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일본 유학 시절, 학교가 주최하는 일본어 연설 대회에 나갔던 중국인 친구 S의 연설 주제는 "일본에는 왜 장애인이 많은가"였다. 자신이 살던 광저우의 학교나 거리에선 장애인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도쿄에선 너무 자주 봤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일하던 세탁소에도 신체적으로 불편한 손님들이 참 많았다. 시각장애인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능숙하게 빨래를 맡기곤 했다.

회사가 있는 경복궁역 근처가 도쿄만큼 장애인이 '많은' 곳이다. 왜인가 했더니 시·청각장애인 학교가 있어서다. 입사 전부터 중고교 시절까지 거슬러 통틀어 보면 이렇게 장애인 인구가 많은 걸 언제 봤나 싶다. 음? 가만 보자. 어릴 때 교회 주일학교나 동네에서는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솔직히 그들에게 살갑게 굴진 못했다. 하지만 철이 들었을 무렵엔 이미 '그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간 걸까?

아아, 그렇다. 우리는 그 버스가 지날 때마다, 움츠리는 시늉을 하며 'OO이다!'라고 외쳤었지. 특수학교의 교명인 OO은 여자 아이에게 붙이는 흔한 이름이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서 장애인을 지칭하는 은어로 쓰였다.

중국 친구 S가 발견한 차이는 바로 이거였다. 서울이나 광저우나, 그들은 있을 곳에만 있다는 것. 그들은 우리가 살짝 몸을 피했던 그 버스에 몸을 싣고, 다른 학교로 갔었다.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배우거나 지내지 않았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차별이란 이처럼 악의적인 괴롭힘이 아니라, 차별받지 않는 이들을 망각하게 하는 장치가 아닐까. 현실의 잔인한 측면은 나를 안전하게 감싸주는 프레임 너머에 있음을 항상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만의 세계, 숏 버스


▲ <숏 버스>(조너선 무니 지음,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부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숏 버스는 그렇게 분리된 공간을 상징한다. 미국에서 장애 학생들이 특수학급으로 이동할 때 이용하는 차량이다.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수용해서, 교정을 위한 '특수교육장'으로 보내는 이동 수단이란 얘기다. 저자 조너선 무니는 숏 버스를 상상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친절히(!) 설명한다. "숏 버스는 물리적 현실이라기보다는 억압적 경험을 상징하는 쪽에 가깝다"고.

저자의 인생에서 숏 버스는 괴로움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끝 무렵 주의력 결핍으로 인한 학습장애 진단을 받아 숏 버스를 타고 다니며 특수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년 시절에 "특수교육의 한복판"에서 "주의력결핍학습장애라는 사이비과학적 진단명을 목에 걸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집중과 읽고 쓰기를 할 수 없었던 그에게 교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결국 6학년 때는 잠시 학교를 그만두었고 열두 살 무렵에는 자살을 결심한다.

읽기와 쓰기에 장애 진단을 받았던 그가 이 책의 '저자'라니? 실은 무니는 미디어에서 그토록 열광하는,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나 '발가락에 붓을 끼운 화가'처럼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햄버거 패티나 뒤집게 될 것이라는 진학 상담 교사의 저주를 통쾌하게 뒤집고, 명문 브라운 대학 영문학과를 나와 작가로 산다. 그야말로 "자기 계발 업계의 스타덤"에 오를 수 있는 이력을 갖춘 인물이자, 무니의 인생을 영화화하겠다고 나선 영화제작자의 표현처럼 "미국식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인 셈이다.

그러나 <숏 버스>(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는 자신을 둘러싼 '성공 스토리' 운운이 사기극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다. 무니는 그토록 벗어나려 노력했던 숏 버스를 중고로 구입해, 그걸 타고 미국 전역 5만 6000킬로미터를 여행할 계획을 세운다. 목적은 자신처럼 '비정상' 딱지를 붙이고 사는 이들을 직접 만나보는 것. 왜 돌아가려 하는지 본인도 잘 모른다고 말한다.

다만 어린 시절 "자, 오늘은 정상적으로 행동해 보자"라는 말에 역겨워 했던 특수학급에서 이젠 '먼저 정상이 된' 역할 모델로서 강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무니 선생님은 '한때'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특수학교 연단에서 "정상인들은 역겨워요!"라고 외친다. 그토록 정상인이 되려고 아등바등하며 괴로워했는데, 왜 모두 정상인이 되어야 하지? 그게 뭐지? 저 아이들은 교정되어야 할 환자가 아닌데!

불편한 여행, 솔직한 고백

이런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숏 버스>는 성공 스토리도 아니요, 정상이라는 범주 바깥으로 내팽개쳐진 인물들을 어루만지는 따뜻하고 감성적인 여행기도 아니다. '역겨운' 정상인들에게 배제 당했다는 이유로, 괴짜나 장애인만이 옳거나 자유로울 수 있는 상상적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다.

무니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미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 모습과 쏙 빼닮은, 학습장애 판정을 받은 브렌트를 만나러 가는 첫 여정에서부터 가슴에 단단한 뼈다귀가 걸린 것 같은 역겨운 기분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다. 이런 느낌은 여행 곳곳에서 반복된다. 통장을 탈탈 털면서까지 불편한 여행을 자처한 데 대해 몇 번이고 후회도 한다.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상황에 대한 묘사도 가감 없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판정을 받은, "약간 맛이 간" 개념미술가인 켄트 로버츠에 대한 평가는, 자신의 대학 동기여서 더욱 그렇겠지만 더욱 신랄하다. (그리고 늘 연민보다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의 주의력은 각다귀 수준"이라든가, "그가 제발 좀 나처럼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든가. 무니의 필치 역시 정신없는 사람들의 일상 그대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날뛰듯 생생하다.

자신처럼 '사이비과학적 진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정말 다른 사람들, 세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들에 대한 이해는 더욱 쉽지 않다. 시청각 장애인이자 왼쪽 눈이 오른쪽 눈보다 두 배 크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여덟 살 소녀 애슐리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스스로의 '비인간적인 응시'를 경험한다.

애슐리를 입양해 키우고 있는 데보라가 "정말 예쁘지 않아요?"라고 물었지만 무니는 대답하지 못한다. 데보라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슐리라는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애슐리와 내가 정말로 같은 범주에 속하는지 의심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이런 불편한 고백들을 거리끼지 않는 것이 이 책이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거침이 없고, 착한 척 하기보다 차라리 유머를 구사한다. 우리가 저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무니가 데보라에게 당신의 딸을 빤히 쳐다보았다며 사과했을 때 그녀가 던진 대답과 같을 것이다.

"괜찮아요. 당신은 벌써 첫걸음을 내디딘 거예요. 솔직하게 말했잖아요."

"정상이란 건 없어?!"

우리는 '한 때 겪어봐서 아는데…'라는 대통령의 말을 조롱한다. 한 때 OO였기에 네 사정에 공감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유리한 위치에 올려다 주며, 그만큼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칼이 되기 쉽다. 무니에게도 "당신이 과거에 그런 경험을 한 건 좋은데, 이제 '비정상' 딱지를 떼지 않았느냐"고 삐딱하게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과연 현재 '정상'인가? 과거 노동자였기에 노동자를 이해한다고 허세부리는 CEO처럼, 어떤 상태를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숏 버스>가 반복해 강조하는 것은 정상이란 상태의 임의성이다. 사람들은 무니가 비정상 상태를 교정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의 본질은 그대로다. 또한 매번 바뀌는 숏 버스의 승객들에 비하면 저자 무니는 얌전하지만, 약혼자 베키의 교양 있는(?) 부모님 앞에서는 딴 세계 사람이다.

게다가 정신·신체 상태를 정상/비정상으로 가르는 잣대 이면엔 편의란 이름의 폭력이 존재한다. 저자가 인용한 레너드 데이비스의 <정상 강요>에 따르면 1860년까지 영어에는 '정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미국의 도시 인구가 불어나고 세계 도처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듦에 따라, 국가가 인구수를 통제하겠답시고 본격적으로 출현시킨 용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아무나 '정신지체자'로 만들 수도 있다. 미국정신지체협회는 1973년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용어 개편을 통해 정신지체의 기준을 '정상 IQ'의 표준편차 한 가지에서 두 가지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신지체로 분류되었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비정상 딱지들은 임상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것들은 치료되고 교정되어야 할 게 아니라 다양한 형질 중 하나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특히 인지적 차이를 기능장애로 해석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부모들이 자녀의 신경 결함만 탓하게 되면서 모든 아이를 위한 제도 개혁을 방기한다는 것이다.

"함께 할 때 우리는 전보다 나은 존재가 된다."

그렇지만 "누구도 정상(비정상)은 아냐!"라는 말이 명백히 존재하는 차이마저 가려주진 않는다. 지역 대학에 다니며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애도 하고 가십에 해박하기도 한 '평범한' 소녀 케이티는 염색체 수가 46개가 아니라 47개다. 즉 다운증후군이다. 이 태생적인 차이마저 벌거벗은 임금님의 비단 옷을 칭찬하듯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그 한 가지 차이를 모든 조건에 적용시키거나, 열등하다고 여기는 건 오류다. 그러나 TV에서는 여전히 성인 장애인들에게도 애들 대하듯 반말을 던지곤 한다.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자는 얘긴 공익광고에도 나온다. 오랫동안 반복돼 온 구호다. 그런데 왜 자꾸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모순과 폭력이 깃들까. 앞서 얘기한 S의 관찰을 적용시켜보자면, '우리'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가 생각보다 분리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도쿄의 장애인 수가 광저우의 그것보다 많은 게 아니라, 다양한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이 많은 도시야말로 좋은 도시"라고 S는 연단에서 말했었다.

우리가 정신지체 또는 발달장애로 알고 있는 인지 상태도 본래 작은 농촌 마을의 삶에서 항상 있어 온 부분이라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는 얼간이와 바보를 관대하게 바라보았고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낭만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근대 의학의 도래와 함께 공동체 속에 통합되어 살던 사람들이 재활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로 간주되었고 20세기 들어서는 '(완치되면) 공동체 속으로 복귀시킨다'는 목표마저 허물어졌다. 그들은 시설에 수용되어야 했다.

과거의 빅브라더는 사람들을 안에 가둬두고 줄을 세웠지만, 현대의 빅브라더는 사람들을 계속 밖으로 쫓아 분리해 낸다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말했었다. 노인은 실버타운으로 장애인은 장애인 시설로 정신지체아들은 특수학교로 분리되는 현상은 공동체의 붕괴, 도시 외곽의 슬럼화와 함께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면 정말 모두 다, 숏 버스다.

왜 우리가 좀 더 섞여야 할까. 이러저러한 사회과학적 이론들을 갖다 쓰기보다, <숏 버스>에 나온 문답을 인용하겠다. 무니의 다소 공격적인 질문, 그리고 다운증후군 소녀 케이티의 엄마 칸디의 약간은 낭만적인 답이다.

조너선 무니 : 만약에 다운증후군이 말살된다면 어떤 면에서 손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칸디 : 열대우림과 같겠지요. 그 손실이 어떤 것일지 우리는 몰라요. 하지만 내 존재가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건 우리가 좀 더 인간답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함께할 때 우리는 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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