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창비 펴냄)의 저자 오인동 선생은, 책 뒤표지의 소개 글에 의하면, "통일과 의업(醫業)의 두 길을 걸어온" 재미 동포 의사이다.

부연하자면 저자는 한국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미국에 유학한 이래 정형외과 의사, 특히 인공 고관절(엉덩이관절) 분야의 전문가로 70대인 지금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처음 평양을 방문한 뒤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는 등 통일운동가로도 크게 활약하고 있다.

이제 북한 방문기는 책으로 출판된 것만 해도 적어도 100종은 될 것이며, 개인 블로그 등에 실린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 세상이 되었다. 그만큼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남북이 가까워진 덕택이다. 하지만 올해에 평양을 방문하여 그곳 소식을 전하는 한글 책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최근 들어 경색되고 악화된 남북 관계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북녘의 구체적인 모습을 처음 우리에게 전하고 그럼으로써 대중적인 통일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재미 동포들이었다. 북한에 대해 정부 발표 이외의 어떤 생각을 하는 것조차 금기였던 한국 사회에 전해진, 양은식·선우학원·최익환 등 재미 동포들의 방북기 <분단을 뛰어 넘어 : 북한 방문기>(1984년)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6월 시민 항쟁" 이듬해인 1988년 서울에서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까지 몇 해 동안 "불법 복사물"의 형태로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면서 읽혔던 이 책이 들려준 메시지는 대체로 북녘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메시지가 충격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오히려 당시 한국 사회의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오인동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그 무렵 이런 일도 있었다. 재미 동포인 홍동근 목사의 방북기 <미완의 귀향 일기>가 출판되자 1988년 11월 2일 그 일로 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런데 한 달 뒤 18년 만에 귀국한 홍 목사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재미 동포의 "특권"에 새삼 놀랐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북한 방문을 재미 동포들은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다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요즈음도 해외 동포들은 북녘 고향을 방문하여 헤어졌던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고 있다.)

이듬해에 문익환, 황석영, 서경원, 임수경 등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연이어 북한을 찾았지만 역시나 모두 중형을 받았다. 지난 6월 이 책의 저자인 재미 동포 오인동 선생과 한국인 한상열 목사가 각각 평양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한 목사는 구속되었고 오 선생에게는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

필자가 재미 동포를 시샘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의 그 동안 활동을 폄하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오인동 선생과 같은 사람들이 한국 정부에게서 처벌을 받지는 않더라도 실제 행동이나 생각과는 무관하게 동포 사회 등으로부터 "친북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적지 않은 냉대를 받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남북 관계가 어려울 때일수록 재외 동포들의 역할이 더욱 막중하고 소중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과의 의료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튼 것도 역시 재외 동포들이었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일 동포 의사 김만유 선생이 1986년 평양에 1000 병상이 넘는 대규모 현대식 병원인 "김만유 병원"을 세운 일이다. (김만유 선생 역시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리고 재미 동포 의사들도 1980년대부터 북한을 방문하여 새로운 의료 기술을 전수하고, 필요한 의료 시설과 장비들을 지원하는 협력 사업을 계속해 왔다.

북한이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분야는 의료와 교육이다. 1950년대부터 무상 의료와 무료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물론 그 내용과 수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자부해온 의료와 교육도 1980년대, 특히 1990년대 이래 어려움에 처했다. 북한 당국도 그러한 점을 인정하는 데 그리 인색하지 않다.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가 북한에 대해 본격적으로 협력과 지원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95년 이래 북한에 닥친 극심한 식량 위기가 계기였다. 기왕의, 또는 신설된 시민단체들이 북녘 "인민들"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 처음에는 식량 지원에 집중되었다. 기아로 어려움을 겪는 사회에 사상과 이념을 떠나 식량을 지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민족 이전에 인간에 대한 도리이고 예의였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자연히 알게 된 사실은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북한 사회의 많은 분야가 과거와 달리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의료의 경우도 의료 장비와 시설, 의약품이 크게 부족해졌다. 세운 지 오래 되어 노후해진 병원도 제대로 보수·개축할 수 없었다. 외부 세계와의 교류도 더욱 줄어들면서 의사들은 새로운 의료 지식과 기술에 접할 수 없게 되었다. 보건의료의 총체적인 위기였다. 보건의료의 위기는 곧바로 인간 생명과 건강의 위협으로 연결될 수 있기에 어떤 분야보다도 시급한 복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위기는 어느 사회에든 닥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적인 협력이 중요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과거 어려웠던 시절, 외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보건의료 분야가 특히 그러했다.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도리만도 아니다. 지금 어려운 사람과 사회와 국가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1990년대 중반 이래 국제 사회와 한국 사회는 북한 보건의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초기에는 의약품과 의료 도구 지원 위주였다. 그 뒤에는 그러한 물자를 만들 수 있는 생산 시설과 병원의 증·개축에도 지원과 협력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의료 지식과 기술을 전습하는 사업도 병행되었다. 적지 않은 한국 의사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그곳 의사들과 함께 수술 등의 진료를 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교환해 왔다.

필자도 지난 2001년부터 1년에 몇 차례씩 북한을 방문하면서 보건의료 협력 사업에 작은 힘을 보태어 왔다. 그러면서 가장 절실하게 체득한 것은, 오인동 선생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신뢰와 역지사지와 소통의 소중함이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오랜 동안 떨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오해도 없지 않았던 남북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간에 신뢰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 신뢰가 싹트려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상대방의 자리에 서려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주 만나야 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남북 간의 보건의료 협력 사업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성과는 서로 간에 신뢰가 형성되고 그러면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도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최근 2년 남짓 사이 남북 정부 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보건의료 협력 사업도 거의 중단된 상태이다. 의약품과 의료 소모품 지원도 끊겼고 병원과 약품 시설 증·개축과 신축도 멈추었다. 결핵약 공급이 끊겨 내성 환자가 더 많이 생기는 일조차 일어났다. 물론 그 동안 어렵게 이루어져온 남북의 신뢰가 하루아침에 파탄나지는 않을 것이지만 교류 중단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신뢰 관계에도 위기가 닥칠 수 있다. 그러한 위기를 막아 주고 있는 것이 오인동 선생과 같은 이들의 소중한 활동이다.

이 책을 통해, 1년 반 남짓 만나지 못했던 평양의학대학병원 의사들의 소식을 알게 된 것, 그리고 그 사이 병원이 오히려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아쉽지만 반가운 일이다.

북한의 보건의료를 지원하는 것은 나 자신의 오늘과 내일의 건강을 증진하는 일이다.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21세기에 우리와 바로 붙어 있는 북녘 사회의 건강 상태는 바로 우리의 건강 상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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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환경운동가는 연말이 되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연말마다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인도네시아 발리(13차), 2008년 폴란드 포즈난(14차),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15차)에서 열린 이 회의는 11월 말 멕시코 칸쿤에서 또 열린다.

정부, 기업 관계자야 '공돈'으로 다녀오면 되지만, 최저 생계비도 못 미치는 박봉에 빚이 산더미이기 마련인 환경운동가는 호텔 예약은커녕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도 어렵다. 기업, 언론, 재단 등에 손을 내밀어 보지만, 환경운동가의 급한 상황에 신경을 써주는 곳은 별로 없다. 결국 '돈줄'을 잡지 못한 몇몇은 한 번 더 카드를 긁는다.

매번 반복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외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환경 회의에 환경운동가가 빚을 져가며 참석해야 하는 모습이 대통령부터 '녹색 성장'을 외치는 나라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부도덕한 조직처럼 난타를 당하는 환경단체의 이런 현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이런 답답함 한 편으로 삐딱한 의문도 든다. 환경운동가들이 수십 명씩 인도네시아, 폴란드, 덴마크, 멕시코로 가는 게 과연 지구 온난화를 막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 말이다. 혹시 정치인, 기업인이 모이는 곳에 사회운동가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푸닥거리를 하는, 그런 유행에 환경운동가도 홀린 게 아닌가?

1000일 동안 "진짜 녹색"을 찾다


▲ <착한 에너지 기행>(김현우·이강준·이영란·이정필·이진우·조보영·한재각·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들이 펴낸 <착한 에너지 기행>(이매진 펴냄)을 펼쳤다. 이 책은 이들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말 그대로 아시아, 유럽 등 세계 각국을 종횡무진 누비며 다닌 기록을 모은 것이다. (흥미로운 실험이 많이 진행 중인 남아메리카가 빠졌는데, 경비 문제일 것이라 짐작된다.)

이 책은 크게 앞부분(1부)과 뒷부분(2부~4부)으로 나뉘어 있다. 앞부분은 유럽, 일본에서 앞표지의 말을 빌리자면 "진짜 녹색"을 실천하는 곳을 찾아간 것이다. 그간에 나온 이와 비슷한 기획의 책에서 놓쳤던 곳을 소개하는 것이 이 부분의 미덕이다. 독일 무바크, 오스트리아 무레크, 일본 오가와마치 등은 그 예이다.

뒷부분에서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환경 정의'가 세계 각국의 예를 통해서 강조된다. 그간 언론을 통해서 산발적으로 소개되었던 자원 개발로 고통을 받는 타이, 인도네시아, 버마, 라오스 원주민의 현실을 고발하고(2부), 수차례에 걸친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는 인류의 희망이 어떻게 꺾이는지 보여준다(4부).

이 책을 펴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 변화가 제1세계, 제3세계를 가리지 않고 노동자·서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을 강조했다. 경제-환경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고자 연대를 선택한 노동운동, 환경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데 한 부분을 할애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리라(3부).

환경운동, 이젠 변해야 할 때다

애초의 기획 의도와는 상관없이 <착한 에너지 기행>은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는 환경운동의 실천에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만약 이런 효과를 기대했다면 글의 서문 등에서 한 번쯤 자신의 입장을 강조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모두에서 언급한 의문을 염두에 두고, 두 가지만 살펴보자.

4부에 실린 2005년부터 2009년에 열린 다섯 차례의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의 참관 후기에서 잘 드러나듯이, 현재의 기후변화협약 틀은 이미 실패했다. 이런 식으로는 지구 온난화를 막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지부진한 협상 속도로는 이 불만족스러운 틀마저도 실현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차피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는 국제 협약의 틀이 제1세계 선진국과 초국적 대기업의 면피용으로 전락했다면, 환경운동가들이 매번 협상 장소를 찾아가 들러리를 서는 것은 실효성 없는 국제 협약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꼴에 불과하다. 즉, 이제는 환경운동이 국제 협약에 목을 매는 모습에서 탈피해야 한다.

어차피 기후변화협약이 실패할 게 뻔하다면, 온실 기체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그에 따른 지구 온난화도 피할 수 없다. 그런 지구 온난화가 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의 기후에 어떤 변화를 야기할지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다만 그 변화가 작든 크든 그에 '적응'하고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오는 11월에 환경단체가 기후변화협약 총회가 열리는 멕시코 칸쿤 대신 찾아갈 곳은 어디인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답을 준다. 바로 항상 말로만 강조했던 '지역'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진짜 녹색"을 실천하는 세계 곳곳의 모습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대한민국 곳곳에서 세계가 주목할 실천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저자들도 강조했듯이 이 책에 실린 유럽, 일본의 사례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물론 '원자력 에너지'를 '녹색 에너지'라고 우기는 정치인, 공무원이 득세하는 한국에서 유럽, 일본의 실천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 지역에 맞춤한 실천을 오랫동안 고민해 왔듯이, 우리도 한국의 맥락에 맞는 실험을 시도해야 하리라.

진주, 목포, 전주에 '녹색'을 칠하자

만약 경상남도 진주, 전라남도 목포, 전라북도 전주에서 오스트리아 그라츠처럼 시민들이 폐식용유를 모아, 지역 기업에서 바이오디젤을 만들고(고용 창출!), 지역 버스의 연료로 사용하는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 이런 실험이 이 땅에서 현실이 될수록 이 책의 저자들의 비전은 '몽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내심 앞으로 5년 후에 나올 이 책보다 훨씬 두꺼운 <착한 에너지 기행 2>를 기대해본다. 그 책에는 온실 기체를 엄청나게 내뿜으며 지구를 덥게 하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는, 이 땅의 "진짜 녹색" 실천 사례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사실, 그런 식으로라도 '구명정'을 만들지 않으면, 지구의 밝은 미래는…글쎄,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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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정상회의, 우리에게 무엇인가?

2010년 11월 11일부터 12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이 나라에서는 G20 정상 회의가 열린다. 이명박 정권은 이를 한국의 선진국 진입에 대한 국제적 인정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이만큼 우리가 잘나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회의가 열린 곳에서 반드시 대대적인 반대시위와 집회가 조직되어 온 것은 말하지 않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질서 재편에 봉사하는 이 회의의 본질은 이로써 이 나라 대중들에게는 무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미국이 중심이 된 서구 제국주의 체제의 동요로 인해 중간 지점에 놓인 국가들을 포섭, 자본주의의 세계적 주도권을 안정화시키려는 목적에 대한 논의는 이로써 실종되게 되는 것이다. 언론은 환율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격돌을 언급하고 있으나 정작 관심 가져야 할 바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권리와 안전이다. 그런데 이들의 삶의 형편과 그 권리는 논의 구조에서 실종되어 있다.

지난해 런던에서 개최되었던 G20 정상 회의에는 무려 160여 개 NGO들의 연합 시위와 반G20 회의 조직을 통해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가 가는 길이 과연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신랄하게 물었다. 투기적 금융 자본에 대한 일정한 제동을 걸자는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나오기만 하고 정작 실현되지 못하는 상황,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극심한 빈부 격차에 놓여 있는 여전한 식민주의적 현실을 이들은 지적했다.

그런 와중에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한 명이 곤봉에 맞아 숨졌다. 런던 경찰은 이를 은폐하려다가 <가디안>의 사진 자료로 더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자본의 계급 권력을 옹호하는 국가의 경찰 기능에 의해 타살된 한 청년의 희생은 오늘날 세계가 놓여 있는 모순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본의 악마적 탐욕의 구조는 여러 형태로 자신의 겉모습을 변화시켜오면서 지속되고 있으며, 민초들은 발언권을 상실당하고 있다.

월터 미뇰로가 가하는 도전


▲ <라틴 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월터 미뇰로 지음, 김은중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따라서 한국에서 열리는 G20 정상 회의는 우리에게 선진국 진입 잔치가 아니라 자본의 세계적 지배 구조를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타개하면서 우리의 현실이 절실하게 요구하는 바를 정면으로 내거는 기회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선진화"라는 구호에 매몰된 채 우리사회에서 삶의 권리가 배제되고 누락된 현실의 뿌리를 제대로 캐내지 못하며, 누가 이를 극복할 중심에 서야 하는지도 명백하게 깨닫지 못하고 말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월터 미뇰로의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The Idea of Latin America)>를 읽는 것은 세계의 현재 질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사유 방식에 중대한 파열을 일으키면서 인식의 충격적인 전환을 가져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스페인 문학 연구로 문장의 깊이를 연마해온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김은중의 빈틈없이 유려한 번역은 우리에게 읽는 즐거움과 사회과학적 사유의 명징성을 체험하게 해 줄 것이다.

이 책은 서구 자본주의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역사적 관찰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서구가 시동을 건 근대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안에 구조적으로 내포된 식민지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 내부에도 끊임없이 이 식민지성을 확대 심화시키는 체제를 지속시키게 될 뿐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런 주장은 종속론이나 제국주의론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듯하지만, 월터 미뇰로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우리 내부에 누군가를 누락, 배제시키고 이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의식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는 점을 치밀하게 파헤친 점이다.

그로 말미암아 정작 그 요구가 채워져야 할 이들은 지속적으로 주변부화되고, 현실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자들은 서구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착취 구조에 연결된 근대성 논리를 지원하고 이를 새로운 환경에서 계속 다른 이름으로 내걸고 자신들의 특권을 거머쥐는 자들이 된다.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

미뇰로의 어법에 따르면 근대라는 역사적 지점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가 작동했으며 따라서 이를 분명하게 응시하고 이것의 지속적인 유지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이를 해체하는 "탈식민지적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새로운 대안 체제를 상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아메리카"라는 개념은 서구 제국주의의 대륙 약탈에 따른 기획의 결과이며, 여기에 "라틴"이 붙었을 때 이는 앵글로색슨이 지배하는 북아메리카와는 별도의 영토로 확정하려 했던 남미 유럽계 후손들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이 지역 원주민들을 비롯한 비(非) 유럽계 인종과 주민들을 억압, 배제하는 식민지성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착취와 폭력의 결합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대륙에 대한 유럽적 명명(命名)은 이 대륙의 주체가 되어야 할 원주민들을 비롯한 노예 체제의 후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인식의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를 정당화하고 유지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이 대륙을 서구의 자원으로 보게 하며 이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이들 서구의 자본주의체제에 동원될 노동력 내지는 소모품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어머니 대지"라는 뜻을 가진 '파차쿠타' 등의 개념이 라틴아메리카 내부에서 거론되고 주장되는 것은 식민적 상처를 극복하고 이들의 주체적인 목소리와 요구를 담아내는 중대한 출발일 수 있다. 미뇰로의 관점을 중심에 놓고 보자면 기존의 좌파가 가지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인식도 수정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폭력적인 정치경제 상황을 겪은 라틴아메리카의 최근 진보적 변화를 놓고 서구 진보 세력이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권력이라고 부르거나 볼리비아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의 대통령 당선을 라틴아메리카 좌파 노선에 대한 합류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내부의 탈식민적 전환과 그간 배제되어왔던 원주민 주체의 새로운 세계관, 그리고 대안의 선택이라는 차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 출신의 에보 모랄레스의 존재는 북미주 원주민들이 거의 제거되다시피 한 기반 위에 이루어진 미국의 흑백 혼혈 오바마의 당선과는 전혀 역사적 궤를 달리하는 사건인 것이다.

원주민의 정체성과 그 발언권의 회복

그래서 미뇰로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이냐시오 라모네가 에보 모랄라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선을 이렇게 비판한다.

"라모네는 모랄레스의 당선을 원주민 운동이 라틴아메리카 좌파에 합류하는 좌파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그 반대였다. 다시 말해, 모랄레스의 집권은 혁명의 주도권이 오로지 마르크스주의 좌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좌파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유럽 중심적 좌파가 스스로를 지역화하고 이를 통해 재기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이렇게 좌든 우든 서구 자본주의와 그 대항 논리가 유포해온 인식에서 실종된 원주민 주체성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탈식민적 전환의 중대한 동력이며 이를 주목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인 이들의 요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대안의 실현이 가능해질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미뇰로의 이러한 인식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정리된 프란츠 파농의 인식, 즉 서구 식민주의 체제 아래 배제되고 그 원초적 정체성이 부인되어 왔던 존재들의 발언권 회복과 탈식민화의 움직임에 맞닿아있음을 알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권력 집중의 혐의를 받고 있는 차베스와는 또 구별되는 에보 모랄레스의 의미를 주목하게 된다.

"에보 모랄레스 정부는 행정, 경제, 교육 분야에서 탈식민성 기획을 확실하고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주체성을 탈식민화하는 것 혹은 존재를 탈식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이 생산할수록 (남들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철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식민적 사유이다. (…)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에 선출된 것은 지정학적 게임의 법칙이 탈식민적 전환의 시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전환은 라틴아메리카 `이후'를 예시하는 사건이다."

역자인 김은중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책 전체에서 미뇰로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탈식민적 선택은 논쟁의 내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논쟁의 틀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자유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 기획으로부터 벗어나(de-link) 지역의 필요성을 재설정하는 (re-link) 작업을 통해 또-다른 패러다임을 건설하는 것이다. (…) 길은 이미 정해졌다. 탈식민적 선택은 좌우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회복이며, 전 지구적 수준의 윤리적 해방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내다보면서 서구 자본주의의 근대성 논리가 숨기고 있는 식민성의 논리로부터 "결별(delinking)"할 것을 요구한 사미르 아민의 주장이 확대 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해방을 위한 미래의 보편적 흐름

사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적 상처(<Open Veins of Latin America>)를 정리해낸 에두아루도 갈레노라든가 이슬람권에 대한 인식 재구성(<The Venture of Islam>)을 시도한 마샬 호지슨, 아프리카의 문명사적 목소리를 파고 들어간 마틴 버널(<Black Athena>)등을 비롯한 학문적 운동의 보편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또한 1972년 가이아나의 지식인 월터 로드니가 <유럽은 어떻게 해서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았는가?(How Europe underdeveloped Africa?)>를 내놓았을 때 주었던 충격에서 예상되었던 궤도이다. 이제 문제는 이를 우리 자신의 사유 방식으로 선택해서 "근대성과 선진화"라는 식민성에 기초한 인식의 틀을 어떻게 해체하면서 이 나라 민중의 가장 절절한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대안적 선택을 만들어낼 것인가에 있다.

본래 아프리카 전문가였던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근대 세계 체제의 뿌리를 캐들어 가면서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냈다고 한다면, 이제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철학자 엔리크 뒤셀을 비롯해서 월터 미뇰로 등은 그 모순의 희생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대안의 미래를 구성해가는 시대를 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을 덮고 나서 던지게 되는, 또는 던져야 할 질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요구와 주체적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가져다 준 생각과 인식의 틀(식민적 권력 매트릭스)의 논리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자신의 역사가 겪은 식민적 상처에 둔감한 지역의 주민들은 탈식민적 전환을 이루어낼 수 없다.

그 어떤 미래의 선택도 이제는 이 전환의 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오래 걸리고 힘들다 해도 말이다. 미뇰로는 이것을 앞으로 다가올 "500년을 위한 투쟁"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작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못한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한 우리의 500년 투쟁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식민적 권력의 해체를 기도하지 않는 일체의 시도는 지난 과거의 되풀이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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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안대회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이 담고 있는 흥미로운 내용부터 전해야 할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조선 시대 스타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이 책은 한 치도 과장하지 않고, 조선 시대 음지에서 활약했던 마이너들의 생과 그들이 살았던 앞 뒤 골목의 숱한 광경들을 들려준다. 사회 밑바닥의 음습한 세계에 기생했던 인물들, 그들에 관한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이 샘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책이다. 시대와 그 인물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미시사에 속한 책이다.

하여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금서'와 같은 책이기도 하다. 시대의 낮은 곳에 임했던 그들의 삶이 액정화처럼 송두리째 드러날 때, 책 읽는 이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책의 제목 가운데 '조선을 사로잡은' 이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마뜩치 않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들에게 사로잡혔고, 다 읽고는 풀려나고 싶지 않았다.


▲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안대회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한겨레21>에 '조선의 비주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을 다듬어 낸 이 책에 등장하는 스타들은 참으로 놀라운 인물들뿐이다. 오늘날로 치면 주류 사회의 명사가 아니라 비주류 사회의 명물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가수, 구기 연기인, 재담꾼, 책 읽어주는 사람, 광대, 유랑 연예인, 사업 사업가, 노처녀 떡장수, 비구니, 무인, 기녀, 노비 시인, 서당 선생, 강도, 도둑, 조방꾼, 점쟁이"(4쪽) 등과 같은, 저자가 고문헌을 통하여 발굴한 다채롭기 그지없는 인물들이다.

그들을 분류하면, 도회지 거리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기예를 타는 대중예술가들이고, 18세기에 큰 화제를 뿌렸던 여성들이고, 도시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이고, 도회지의 어둠과 환락가의 재산을 갈취하는 대도와 신출귀몰한 의적들이다. 책의 내용을 줄일라치면, 저자가 쓴 것처럼, 조선의 "도시 공간에서 그들이 펼치는 인생은 우리가 자주 접해왔던 조선 시대 사람들, 그것도 상류층 양반들의 그것과는 꽤 거리가 있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삶이 아니라 감성적인 삶이 앞서고 금욕적인 태도보다는 욕망의 충족을 지향하고, 향촌의 고즈넉한 분위기보다는 도회지 시장의 왁자지껄한 소음을 배경으로 (…) 여기에 등장하는 대중예술가나 그 예술을 향유하는 도회민들은 볼거리, 들을 거리, 즐길 거리를 두고서 망설이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이를 통하여 우리들은 "도회지 서민들 틈에서 성장한 대중예술이 문화와 예술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어 조선 후기 서민문화의 한 축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9쪽)

이렇게 쓰고 나면, 이 책은 조선 시대 후기 시민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쪽으로 기울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이들을 통하여 "예술과 재능 너머에 도사린 따뜻한 인간적 품격, 제 아무리 시장 윤리가 깊숙이 파고든 도회지 시장과 골목일지언정 아직은 인륜적 가치가 살아있어 살 만한 세상이라는 위안, 적어도 이들 명물들은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삶을 영위한 부류들 가운데서 사람다운 품위를 지켰다는 점, 그것이 세대와 지역을 넘어 후대에까지 기억되는 또 하나의 이유"(11쪽)임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옛 문헌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저자의 학문적 태도를 말하는 부분이기도 한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지배 집단에 속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영역을 개척한 이들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하여 저자가 읽은 흥미진진한 책들을 덤으로 알려주고 있다. 조선 후기 도시 뒷골목의 인물들과 이야기들이 문사들의 붓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명성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책들은 거의 잊힌 채 도서관에 누워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 책들을 일으켜 세우고, 한장한장 읽어간다. 저자가 손으로 넘긴 것은 책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은밀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 책들을 여기에 적어보자.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문헌은 <추재기이>(조수삼)이다. (조선 후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명물들을 다룬 이 책은 저자에 의해서 번역·출간될 예정이다.) 그리고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녹파잡기>(한재락), <도협서>(유희), <운소만고>(이영유), <어우야담>(유몽인), <학산한언>(신돈복), <소심유고>(신익), <이향견문록>(유재건), <해암고>(유경종), <해동죽지>(최영년), <청구야담>(편자 미상), <음청사>(김윤식), <대릉유고>(홍낙순), <천예록>(임방), <어수신화>(장한종), <연석>(유언호), <무명자집>(윤기), <석북집>(신광수) 등이 덧보태진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역사책, 문학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이다.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책들 속에 조선 시대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이 살아있다. 책 끝에 붙어있는 참고 문헌들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가 이런 문헌들을 소상하게 적고 있는 것은 "단순히 개별적인 현상과 인간에 관한 보고서에 그치지 않고", "조선 후기 사회의 역동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적절하게 기여할 수 있"(12쪽)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과 등가로 놓을 수 있는 저자의 또 다른 책은 '자신이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이 도전한 사람들'이란 부제가 붙은 <조선의 프로페셔널>(휴머니스트 펴냄)이다. 이 책도 역사가 주목하지 않은 분야의 프로페셔널들을 찾아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여행가, 프로 기사, 춤꾼, 만능 조각가, 책장수, 원예가, 천민 시인, 기술자 등등 역사 교과서는커녕 자유롭게 서술한 역사책에서도 한 줄 소개되지 않는 분야와 사람들"이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바는 우리들이 곱새길 필요가 있는 중요한 언급이다. 저자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와 인간들을 조금이나마 조명할 수 있다면, 역사와 문화는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 역사가 정치나 제도 같은 공식적이고 중요한 것만 다룬다면, 구체적으로 생생한 인간의 삶과 문화는 어디에서 찾을까요? 그러므로 일상의 삶과 인간의 문화로 역사의 시선을 넓혀야 합니다." (7쪽)

승자독식의 사회, 신자유주의 망령, 자연을 파괴하는 거짓과 부패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여기, 이 책은 우리들에게 깨어있는 시선, 의식, 삶이 무엇인지를 통렬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럴수록 힘든 길을 걸어야 하고, 자신을 다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길과 자신의 모습이 하나로 포개졌던 조선 시대, 후미진 곳에서 진정한 삶을 살았던 '선수'들, 제 삶에 사로잡혔던 영혼들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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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공동체를 상상하기 위한 책의 힘

21세기 초반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화두 가운데 하나는 동아시아 공동체였다. 이제 약간 김이 빠진 감도 없지 않은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에 새로운 자극이 주어졌다. 책을 통해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해보자는 출판인들의 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동아시아 책의 사상 책의 힘>(동아시아출판인회의 기획, 한길사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해제집(이하 <동아시아 책>)은, 2005년부터 시작된 "책으로 만드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꿈"을 이루기 위한 출판인들의 노력의 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를 키워드로 한 지식인들의 교류는 이제 지겨울 정도로 흔한 일이 되었지만, 결국 특정 지식인들의 교류 이상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한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를 책이라는 물질 형태를 통해 실현해보려는 이번 시도는 동아시아 차원에서 '지적 교류'의 기초를 넓히는 작업이자 기존의 교류 형태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도전이기도 하다. 민족주의 연구의 새로운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에서 민족주의가 가능해지는 한 조건으로 출판 자본주의의 존재가 거론된 것을 상기한다면, 동아시아라는 지정학적 지역을 책을 매개로 해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보자는 출판인들의 도전은, 단순한 담론 수준의 민족주의 비판을 넘어, 민족을 만들어낸 '책의 힘'을 다르게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동아시아 책의 사상 책의 힘 : 동아시아 100권의 인문 도서를 읽는다>(동아시아출판인회의 기획, 한길사 펴냄). ⓒ한길사
해제집이라는 형태는 사람들이 보통 접하는 장르의 책에 속하지는 않지만, <동아시아 책>은 소개된 다양한 책들과 그 해제를 통해서 최근 동아시아 지역의 지적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일종의 지도책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특히 중국 대륙에 대해서 "계급투쟁이 역사의 근본적인 동력이라는 잘못된 관점"(189쪽)이라고 표현한다든가 '경제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중국 현대사를 평가하는 것(248~250쪽)을 볼 때, 사회 체제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의 지적 지형 자체가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을 어떤 어지러움 속에서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일본 측 필자들의 약력에 간간히 나타나는 '일본공산당 입당'이라는 말은 일본 지성계에 마르크스주의가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상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직 펼쳐 보지 못한 책과 그 세계와의 만남에 가슴 설레게 만드는 이 책은 지도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행 안내서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가지 못하더라도 여행 안내서를 보면서 상상 여행을 즐길 수 있듯이 인문학의 다양한 세계와의 만남을 상상하면서 띄엄띄엄 페이지를 넘기는 것도 좋고, 또 그 세계로 뛰어들기 위한 준비 운동으로 통독하는 것도 이 책의 좋은 활용법일 것이다.

각 지역에서 대가라고 부를 만한 쟁쟁한 학자들의 저작이 열거된 이 책을 보면 이 지역 인문학의 축적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인문학의, 또는 글쓰기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礼道子)의 <고해정토(苦海淨土)>가 선정된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이미 한국에서도 <슬픈 미나마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아름다운 책은 여러 의미에서 특기할 만한 존재다.

선정된 100권의 책의 필자 103명 가운데 단 3명뿐인 여성 가운데 1명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참고로 한국에서 선정된 27명의 필자는 모두 남성이다), 거의 대부분이 박사 학위 소지자인 필자들 가운데 대학에서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은 단 2명 가운데 1명(또 한 사람은 김구)이기 때문이다. 이시무레는 1969년에 출판된 <고해정토>를 통해 알려지기 전까지는 재야에서 글쓰기를 배운 시골의 한 가정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제도화된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이 책의 존재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제도 학문에 환원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동아시아는 보일까

동아시아 지역에서 처음 시도된 '동아시아 독서 공동체' 형성을 위한 출판인들의 작업은 충분히 평가되어야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고민해 볼 만한 문제가 생긴다. <동아시아 책>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결국 '동아시아'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 대륙과 일본에서 선정된 책들은, '동아시아'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선정되고 해제가 서술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앞서 언급한 <고해정토>의 선정은 탁견이라고 할 만하지만 해제자에게 '동아시아'라는 문제의식이 분명하게 있었다면,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제공한 신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가 과거 식민지 조선에 진출해 급성장한 기업임을, 그리고 공장 폐수가 원인임을 회사 측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유기수은폐액을 한국으로 수출하려고 했다는, <고해정토>에서 지적되는 사실을 해제에서도 언급해야 했을 것이다.

단순한 지역적 인접성을 넘어 역사적 연관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와서 '동아시아'를 운위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 <동아시아 책>과 유사한 책이 일본과 미국, 또는 중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기획되었다고 하더라도 선정된 책과 해제는 그대로 통할 것이다. 그만큼 문제로서의 '동아시아'는 공유되어 있지 않아 보이는데, 단순히 한·중·일 삼국의 합이 동아시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마 중국은 타이완과 홍콩이라는 요소를 대륙과 별도로 설정했기 때문에 '한·중·일 삼국'이라는 국제 질서에 약간이나마 파열음을 낼 수 있었지만, 일본의 경우 오키나와라는 존재가 배려되지 않았으며 한국의 경우에도 북한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외국에 있는 '동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자국 인문학의 정수라 할 만한 책을 추천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11쪽, 강조는 인용자) 선정 기준에 의해, 즉 어떤 국가를 대표하는 것으로 선정된 책들을 통해 동아시아를 찾아보려는 것 자체가 원체 무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를 잘 드러내지 못한 책들 속에서도 타이완에서 선정된 책들을 통해서는 '동아시아'가 어떤 역사성을 지니면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성이나 민족문화와 같은 언뜻 보기에 초역사적인 것이 탐구의 대상이 되는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이 타이완의 역사적 위치와 결합되면서 가시화되기 때문이다(<중국인의 성격> 및 <중화 민족의 흩어짐을 말한다> 해제 참조).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타이완의 저우완야오(周婉窈)의 <타이완 역사 도설>에 관한 부분이다. 타이완의 역사를 서술한 이 책은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질문으로 장을 열었"(312쪽)듯이 '한·중·일 삼국'이라는 국제적 주체/주어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인식에 질문을 던진다. 예룽중(葉榮鐘)의 <일제 치하 타이완 정치·사회 운동사>에 대한 해제에서 거듭 등장하는 '민족운동', '민족의식'이라는 언뜻 보기에 자명한 개념이 '타이완인'이라는 말과 나란히 존재함으로써 빚어내는 삐걱거림(272~274쪽)을 말로 표현한 것이 저우완야오의 '누구'라는 질문이다.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타이완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민족의식'이란 한족들의 '중화 민족' 의식인가? 아니면 타이완 원주민들의 의식인가? '타이완인'이라는 범주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현재 타이완이라는 정치적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마치 자연스러운 범주처럼 보이는 '타이완인'이라는 범주는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이와 같이 타이완이라는 지역의 역사는 국가 간(inter-national) 관계 속에서 인정된 어떤 주어를 통해서 서술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안고 있기에 이와 같은 삐걱거림이 항상 생겨나는 것인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계속 타이완 사람들이 겪은 어려움을 저우완야오는 '식민 후의 늪'이라고 표현했으며 해제자 또한 "이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지는 여전히 타이완 사람들에게 가장 큰 도전"(315쪽)이라고 썼다.

온전한 주어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잘 느껴지지 않는 이 '늪'이야말로 우리가 직시해야 할 '동아시아'일 것이며, 이 늪은 오키나와에서도 감지되고 있다(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분들은 2010년에 나온 森宣雄의 <地のなかの革命 : 沖繩戰後史における存在の解放>(現代企劃室 펴냄)을 꼭 참조해주시기 바란다).

'동아시아 독서 공동체' 형성을 위해 간행된 <동아시아 책>은 이 '동아시아'라는 늪 위에 놓인 다리와 같은 것이다. 다리 위에서만 오가는 한 그 밑에 있는 늪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아시아'라는 역사적 형성물을 만들어낸 100년 동안에 거듭된 숱한 폭력은 이 늪의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으며,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를 품은 바람은 다리 위의 사람들에게도 불어올 것이다.

<동아시아 책>을 손에 든 독자들이 다리 밑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 비로소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모색이 시작될 것이다. 이 늪에 빠진 이들과 함께 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고통스럽기조차 할 것이다. 하지만 이시무레가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정토(淨土)를 그려냈듯이 이 늪에서야말로 글쓰기의 힘은 발휘될 것이며, 그 힘을 믿는 한 '동아시아 독서 공동체'를 향한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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