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공동체를 상상하기 위한 책의 힘
21세기 초반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화두 가운데 하나는 동아시아 공동체였다. 이제 약간 김이 빠진 감도 없지 않은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에 새로운 자극이 주어졌다. 책을 통해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해보자는 출판인들의 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동아시아 책의 사상 책의 힘>(동아시아출판인회의 기획, 한길사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해제집(이하 <동아시아 책>)은, 2005년부터 시작된 "책으로 만드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꿈"을 이루기 위한 출판인들의 노력의 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를 키워드로 한 지식인들의 교류는 이제 지겨울 정도로 흔한 일이 되었지만, 결국 특정 지식인들의 교류 이상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한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를 책이라는 물질 형태를 통해 실현해보려는 이번 시도는 동아시아 차원에서 '지적 교류'의 기초를 넓히는 작업이자 기존의 교류 형태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도전이기도 하다. 민족주의 연구의 새로운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에서 민족주의가 가능해지는 한 조건으로 출판 자본주의의 존재가 거론된 것을 상기한다면, 동아시아라는 지정학적 지역을 책을 매개로 해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보자는 출판인들의 도전은, 단순한 담론 수준의 민족주의 비판을 넘어, 민족을 만들어낸 '책의 힘'을 다르게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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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책의 사상 책의 힘 : 동아시아 100권의 인문 도서를 읽는다>(동아시아출판인회의 기획, 한길사 펴냄). ⓒ한길사 |
해제집이라는 형태는 사람들이 보통 접하는 장르의 책에 속하지는 않지만, <동아시아 책>은 소개된 다양한 책들과 그 해제를 통해서 최근 동아시아 지역의 지적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일종의 지도책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특히 중국 대륙에 대해서 "계급투쟁이 역사의 근본적인 동력이라는 잘못된 관점"(189쪽)이라고 표현한다든가 '경제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중국 현대사를 평가하는 것(248~250쪽)을 볼 때, 사회 체제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의 지적 지형 자체가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을 어떤 어지러움 속에서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일본 측 필자들의 약력에 간간히 나타나는 '일본공산당 입당'이라는 말은 일본 지성계에 마르크스주의가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상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직 펼쳐 보지 못한 책과 그 세계와의 만남에 가슴 설레게 만드는 이 책은 지도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행 안내서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가지 못하더라도 여행 안내서를 보면서 상상 여행을 즐길 수 있듯이 인문학의 다양한 세계와의 만남을 상상하면서 띄엄띄엄 페이지를 넘기는 것도 좋고, 또 그 세계로 뛰어들기 위한 준비 운동으로 통독하는 것도 이 책의 좋은 활용법일 것이다.
각 지역에서 대가라고 부를 만한 쟁쟁한 학자들의 저작이 열거된 이 책을 보면 이 지역 인문학의 축적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인문학의, 또는 글쓰기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礼道子)의 <고해정토(苦海淨土)>가 선정된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이미 한국에서도 <슬픈 미나마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아름다운 책은 여러 의미에서 특기할 만한 존재다.
선정된 100권의 책의 필자 103명 가운데 단 3명뿐인 여성 가운데 1명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참고로 한국에서 선정된 27명의 필자는 모두 남성이다), 거의 대부분이 박사 학위 소지자인 필자들 가운데 대학에서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은 단 2명 가운데 1명(또 한 사람은 김구)이기 때문이다. 이시무레는 1969년에 출판된 <고해정토>를 통해 알려지기 전까지는 재야에서 글쓰기를 배운 시골의 한 가정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제도화된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이 책의 존재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제도 학문에 환원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동아시아는 보일까
동아시아 지역에서 처음 시도된 '동아시아 독서 공동체' 형성을 위한 출판인들의 작업은 충분히 평가되어야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고민해 볼 만한 문제가 생긴다. <동아시아 책>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결국 '동아시아'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 대륙과 일본에서 선정된 책들은, '동아시아'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선정되고 해제가 서술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앞서 언급한 <고해정토>의 선정은 탁견이라고 할 만하지만 해제자에게 '동아시아'라는 문제의식이 분명하게 있었다면,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제공한 신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가 과거 식민지 조선에 진출해 급성장한 기업임을, 그리고 공장 폐수가 원인임을 회사 측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유기수은폐액을 한국으로 수출하려고 했다는, <고해정토>에서 지적되는 사실을 해제에서도 언급해야 했을 것이다.
단순한 지역적 인접성을 넘어 역사적 연관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와서 '동아시아'를 운위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 <동아시아 책>과 유사한 책이 일본과 미국, 또는 중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기획되었다고 하더라도 선정된 책과 해제는 그대로 통할 것이다. 그만큼 문제로서의 '동아시아'는 공유되어 있지 않아 보이는데, 단순히 한·중·일 삼국의 합이 동아시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마 중국은 타이완과 홍콩이라는 요소를 대륙과 별도로 설정했기 때문에 '한·중·일 삼국'이라는 국제 질서에 약간이나마 파열음을 낼 수 있었지만, 일본의 경우 오키나와라는 존재가 배려되지 않았으며 한국의 경우에도 북한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외국에 있는 '동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자국 인문학의 정수라 할 만한 책을 추천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11쪽, 강조는 인용자) 선정 기준에 의해, 즉 어떤 국가를 대표하는 것으로 선정된 책들을 통해 동아시아를 찾아보려는 것 자체가 원체 무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를 잘 드러내지 못한 책들 속에서도 타이완에서 선정된 책들을 통해서는 '동아시아'가 어떤 역사성을 지니면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성이나 민족문화와 같은 언뜻 보기에 초역사적인 것이 탐구의 대상이 되는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이 타이완의 역사적 위치와 결합되면서 가시화되기 때문이다(<중국인의 성격> 및 <중화 민족의 흩어짐을 말한다> 해제 참조).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타이완의 저우완야오(周婉窈)의 <타이완 역사 도설>에 관한 부분이다. 타이완의 역사를 서술한 이 책은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질문으로 장을 열었"(312쪽)듯이 '한·중·일 삼국'이라는 국제적 주체/주어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인식에 질문을 던진다. 예룽중(葉榮鐘)의 <일제 치하 타이완 정치·사회 운동사>에 대한 해제에서 거듭 등장하는 '민족운동', '민족의식'이라는 언뜻 보기에 자명한 개념이 '타이완인'이라는 말과 나란히 존재함으로써 빚어내는 삐걱거림(272~274쪽)을 말로 표현한 것이 저우완야오의 '누구'라는 질문이다.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타이완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민족의식'이란 한족들의 '중화 민족' 의식인가? 아니면 타이완 원주민들의 의식인가? '타이완인'이라는 범주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현재 타이완이라는 정치적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마치 자연스러운 범주처럼 보이는 '타이완인'이라는 범주는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이와 같이 타이완이라는 지역의 역사는 국가 간(inter-national) 관계 속에서 인정된 어떤 주어를 통해서 서술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안고 있기에 이와 같은 삐걱거림이 항상 생겨나는 것인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계속 타이완 사람들이 겪은 어려움을 저우완야오는 '식민 후의 늪'이라고 표현했으며 해제자 또한 "이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지는 여전히 타이완 사람들에게 가장 큰 도전"(315쪽)이라고 썼다.
온전한 주어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잘 느껴지지 않는 이 '늪'이야말로 우리가 직시해야 할 '동아시아'일 것이며, 이 늪은 오키나와에서도 감지되고 있다(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분들은 2010년에 나온 森宣雄의 <地のなかの革命 : 沖繩戰後史における存在の解放>(現代企劃室 펴냄)을 꼭 참조해주시기 바란다).
'동아시아 독서 공동체' 형성을 위해 간행된 <동아시아 책>은 이 '동아시아'라는 늪 위에 놓인 다리와 같은 것이다. 다리 위에서만 오가는 한 그 밑에 있는 늪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아시아'라는 역사적 형성물을 만들어낸 100년 동안에 거듭된 숱한 폭력은 이 늪의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으며,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를 품은 바람은 다리 위의 사람들에게도 불어올 것이다.
<동아시아 책>을 손에 든 독자들이 다리 밑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 비로소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모색이 시작될 것이다. 이 늪에 빠진 이들과 함께 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고통스럽기조차 할 것이다. 하지만 이시무레가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정토(淨土)를 그려냈듯이 이 늪에서야말로 글쓰기의 힘은 발휘될 것이며, 그 힘을 믿는 한 '동아시아 독서 공동체'를 향한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