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 2>(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창비 펴냄)는 "토머스 핀천과 더불어 미국 포스트모던 소설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돈 드릴로의 1991년 작품이다. 펜/포크너 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또 돈 드릴로의 소설 중에서는 <화이트노이즈>(강미숙 옮김, 창비 펴냄), <리브라>(정회상 옮김, 창비 펴냄), <바디 아티스트>(정영문 옮김, 새물결 펴냄)에 이어 국내에서 네 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통일교, 반정부 활동으로 수감된 남한의 작가 등 한국적인 요소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등장하기도 해서 더 흥미를 끈다.

빛바랜 스펙터클

<마오 2>는 원래 '통일교 집단결혼식'이라는 낯설고 기괴한 장면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1991년의 미국 독자가 아니어서인지, 나에게 이 장면은 충격적이거나 압도적이지 않다. 그것은 종교적이기보다는 경제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결혼에 대해 낭만적이고 근대적으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자들이 3~4일 출장으로 베트남 우크라이나, 키르키즈스탄 처녀들과 손쉽게 결혼할 수 있는 산업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집단결혼식'이라는 관념은 더 이상 이상하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 <마오 2>(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창비 펴냄) ⓒ창비
또 이 소설의 핵심은, '군중'이라는 스펙터클을 이룬 타자들이 촉발하는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는 '테러리즘'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의해 구체화된다. 하지만 이 역시 국내 독자들에게 특별히 효과적인 장치 같지 않다. 이는 소설이 타자화하는 대상을 타자로 느낄 수 없는 한국 독자의 처지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테러를 신비로운 공포로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테러를 익숙한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몇 배는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는 지난 20년간 수많은 '테러'와 '테러에 대한 테러'를 겪어왔다. 알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찬 타자의 테러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향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은 많은 독자들에게 놀라운 것이 아니라 새삼스러운 것이다. 그런 독자들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으로 빠뜨리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이, 문명의 탈을 벗고 드러낼 끔찍한 맨얼굴이다.

아무튼 그래서 소설이 꽤 공들여 동원하고 있는 '군중의 스펙터클'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 통일교 집단결혼식의 신랑신부들, 홍위병들과 천안문광장의 시위 참여자들, 호메이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들, 톰킨스 스퀘어의 노숙자들…… 이들이 소설 속에서 워홀의 실크스크린 같은 효과를 낸다는 점만 기억하면 될 것 같다.

줄거리

편의상 줄거리를 요약해보자. 어차피 이 소설에서 플롯은 중요한 요소가 아닌데다가, 이미 다른 서평들, 인터넷서점 책 소개 등에서 다양한 판본으로 요약되어 유통되고 있는 마당이라,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가의 비서(이자 소설가의 가장 충성스러운 독자) 스콧이 여성 사진작가 브리타를 데리러 뉴욕으로 온다. 그들은 뉴욕 근교 어딘가에 있는 소설가 빌 그레이의 거처로 간다. 브리타는 거기서 빌의 사진을 찍고, 빌의 또 다른 비서인 캐런을 만난다. 캐런은 통일교도로 양키스타디움에서 집단결혼식을 올렸던 수많은 신부들 중 하나다. 어쩌면 사진작가 브리타와의 만남을 계기로, 빌은 비밀스런 유배의 기간을 끝내고 세계로 나오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스콧은 빌이 세 번째 소설을 영원히 퇴고만 하고, 발표하지 않는 것이 그의 소설 세계를 완성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원칙을 강조한다. 브리타를 통해 빌의 옛 친구인 편집자 찰리가 소설가에게 도움을 청한다. 빌은 스콧의 만류를 뿌리치고 뉴욕에 있는 찰리의 출판사를 방문한다.

찰리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고결한 어떤 위원회"의 위원장인데, 이 위원회는 출판업자와 학자들로 구성된 신생 단체다. 찰리는 레바논의 신흥 공산주의 조직에 의해 억류된 스위스의 무명 시인을 석방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빌이 런던에서 그 시인의 시를 낭송하면 좋겠다고 제안한다(이는 테러 조직이나 찰리의 위원회를 똑같이 뉴스의 중심으로 끌어올릴 만한 사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폭탄 테러로 인해 낭송회와 기자회견은 무산된다. 빌은 레바논의 테러 조직과 찰리의 단체를 이어주는 그리스의 정치학자 조지를 찾아간다. 빌은 시인을 대신해 인질이 되고자 하지만, 엉뚱한 사고로 베이루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얼마 후 브리타가 테러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의 사진을 찍기 위해 베이루트로 간다. 브리타는 이제 더 이상 작가들의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이 소설은 수많은 흥미로운 문제들을 '이미지화'해서 그 적은 분량에 꾸역꾸역 욱여넣고 있다. 그 이미지들에서 어떤 의미를 취하고 버릴 것인지는 보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가령 믿음의 문제("저는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 저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집착해요. 그것도 많이, 그리고 모든 곳에서. 그들이 없다면 지구가 식어버릴 거예요"), 혹은 일에 대한 생각("그녀는 이만하면 됐다는 느낌이 든 후에도 일을 더 하기를 좋아했다. 계속 일을 하며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도 넘어서 은밀한 축복의 순간을 접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진가의 시점에 관한 생각("저는 만리장성 위를 걷고 있는 어떤 남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둘이 반대쪽에서 서로를 향해 걷고 있다더군요. 그 사람들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저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아요. 만리장성이 풍광 속으로 굽이치고 조그만 두 인간 형상이 먼 지방에서 서로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모습 말이에요. 저는 이게 지구에 대한 존경의 이야기, 우리가 이 지구에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속해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제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런 고공에서의 풍경을 생각해내는지 신기하고요")…. 타자기와 워드프로세서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개인적으로 유용했던 통찰은 출판업자와 작가와의 관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모든 주제들이 서로 다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연관성을 살피려면 수백 페이지짜리 논문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소설과 테러의 공통점

무엇보다 <마오 2>가 던지는 문제 중에 가장 의미심장하고 시의적절한 것, 그래서 가장 재미있는 주제는 이것이다. 오늘날 소설의 경쟁상대는 누구인가? <마오 2>는 아주 노골적으로 '테러, 혹은 테러를 다루는 뉴스'를 지목한다.

"소설가들과 테러리스트들을 묶어주는 야릇한 끈이 있다오. 서구에선 우리가 쓴 책이 뭔가를 형성하는 힘과 영향력을 상실함에 따라 소설가들은 유명한 화형식용 허수아비가 되어버렸어요. (…) 수년 전 나는 소설가가 문화의 내적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폭탄 제조자들과 총잡이들이 그 영토를 빼앗아 가버렸지요. 그들이 인간의 의식을 공략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포섭돼버리기 전에 작가들이 하던 바로 그 일을 말이오. (…) 우리가 테러에 밀려나고, 테러 뉴스에 밀려나고, 녹음기와 카메라에 밀려나고, 라디오와 라디오에 장착된 폭탄에 밀려나는 것을 말입니다. 재난 뉴스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유일한 서사가 되었지요. 뉴스가 암울하면 암울할수록 서사는 더 웅대해지고, 뉴스는 마지막 중독, 그 뭐랄까, 그다음에 오는 건 알 수가 없소."(64~65쪽)

"선생님은 종말론적 힘을 갖는 뉴스의 등장으로 인해 작가들이 소멸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 비슷한 이야기를 내게도 했어요."

"소설은 우리의 의미 추구를 만족시켰지요, 빌의 말을 빌리자면 말입니다. 과거에 소설은 위대한 세속적 초월이었지요. 언어, 인물, 그리고 가끔씩은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는 라틴어 미사 같은 것. 하지만 우리의 절망이 우리를 좀 더 거대하고 더욱 어두운 뭔가에 이끌리도록 만들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파국의 분위기를 제공하는 뉴스로 끊임없이 눈을 돌리는 겁니다. 뉴스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서적 경험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죠. 우린 소설이 필요 없게 되었어요. 빌의 말에 따르자면. 우리에게 파국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지요. 단지 보도와 예측과 경고만 있으면 되니까." (112쪽)

이런 구도는 일견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다. 소설과 테러가 어떻게, 왜 경쟁을 한단 말인가? 소설이 테러만큼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소설이라는 근대적인 서사양식이 종교를 대체했듯, 이제 테러라는 폭력이 소설을 대체한다는 좀 더 복잡한 이야기인가? 물론 어떻게 해석해도 다 말은 된다(이 소설 최대의 장점은 무슨 해석을 가져다붙여도 다 말이 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이 돈 드릴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은 논문이 아니므로, 해당 지면 안에서 수습 가능한 정도로 범위를 좁혀두려고 한다. 일단 경쟁을 하려면 공통의 자원, 공통의 목표, 공통의 대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최소한의 공통점이 필요하다. <마오 2>에 따르면, 소설과 테러의 공통점은 둘 모두 사람(그것이 개인이든 군중이든)에게 가장 근본적인 서사, 즉 정체성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그 소설은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거울이다. 소설을 쓰는 한 그는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 걸어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라고 말해본 적"(324쪽)도 없다.

"나는 언제나 문장 속에서 나 자신을 보아왔어요. 문장을 만들면서 나는 한 단어 한 단어씩 나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지요. 내 책의 언어가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형성시켰단 말입니다. 하나의 문장이 갓 만들어지면 거기엔 하나의 도덕적 힘이 있어요." (75~76쪽)

이는 독자에게도 적용된다. 스콧은 빌의 소설을 읽고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누군가가 제게 빌의 첫 소설을 읽으라고 주기에 저는 우아, 이게 뭐야, 그랬지요. 그 책은 어떤 면에선 저 자신에 관한 책이었어요. 너무 놀라지 않기 위해 저는 그 책을 천천히 읽어야만 했어요. 저 자신을 보았죠. 그건 제 책이었어요. 제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대한 어떤 것. 그는 이리저리 모든 걸 다 포착했어요. 모든 것들이 거의 어디에건 들어맞고 또 어떤 것도 완전히 망각되지 않게 말이죠." (81쪽)

스콧은 그 후 빌에게 열정적으로 편지를 보내고, 급기야 몇 년에 걸쳐 집요하게 그를 찾아냈다. 이제 그의 삶은 빌이 그의 소설과 삶을 가장 완벽하게 완성하도록 돕는 일이 되었다.

레바논의 테러 조직은 소년들에게 지도자의 사진을 준다. 소년들 주변에 그들의 삶을 바꿀 만한 소설책을 쥐어주는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년들에게는 삶을 성취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소년들에게 필요한 서사는 더 강렬하고 단순한 것이다. 지도자의 이미지. 혹은 가장 완벽한 결말을 가리키는 지도자의 손가락. 이는 이제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자랑하는 근본적인 서사가 이미지에 가장 가까워진 서사, 아니 이미지 그 자체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정체성과 목적의식을 가르칩니다. (…)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뭔가 강력하고 자주적인 것에 속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아이들은 유럽의 발명품이 아니에요. 이 아이들은 신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아이들을 천국에 가도록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여기엔 순교자는 없어요. 라시드의 이미지가 그들의 정체성이죠." (347쪽)

우리 시대의 가장 지배적인 매체가 소설이 아니라, 뉴스 혹은 테러라는 말은, 또 이 시대의 지배적인 서사가 시작에 관한 것(창조론)이 아닌 결말에 관한 것(종말론)이라는 말이기도 하고, 또 이 시대의 지배적인 감정구조가 파국을 향한 갈망, 희열/불안, 공포라는 말이기도 하다. 당대에 관한 <마오 2>의 통찰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소비자본주의, 미디어산업 같은 것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대목들이다.

"이루는 게 뭐냐고요? 이 아이들에게 비전을 주고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할 겁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하는 협소한 기능을 넘어서는 하나의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무기력하게 잊혀진 그들 부모와 조부모들의 삶을 완전히 넘어서는 그 무엇 말입니다." (346쪽)

"이분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 인민들에게 세계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찾아주는 게 바로 테러라는 뜻입니다. 일을 통해 성취되던 것들을 우리는 테러를 통해 획득하는 것이지요. 테러를 새로운 미래를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 되게 해주지요. 과거 어느 때와 달리 지금 인간은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분 말씀은 우리는 매순간 역사를 만들고 바꾼다는 뜻이지요. 역사는 책도 아니고, 인간의 기억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침에 역사를 만들고 점심식사 후에 그것을 바꾸는 거예요." (350쪽)

오늘날 가장 희소한 자원은 대중의 흥미다

"지금껏 나는 소설가들과 테러리스트들이 일종의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소."

"흥미롭군요. 어떻게 그렇지요?"

"테러리스트가 얻는 걸 소설가들은 잃으니까. 대중의 의식에 그들이 영향을 미치는 크기는 감성과 사상의 형성자로서 우리가 쇠락하는 정도와 같으니까. 그들이 대변하는 위협은 우리가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위협의 크기와 일치한다는 말이오."

"우리가 테러를 명확히 꿰뚫어보게 될수록 예술로부터 받는 영향은 더 적어진다는 말씀이군요."

"내 생각엔, 그걸 측정만 할 수 있다면 이 관계는 긴밀하고 정확하다고 보오." (239쪽)

소설과 테러, 그리고 뉴스가 경쟁한다. 이데올로기로서도 그렇지만 상품으로서도 그렇다. 살아남기 위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영토는 무엇인가?

"불명료하고 과포화된 사회에서는 테러가 유일하게 의미 있는 행위입니다. 모든 게 너무 많아졌고, 우리가 천 번의 생애를 되살면서 음미해도 남을 만큼 메시지와 의미들이 도처에 널려 있지요. 무기력-히스테리아. 역사가 가능한가요? (…) 예술가도 흡수돼버리고, 길거리의 광인도 흡수돼서 관리되고 편입돼버리지요. 돈 몇 푼 집어주고 텔레비전 광고에 내보내니까 말입니다. 테러리스트만이 체제 바깥에 서 있지요. 문화는 아직도 테러리스트를 동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겁니다. 그들이 선량한 시민을 죽이면 혼란이 일어나지요.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이 주목을 받기 위한 언어, 서구세계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가 아닌가요. (…) 은밀한 삶, 모든 불인정과 무시 근저에 깔려 있는 분노를 이해하는 사람이 바로 소설가란 말입니다. 당신들은 절반의 살인자들인 셈입니다." (240~241쪽)

정보와 의미가 과포화된 사회에서 이제 희소해진 것은 정보의 '제공자' 혹은 '정보' 그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수용자'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경쟁의 진짜 구도는 소설 대 테러, 소설 대 뉴스가 아니다. 서사 대 이미지도 아니다. 오히려 정보의 '제공자'(생산자) 대 '수용자'(소비자)다.

이는 오늘날 '언어'로 먹고사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용자의 관심을 받기 위해 정보는 최대한 강렬해져야 하고 단순해져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도, 일국 차원이 아닌 세계적 차원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는 가장 강렬하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언어가 무엇인지 고민한다.

새로운 서사의 특징

그렇다면 뉴스를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뉴스에서 무엇을 얻는가? 가령 캐런은 테러 조직원이 되는 대신 통일교 신도가 되었고, 이제 재난 뉴스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소설에서 가장 미래적인 인간형이다.

"그녀는 주관이 약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믿었다. 고통, 환희, 애완견 사료, 모든 거룩한 것들,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기 천사의 희열. 스콧은 그녀를 쳐다보면서 기다렸다. 그녀는 미래의 바이러스를 지니고 다닌다, 빌의 말을 인용하자면." (182쪽)

캐런은 뉴스 이미지에서 앵커가 전하는 말보다 훨씬 많은 것을 듣고, 뉴스 속 이방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사람이다. 새로운 서사는 '독창성'을 통해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소설은 타자를 다루기보다는 '나'를 다루기에 적합한 양식이다. 뉴스는 타자를 다루는 양식이다. '내'가 아닌 '타자'를 다루는 서사에는 윤리나 도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보다는 공포나 믿음이 어울린다.

"캐런은 자신이 테헤란 남부의 빈민가로 들어갈 수도 있고,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어버이를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는 그들의 말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기상나팔에 잠을 깨는 모든 빼앗긴 자들. 슬픔, 슬픔이 오늘이다." (287~288쪽)

<마오 2>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이야기 형식들 중에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인질'의 것이다. 인질은 <마오 2>의 중심인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무척 약하다. 방치와 무의미 속으로 내던져진 채 스스로를 지키려 고투하는 '시인'이자 '인질'. 시간이 지나면서 인질을 감시하는 소년의 행동이 느슨해진다. 소년은 식사 후에 인질에게 두건을 씌우는 일을 잊고, 구타하는 것을 잊고, 마침내 식사를 주는 것도 잊어버린다.

"그는 이제 파동 속으로 사라져 컴퓨터 회로를 위한 또 하나의 약호, 너무 의미가 없어서 해결할 필요도 없는 미미한 범죄의 기억이 되어버렸다. 지금 누가 그를 알아보겠는가? 소년을 제외하고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그의 정부가 그를 버렸고, 다음에는 그를 고용한 조직, 그 다음엔 그의 가족이 그를 버렸다. 이제는 그를 납치하여 지하방에 감금한 사람들마저 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렸다. 누구의 방치가 그를 가장 크게 괴롭히는지 말하기도 어려웠다." (171~172쪽)

소설 속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잊고, 그의 실체는 마침내 독자에게조차 가물가물해진다. 이런 총체적 무의미와 고투하던 인질은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할 수 있는 서사를 필요로 하고, 나중에는 자신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서사를 필요로 한다.

"그가 누구인지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루하루는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 인질은 가장 단순한 사실들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모두 사라지면 그는 자신이 그 소년 속 어딘가에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 옛날이야기들은 언젠가 시도된 적이 있는 진실이었다. 그림자 같은 여자와 비오는 날 텅 빈 건물 속 계단에서 섹스하기. 진부할수록, 흔할수록, 예상하기 쉬울수록, 케케묵을수록, 더 멍청할수록, 그런 이야기는 더 좋았다. 그가 독창성을 위해서 시간을 벌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70쪽)

이렇게 새로운 서사는 옛날이야기들과 닮아 있다.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반복되어오는 이야기.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힘을 지닌 이야기. 타자를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주관성 안에 갇혀 있는 서사보다는 이렇게 타자로 향할 수 있는 서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렇게 타자에 압도당한 채 자신을 잊게 만드는 서사란 그냥 멍청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마오 2>가 던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의 저작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부패로부터 보호하는 겁니다. 그러면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니까요. 아이들은 부모가 해준 이야기들을 기억하지요. 아이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원하고 또 원합니다. 한 단어라도 바꾸면 아이들은 엄청나게 당황하지요. 이게 바로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문화가 필요로 하는 불멸의 서사입니다. 중국에서 그 서사는 마오의 것이었지요. (…) 마오는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의 신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중국 인민대중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것, 역사가 군중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겠지요." (248쪽)

누가 이겼나? 혹은 누가 이길 것인가?

소설이 기존의 막강했던 권위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 작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군중이 미래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예언. <마오 2>는 이것을 마치 '재난 뉴스'처럼, '테러'처럼, 아니 그보다 웅장하게 선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패배를 선언하되 스펙터클하게. 가령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장이자, 이 책의 서평자들이 빼놓지 않고 인용하는 문장은 이런 것이다. "미래는 군중들의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장엄한 어투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진부하게 들리지 않는가?

가라타니 고진이 '소설(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할 때, 그 소설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으로, 시대정신을 담고 있고 역사적인 책무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던 장르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마오 2>에서 파국을 맞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내가 왜 소설의 가치를 믿는지 아시오? 그건 소설이 민주적 함성이기 때문이지. 누구나 위대한 소설, 하나 정도의 위대한 소설은 쓸 수가 있어. 길거리의 아마추어라도 말이오. 난 이걸 믿소, 조지. 이름 없는 막노동꾼이나 꿈도 하나 키우지 못한 무법자라도 앉아서 자기 목소리를 찾을 수가 있고 운이 좋으면 소설을 쓸 수도 있는 거지. 천사 같은 그 뭔가가 우리 입을 벌어지게 한단 말이오. 재능의 물보라, 생각의 물보라. 모호함, 모순, 속삭임, 암시. 이게 바로 당신들이 파괴하려는 것들이란 말이오." (243쪽)

이러한 빌의 항변 정도가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소설'의 실체에 관한 거의 유일한 언급이다. 우리는 <마오 2>에서 소설가 빌이 쓰고 있던 소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그것을 쓰고 있었다는 것만을 안다. 하지만 정말로 빌의 '세 번째 소설 원고'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저 뭔가를 쓰는 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이 경합의 결과가 어떨지는 무척 흥미로운 문제다. 그래서 소설은 이미 자신의 시대적 소임을 다하고 사라져가는 중인가? 소설가는 죽고 뉴스 시청자들만이 살아남을 것인가? 이미지와 광고, 트위터만 남고 책은 죽어버릴 것인가?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오 2>를 읽고 나서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마오 2>야말로 이 '시의적절한'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이제 소설이 아니라는, 생생한 예고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사족 하나. 우리는 당분간 재난뉴스가 소설을 대체해버리는 상황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근 1주일 동안 TV를 지배한 '소말리아 해적' 뉴스를 보고 있자니, 2011년 한국에서 뉴스는 상품으로서든 이데올로기로서든 그다지 경쟁력 있는 서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뉴스라기보다는 국정홍보처의 광고물 같다. 그 이미지에서 글로벌한 갈등, 끔찍한 재난, 납득할 수 없지만 압도적인 슬픔 따위는 그저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