔, 슬픔이 오늘이다." (287~288쪽)

<마오 2>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이야기 형식들 중에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인질'의 것이다. 인질은 <마오 2>의 중심인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무척 약하다. 방치와 무의미 속으로 내던져진 채 스스로를 지키려 고투하는 '시인'이자 '인질'. 시간이 지나면서 인질을 감시하는 소년의 행동이 느슨해진다. 소년은 식사 후에 인질에게 두건을 씌우는 일을 잊고, 구타하는 것을 잊고, 마침내 식사를 주는 것도 잊어버린다.

"그는 이제 파동 속으로 사라져 컴퓨터 회로를 위한 또 하나의 약호, 너무 의미가 없어서 해결할 필요도 없는 미미한 범죄의 기억이 되어버렸다. 지금 누가 그를 알아보겠는가? 소년을 제외하고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그의 정부가 그를 버렸고, 다음에는 그를 고용한 조직, 그 다음엔 그의 가족이 그를 버렸다. 이제는 그를 납치하여 지하방에 감금한 사람들마저 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렸다. 누구의 방치가 그를 가장 크게 괴롭히는지 말하기도 어려웠다." (171~172쪽)

소설 속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잊고, 그의 실체는 마침내 독자에게조차 가물가물해진다. 이런 총체적 무의미와 고투하던 인질은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할 수 있는 서사를 필요로 하고, 나중에는 자신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서사를 필요로 한다.

"그가 누구인지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루하루는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 인질은 가장 단순한 사실들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모두 사라지면 그는 자신이 그 소년 속 어딘가에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 옛날이야기들은 언젠가 시도된 적이 있는 진실이었다. 그림자 같은 여자와 비오는 날 텅 빈 건물 속 계단에서 섹스하기. 진부할수록, 흔할수록, 예상하기 쉬울수록, 케케묵을수록, 더 멍청할수록, 그런 이야기는 더 좋았다. 그가 독창성을 위해서 시간을 벌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70쪽)

이렇게 새로운 서사는 옛날이야기들과 닮아 있다.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반복되어오는 이야기.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힘을 지닌 이야기. 타자를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주관성 안에 갇혀 있는 서사보다는 이렇게 타자로 향할 수 있는 서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렇게 타자에 압도당한 채 자신을 잊게 만드는 서사란 그냥 멍청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마오 2>가 던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의 저작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부패로부터 보호하는 겁니다. 그러면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니까요. 아이들은 부모가 해준 이야기들을 기억하지요. 아이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원하고 또 원합니다. 한 단어라도 바꾸면 아이들은 엄청나게 당황하지요. 이게 바로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문화가 필요로 하는 불멸의 서사입니다. 중국에서 그 서사는 마오의 것이었지요. (…) 마오는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의 신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중국 인민대중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것, 역사가 군중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겠지요." (248쪽)

누가 이겼나? 혹은 누가 이길 것인가?

소설이 기존의 막강했던 권위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 작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군중이 미래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예언. <마오 2>는 이것을 마치 '재난 뉴스'처럼, '테러'처럼, 아니 그보다 웅장하게 선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패배를 선언하되 스펙터클하게. 가령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장이자, 이 책의 서평자들이 빼놓지 않고 인용하는 문장은 이런 것이다. "미래는 군중들의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장엄한 어투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진부하게 들리지 않는가?

가라타니 고진이 '소설(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할 때, 그 소설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으로, 시대정신을 담고 있고 역사적인 책무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던 장르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마오 2>에서 파국을 맞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내가 왜 소설의 가치를 믿는지 아시오? 그건 소설이 민주적 함성이기 때문이지. 누구나 위대한 소설, 하나 정도의 위대한 소설은 쓸 수가 있어. 길거리의 아마추어라도 말이오. 난 이걸 믿소, 조지. 이름 없는 막노동꾼이나 꿈도 하나 키우지 못한 무법자라도 앉아서 자기 목소리를 찾을 수가 있고 운이 좋으면 소설을 쓸 수도 있는 거지. 천사 같은 그 뭔가가 우리 입을 벌어지게 한단 말이오. 재능의 물보라, 생각의 물보라. 모호함, 모순, 속삭임, 암시. 이게 바로 당신들이 파괴하려는 것들이란 말이오." (243쪽)

이러한 빌의 항변 정도가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소설'의 실체에 관한 거의 유일한 언급이다. 우리는 <마오 2>에서 소설가 빌이 쓰고 있던 소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그것을 쓰고 있었다는 것만을 안다. 하지만 정말로 빌의 '세 번째 소설 원고'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저 뭔가를 쓰는 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이 경합의 결과가 어떨지는 무척 흥미로운 문제다. 그래서 소설은 이미 자신의 시대적 소임을 다하고 사라져가는 중인가? 소설가는 죽고 뉴스 시청자들만이 살아남을 것인가? 이미지와 광고, 트위터만 남고 책은 죽어버릴 것인가?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오 2>를 읽고 나서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마오 2>야말로 이 '시의적절한'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이제 소설이 아니라는, 생생한 예고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사족 하나. 우리는 당분간 재난뉴스가 소설을 대체해버리는 상황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근 1주일 동안 TV를 지배한 '소말리아 해적' 뉴스를 보고 있자니, 2011년 한국에서 뉴스는 상품으로서든 이데올로기로서든 그다지 경쟁력 있는 서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뉴스라기보다는 국정홍보처의 광고물 같다. 그 이미지에서 글로벌한 갈등, 끔찍한 재난, 납득할 수 없지만 압도적인 슬픔 따위는 그저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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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일본 유학 시절, 학교가 주최하는 일본어 연설 대회에 나갔던 중국인 친구 S의 연설 주제는 "일본에는 왜 장애인이 많은가"였다. 자신이 살던 광저우의 학교나 거리에선 장애인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도쿄에선 너무 자주 봤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일하던 세탁소에도 신체적으로 불편한 손님들이 참 많았다. 시각장애인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능숙하게 빨래를 맡기곤 했다.

회사가 있는 경복궁역 근처가 도쿄만큼 장애인이 '많은' 곳이다. 왜인가 했더니 시·청각장애인 학교가 있어서다. 입사 전부터 중고교 시절까지 거슬러 통틀어 보면 이렇게 장애인 인구가 많은 걸 언제 봤나 싶다. 음? 가만 보자. 어릴 때 교회 주일학교나 동네에서는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솔직히 그들에게 살갑게 굴진 못했다. 하지만 철이 들었을 무렵엔 이미 '그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간 걸까?

아아, 그렇다. 우리는 그 버스가 지날 때마다, 움츠리는 시늉을 하며 'OO이다!'라고 외쳤었지. 특수학교의 교명인 OO은 여자 아이에게 붙이는 흔한 이름이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서 장애인을 지칭하는 은어로 쓰였다.

중국 친구 S가 발견한 차이는 바로 이거였다. 서울이나 광저우나, 그들은 있을 곳에만 있다는 것. 그들은 우리가 살짝 몸을 피했던 그 버스에 몸을 싣고, 다른 학교로 갔었다.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배우거나 지내지 않았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차별이란 이처럼 악의적인 괴롭힘이 아니라, 차별받지 않는 이들을 망각하게 하는 장치가 아닐까. 현실의 잔인한 측면은 나를 안전하게 감싸주는 프레임 너머에 있음을 항상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만의 세계, 숏 버스


▲ <숏 버스>(조너선 무니 지음,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부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숏 버스는 그렇게 분리된 공간을 상징한다. 미국에서 장애 학생들이 특수학급으로 이동할 때 이용하는 차량이다.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수용해서, 교정을 위한 '특수교육장'으로 보내는 이동 수단이란 얘기다. 저자 조너선 무니는 숏 버스를 상상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친절히(!) 설명한다. "숏 버스는 물리적 현실이라기보다는 억압적 경험을 상징하는 쪽에 가깝다"고.

저자의 인생에서 숏 버스는 괴로움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끝 무렵 주의력 결핍으로 인한 학습장애 진단을 받아 숏 버스를 타고 다니며 특수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년 시절에 "특수교육의 한복판"에서 "주의력결핍학습장애라는 사이비과학적 진단명을 목에 걸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집중과 읽고 쓰기를 할 수 없었던 그에게 교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결국 6학년 때는 잠시 학교를 그만두었고 열두 살 무렵에는 자살을 결심한다.

읽기와 쓰기에 장애 진단을 받았던 그가 이 책의 '저자'라니? 실은 무니는 미디어에서 그토록 열광하는,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나 '발가락에 붓을 끼운 화가'처럼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햄버거 패티나 뒤집게 될 것이라는 진학 상담 교사의 저주를 통쾌하게 뒤집고, 명문 브라운 대학 영문학과를 나와 작가로 산다. 그야말로 "자기 계발 업계의 스타덤"에 오를 수 있는 이력을 갖춘 인물이자, 무니의 인생을 영화화하겠다고 나선 영화제작자의 표현처럼 "미국식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인 셈이다.

그러나 <숏 버스>(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는 자신을 둘러싼 '성공 스토리' 운운이 사기극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다. 무니는 그토록 벗어나려 노력했던 숏 버스를 중고로 구입해, 그걸 타고 미국 전역 5만 6000킬로미터를 여행할 계획을 세운다. 목적은 자신처럼 '비정상' 딱지를 붙이고 사는 이들을 직접 만나보는 것. 왜 돌아가려 하는지 본인도 잘 모른다고 말한다.

다만 어린 시절 "자, 오늘은 정상적으로 행동해 보자"라는 말에 역겨워 했던 특수학급에서 이젠 '먼저 정상이 된' 역할 모델로서 강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무니 선생님은 '한때'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특수학교 연단에서 "정상인들은 역겨워요!"라고 외친다. 그토록 정상인이 되려고 아등바등하며 괴로워했는데, 왜 모두 정상인이 되어야 하지? 그게 뭐지? 저 아이들은 교정되어야 할 환자가 아닌데!

불편한 여행, 솔직한 고백

이런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숏 버스>는 성공 스토리도 아니요, 정상이라는 범주 바깥으로 내팽개쳐진 인물들을 어루만지는 따뜻하고 감성적인 여행기도 아니다. '역겨운' 정상인들에게 배제 당했다는 이유로, 괴짜나 장애인만이 옳거나 자유로울 수 있는 상상적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다.

무니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미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 모습과 쏙 빼닮은, 학습장애 판정을 받은 브렌트를 만나러 가는 첫 여정에서부터 가슴에 단단한 뼈다귀가 걸린 것 같은 역겨운 기분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다. 이런 느낌은 여행 곳곳에서 반복된다. 통장을 탈탈 털면서까지 불편한 여행을 자처한 데 대해 몇 번이고 후회도 한다.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상황에 대한 묘사도 가감 없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판정을 받은, "약간 맛이 간" 개념미술가인 켄트 로버츠에 대한 평가는, 자신의 대학 동기여서 더욱 그렇겠지만 더욱 신랄하다. (그리고 늘 연민보다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의 주의력은 각다귀 수준"이라든가, "그가 제발 좀 나처럼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든가. 무니의 필치 역시 정신없는 사람들의 일상 그대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날뛰듯 생생하다.

자신처럼 '사이비과학적 진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정말 다른 사람들, 세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들에 대한 이해는 더욱 쉽지 않다. 시청각 장애인이자 왼쪽 눈이 오른쪽 눈보다 두 배 크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여덟 살 소녀 애슐리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스스로의 '비인간적인 응시'를 경험한다.

애슐리를 입양해 키우고 있는 데보라가 "정말 예쁘지 않아요?"라고 물었지만 무니는 대답하지 못한다. 데보라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슐리라는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애슐리와 내가 정말로 같은 범주에 속하는지 의심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이런 불편한 고백들을 거리끼지 않는 것이 이 책이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거침이 없고, 착한 척 하기보다 차라리 유머를 구사한다. 우리가 저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무니가 데보라에게 당신의 딸을 빤히 쳐다보았다며 사과했을 때 그녀가 던진 대답과 같을 것이다.

"괜찮아요. 당신은 벌써 첫걸음을 내디딘 거예요. 솔직하게 말했잖아요."

"정상이란 건 없어?!"

우리는 '한 때 겪어봐서 아는데…'라는 대통령의 말을 조롱한다. 한 때 OO였기에 네 사정에 공감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유리한 위치에 올려다 주며, 그만큼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칼이 되기 쉽다. 무니에게도 "당신이 과거에 그런 경험을 한 건 좋은데, 이제 '비정상' 딱지를 떼지 않았느냐"고 삐딱하게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과연 현재 '정상'인가? 과거 노동자였기에 노동자를 이해한다고 허세부리는 CEO처럼, 어떤 상태를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숏 버스>가 반복해 강조하는 것은 정상이란 상태의 임의성이다. 사람들은 무니가 비정상 상태를 교정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의 본질은 그대로다. 또한 매번 바뀌는 숏 버스의 승객들에 비하면 저자 무니는 얌전하지만, 약혼자 베키의 교양 있는(?) 부모님 앞에서는 딴 세계 사람이다.

게다가 정신·신체 상태를 정상/비정상으로 가르는 잣대 이면엔 편의란 이름의 폭력이 존재한다. 저자가 인용한 레너드 데이비스의 <정상 강요>에 따르면 1860년까지 영어에는 '정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미국의 도시 인구가 불어나고 세계 도처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듦에 따라, 국가가 인구수를 통제하겠답시고 본격적으로 출현시킨 용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아무나 '정신지체자'로 만들 수도 있다. 미국정신지체협회는 1973년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용어 개편을 통해 정신지체의 기준을 '정상 IQ'의 표준편차 한 가지에서 두 가지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신지체로 분류되었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비정상 딱지들은 임상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것들은 치료되고 교정되어야 할 게 아니라 다양한 형질 중 하나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특히 인지적 차이를 기능장애로 해석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부모들이 자녀의 신경 결함만 탓하게 되면서 모든 아이를 위한 제도 개혁을 방기한다는 것이다.

"함께 할 때 우리는 전보다 나은 존재가 된다."

그렇지만 "누구도 정상(비정상)은 아냐!"라는 말이 명백히 존재하는 차이마저 가려주진 않는다. 지역 대학에 다니며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애도 하고 가십에 해박하기도 한 '평범한' 소녀 케이티는 염색체 수가 46개가 아니라 47개다. 즉 다운증후군이다. 이 태생적인 차이마저 벌거벗은 임금님의 비단 옷을 칭찬하듯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그 한 가지 차이를 모든 조건에 적용시키거나, 열등하다고 여기는 건 오류다. 그러나 TV에서는 여전히 성인 장애인들에게도 애들 대하듯 반말을 던지곤 한다.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자는 얘긴 공익광고에도 나온다. 오랫동안 반복돼 온 구호다. 그런데 왜 자꾸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모순과 폭력이 깃들까. 앞서 얘기한 S의 관찰을 적용시켜보자면, '우리'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가 생각보다 분리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도쿄의 장애인 수가 광저우의 그것보다 많은 게 아니라, 다양한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이 많은 도시야말로 좋은 도시"라고 S는 연단에서 말했었다.

우리가 정신지체 또는 발달장애로 알고 있는 인지 상태도 본래 작은 농촌 마을의 삶에서 항상 있어 온 부분이라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는 얼간이와 바보를 관대하게 바라보았고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낭만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근대 의학의 도래와 함께 공동체 속에 통합되어 살던 사람들이 재활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로 간주되었고 20세기 들어서는 '(완치되면) 공동체 속으로 복귀시킨다'는 목표마저 허물어졌다. 그들은 시설에 수용되어야 했다.

과거의 빅브라더는 사람들을 안에 가둬두고 줄을 세웠지만, 현대의 빅브라더는 사람들을 계속 밖으로 쫓아 분리해 낸다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말했었다. 노인은 실버타운으로 장애인은 장애인 시설로 정신지체아들은 특수학교로 분리되는 현상은 공동체의 붕괴, 도시 외곽의 슬럼화와 함께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면 정말 모두 다, 숏 버스다.

왜 우리가 좀 더 섞여야 할까. 이러저러한 사회과학적 이론들을 갖다 쓰기보다, <숏 버스>에 나온 문답을 인용하겠다. 무니의 다소 공격적인 질문, 그리고 다운증후군 소녀 케이티의 엄마 칸디의 약간은 낭만적인 답이다.

조너선 무니 : 만약에 다운증후군이 말살된다면 어떤 면에서 손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칸디 : 열대우림과 같겠지요. 그 손실이 어떤 것일지 우리는 몰라요. 하지만 내 존재가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건 우리가 좀 더 인간답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함께할 때 우리는 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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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서 투병중인 딸을 면회하고는 채 서있지도 못하시던 엄마는 집에 돌아와 기르시던 화분에 물을 주십니다. 잠시 손길이 미치지 못한 새에 연약한 생명들이 말라버릴까 엄마는 잰 걸음으로 물을 길어 나르십니다. 젊은 주제에 기운이 빠져 널브러져 누워서는 그런 엄마를 보며 마음속으로 생명이라는 말을 되뇌어 봅니다. 위태로운 생명을 보살피려는 저 작은 손길, 잰 걸음, 그 안타까운 마음자리가 바로 생명을 낳고 기르는 존재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선생님이 '엄마의 말뚝'이라는 화두를 통해서 평생 되뇌셨던 그 물음에 대해서 저도 다시 곱씹어보았습니다. 문득 '엄마 노릇에 대한 선생님의 평생에 걸친 질문이 결국 작가의 자리, 혹은 작가 노릇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구나'라는 깨달음을 뒤늦게 얻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선생님을 뵙고 돌아와, 투병 중인 언니의 침상 곁에서 <엄마의 말뚝>을 떠올렸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삶의 고비마다 <엄마의 말뚝>을 꺼내보고 곱씹어보는 일이 제게는 삶의 버릇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 며칠은 다른 날들과는 다른 의미로 <엄마의 말뚝>을 펼쳐보게 되었지요. 선생님을 보내고 나서, 그 빈자리를 매만지는 심정이랄까요. 선생님을 잃은 상실감을 되돌아볼 틈도 없이 원고 청탁 전화벨이 울려댑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애도는 시간이 걸리는 문제일진대, 마감 시간은 애도의 시간을 갉아먹는군요. '지금 시점에서 글을 써야하나' 마음속에 망설임이 듭니다. 그러나 원고를 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선생님을 잃은 상실감에 대해 원고를 쓰는 일은 애도의 작업일까 직업의식일까 자문해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다루는 일인지라 지금 글을 쓰는 나의 행위는 과연 무엇일까, 그 윤리적 자리에 대한 물음이 떠날 수 없게 되네요. 그렇지요? 선생님이 평생 작품을 통해 글쓰기의 윤리적 자리에 대한 고민을 묻고 또 물은 이유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을 쓰는 이의 노릇이라는 것이 바로 죽음이나 삶과 같은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다루는 일이면서도 그저 한갓된 직업의식에 불과한 일이 되어버릴 수 있는 위태로운 자리라는 성찰 말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 혹은 작가의 노릇이란 신성함과 속됨 사이를 어렵사리 연결하고, 오고가는 것이겠지요. 소설뿐 아니라 산문까지 다양한 선생님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선생님 작품에서 세속의 속내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날카로운 포착력에 감탄하면서 그 날카로움 뒤에 존재의 비의라던가 운명이라던가 하는 어떤 신성한 울림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겠지요.

참, 산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보니, 전집 문제로 선생님과 이러저러 논의를 주고받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선생님 에세이들이 너무 이리저리 흩어져있고, 또 다소 홀대받고 있는 점에 대해 아쉬움이 크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많은 남성 작가의 전집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에세이가 함께 수록되어서, 그 작가의 작품 세계나 작가 인식 같은 것을 살펴볼 때 에세이가 참 중요한 참고 대상이 되고 있죠.

헌데 여성 작가의 경우는 별로 그런 경우가 없는 게 항상 아쉬웠답니다. 특히 선생님의 에세이는 한국의 여러 남성 작가들의 에세이와도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스스로는 에세이는 그때그때의 생각들을 쓴 것이 대부분이라 다시 모으면 그 소용이 다소 떨어진다고도 생각하신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바로 그런 점이 선생님 에세이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의 에세이는 그때그때의 삶의 풍경이나 당대성이 너무나 강렬하게 담겨있어서, 어떤 자료보다 당대의 생활상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중요한 텍스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답니다.

물론 언제나 그 시대의 삶의 한복판에 서있는 그런 '현역 의식'이야말로 한국문학사에서 그 누구도 점한 적이 없는, 선생님만이 오롯이 만들어 오신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언제나 '나는 항상 현역 작가다'라는 의식을 투철하게 실천해 오신 선생님의 작가로서의 삶의 이력이야말로 한국문학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발자취라 할 것입니다.

누군가 "한국 작가들은 20대에는 낭만주의자, 30대에는 현실주의자, 40대에는 자연주의자가 된다."라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지요. 또 한국 작가는 요절 아니면 변절이라는 어떤 분의 나름 '유명한' 코멘트도 있었지요. 물론 한국문학의 역사가 이렇게 표현될 수는 없겠지만, 이런 표현들이 나오게 되는 맥락이 아주 없지는 않지요. 사람마다 다소 편차가 있다고 할지라도 선생님처럼 등단 이후 줄곧, 그리고 삶의 마지막까지 현역 작가로 활동하고 독자에게도, 비평가에게도 사랑받은 작가는 선생님 이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나오기 참으로 힘들지 않을까요? 물론 그런 작가가 더 많이 나와야만 한국문학이 더 풍성해지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선생님처럼 연세가 드실수록 문학적 평가가 더 높아지는 작가가 그렇게 많이 계셨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1970년대나 1980년대 비평가들이 선생님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오늘날의 비평가들의 태도는 조금은 다른 것도 있지요. 특히 선생님이 '여류작가'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을 이즈음의 선생님 작품의 애독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실 제 또래의 글 쓰는 여성들은 선생님이 만들어놓으신 작가로서의 자리 덕택에 글 쓰는 여성으로서의 길이 훨씬 든든했지요. 글 쓰는 여성으로서 제가 성장해온 모든 길에 선생님이 동지로서 징검다리가 되어주셨듯이, 이 땅의 모든 글 쓰는 여성들에게 선생님은 크나큰 동지이셨지요. 제가 선생님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감히(어떤 점에서는 외람되지만) 선생님을 "그녀"라고 지칭하기를 즐겨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동지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지요.

선생님의 이런 동지애는 단지 생물학적인 여성에 대한 것만이 아니죠. 선생님이 어느 글에서 표현하신 것처럼 선생님은 "바퀴 없는 자들의 편"이시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손쉽게 굴러갈 바퀴가 없는 이들,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위태로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줄 바퀴가 없는 이들, 선생님은 기꺼이 이들의 편이 되어, 그 위태로움과 안타까움에 함께 해주셨지요. 그래서 선생님의 작품에는 언제나 그런 죽음에 맞선 위태로운 싸움을 해야만 하는 이들의 곁에서 함께하는 이의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지요.

선생님은 많은 글에서 그렇게 사투를 벌이는 생명의 곁을 지키는 작가 노릇의 기원이 개인적인 경험, 특히 한국 전쟁의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셨죠. 우리는 박완서라는 한 특별한 작가를 통해서 한국 전쟁이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우리 삶에 어떤 의미로 현재형으로 작동하는가, 혹은 한국 전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라는 것을 탐구하는 근원적인 시각이 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선생님은 한국 전쟁에 대한 천착을 통해서 역사 해석이나 사회비판적인 시각만을 제시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쟁에 대한 천착은 죽음에 대한 탐구, 아니 존엄하게 죽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사유로 이어졌지요.

그래서 박완서라는 작가의 자리는 언제나 존엄하게 죽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사유를 기반으로 존재한 것이지요. 인간은 삶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곤 하죠. 그렇다면 존엄하게 죽을 인간의 권리란 무엇일까요. 평화롭게 죽을 권리,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죽을 권리, 부당한 권력에 의해 학살당하지 않을 권리,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정당한 권리. 바로 이 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근원적인 주권이라는 것이 선생님께서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남기신 소중한 전언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 상실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죽음의 존엄함에 대해서이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애도는 시작될 수 있겠지요.

선생님을 상실한 이들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저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거나 애달파하는 것만으로는 그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수 없다. 그것이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저희에게 전한 애도에 관한 전언이었지요. 그래서 저 역시 선생님을 상실한 것에 대해 단지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만은 안으려합니다. 문득 <엄마의 말뚝> 첫 편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지요. "어머니는 아직도 투병중이시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생님 작품의 어떤 대목들은 인생의 어떤 순간이 아니면 그 진의를 생각 못하고 설핏 넘어갔다가, 바로 인생의 어떤 순간에야 비로소 그 문구나 표현, 혹은 감정의 깊은 속내를 깨닫게 되곤 합니다. 제게는 오늘 바로 이 문구가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투병중이시다." <엄마의 말뚝> 첫 편의 마지막 문장을 왜 이렇게 마무리하셨는지 이제야 비로소 거기에 생각이 미치게 되는군요.


▲ <엄마의 말뚝>(박완서 지음, 세계사 펴냄) ⓒ세계사
"어머니는 아직도 투병중이시다."라고 적는 순간, 바로 그 글쓰기의 마법적 힘을 통해서 딸은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공포와 맞서 싸우게 됩니다. 선생님의 소설에서는 그 마법의 힘은 투병중인 어머니에게도 효력을 발휘하였지요. 그래서 그 작품 이후에도 오랜 시간 어머니는 투병중이셨지요. 그래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렇게 적음으로써 글은 위태로운 생명의 불꽃을 간직하고 보살피는 마법의 힘을 발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선생님의 글은 그런 힘을 발휘했던 게 아닌가요? 그러니 "박완서 선생님께"라고 시작하는 이 편지를 통해서 저 역시 선생님을 잃지 않고, 여전히 제 곁에 간직하는 그런 마법의 힘을 흉내 내어 볼까 합니다. 살아생전에 선생님이 그러하셨듯이 선생님은 언제나 글을 통해 모든 위태로운 생명의 곁을 지키는 그런 마음가짐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겠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작품이 있는 한 그 마법의 효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두서없는 편지로 작별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만나 뵙기로 한 날을 이틀 앞두고 선생님과 작별을 하게 된 터인지라 사실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 깊었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며 그 안타까움 대신 생명을 지키는 일과 존엄한 죽음의 권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삶이 그러했듯이, 선생님의 죽음도 우리 모두에게 살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인간살이의 깊은 의미를 새기는 하나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별의 인사 대신 선생님의 마법의 주문을 저도 살짝 빌어보고 싶군요. 그렇게 해서 그 주문이 여기 이 지구상의 한 모퉁이에서 투병중인 모든 존재에게 어떤 마법을 발휘하기를 빌어봅니다. 그리고 그 마법이 선생님이 지상에 남기시는 작별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해서 이런 마지막 문장으로 편지를 마무리해봅니다.

"언니는 아직도 투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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