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환경운동가는 연말이 되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연말마다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인도네시아 발리(13차), 2008년 폴란드 포즈난(14차),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15차)에서 열린 이 회의는 11월 말 멕시코 칸쿤에서 또 열린다.

정부, 기업 관계자야 '공돈'으로 다녀오면 되지만, 최저 생계비도 못 미치는 박봉에 빚이 산더미이기 마련인 환경운동가는 호텔 예약은커녕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도 어렵다. 기업, 언론, 재단 등에 손을 내밀어 보지만, 환경운동가의 급한 상황에 신경을 써주는 곳은 별로 없다. 결국 '돈줄'을 잡지 못한 몇몇은 한 번 더 카드를 긁는다.

매번 반복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외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환경 회의에 환경운동가가 빚을 져가며 참석해야 하는 모습이 대통령부터 '녹색 성장'을 외치는 나라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부도덕한 조직처럼 난타를 당하는 환경단체의 이런 현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이런 답답함 한 편으로 삐딱한 의문도 든다. 환경운동가들이 수십 명씩 인도네시아, 폴란드, 덴마크, 멕시코로 가는 게 과연 지구 온난화를 막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 말이다. 혹시 정치인, 기업인이 모이는 곳에 사회운동가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푸닥거리를 하는, 그런 유행에 환경운동가도 홀린 게 아닌가?

1000일 동안 "진짜 녹색"을 찾다


▲ <착한 에너지 기행>(김현우·이강준·이영란·이정필·이진우·조보영·한재각·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들이 펴낸 <착한 에너지 기행>(이매진 펴냄)을 펼쳤다. 이 책은 이들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말 그대로 아시아, 유럽 등 세계 각국을 종횡무진 누비며 다닌 기록을 모은 것이다. (흥미로운 실험이 많이 진행 중인 남아메리카가 빠졌는데, 경비 문제일 것이라 짐작된다.)

이 책은 크게 앞부분(1부)과 뒷부분(2부~4부)으로 나뉘어 있다. 앞부분은 유럽, 일본에서 앞표지의 말을 빌리자면 "진짜 녹색"을 실천하는 곳을 찾아간 것이다. 그간에 나온 이와 비슷한 기획의 책에서 놓쳤던 곳을 소개하는 것이 이 부분의 미덕이다. 독일 무바크, 오스트리아 무레크, 일본 오가와마치 등은 그 예이다.

뒷부분에서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환경 정의'가 세계 각국의 예를 통해서 강조된다. 그간 언론을 통해서 산발적으로 소개되었던 자원 개발로 고통을 받는 타이, 인도네시아, 버마, 라오스 원주민의 현실을 고발하고(2부), 수차례에 걸친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는 인류의 희망이 어떻게 꺾이는지 보여준다(4부).

이 책을 펴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 변화가 제1세계, 제3세계를 가리지 않고 노동자·서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을 강조했다. 경제-환경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고자 연대를 선택한 노동운동, 환경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데 한 부분을 할애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리라(3부).

환경운동, 이젠 변해야 할 때다

애초의 기획 의도와는 상관없이 <착한 에너지 기행>은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는 환경운동의 실천에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만약 이런 효과를 기대했다면 글의 서문 등에서 한 번쯤 자신의 입장을 강조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모두에서 언급한 의문을 염두에 두고, 두 가지만 살펴보자.

4부에 실린 2005년부터 2009년에 열린 다섯 차례의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의 참관 후기에서 잘 드러나듯이, 현재의 기후변화협약 틀은 이미 실패했다. 이런 식으로는 지구 온난화를 막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지부진한 협상 속도로는 이 불만족스러운 틀마저도 실현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차피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는 국제 협약의 틀이 제1세계 선진국과 초국적 대기업의 면피용으로 전락했다면, 환경운동가들이 매번 협상 장소를 찾아가 들러리를 서는 것은 실효성 없는 국제 협약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꼴에 불과하다. 즉, 이제는 환경운동이 국제 협약에 목을 매는 모습에서 탈피해야 한다.

어차피 기후변화협약이 실패할 게 뻔하다면, 온실 기체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그에 따른 지구 온난화도 피할 수 없다. 그런 지구 온난화가 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의 기후에 어떤 변화를 야기할지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다만 그 변화가 작든 크든 그에 '적응'하고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오는 11월에 환경단체가 기후변화협약 총회가 열리는 멕시코 칸쿤 대신 찾아갈 곳은 어디인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답을 준다. 바로 항상 말로만 강조했던 '지역'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진짜 녹색"을 실천하는 세계 곳곳의 모습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대한민국 곳곳에서 세계가 주목할 실천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저자들도 강조했듯이 이 책에 실린 유럽, 일본의 사례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물론 '원자력 에너지'를 '녹색 에너지'라고 우기는 정치인, 공무원이 득세하는 한국에서 유럽, 일본의 실천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 지역에 맞춤한 실천을 오랫동안 고민해 왔듯이, 우리도 한국의 맥락에 맞는 실험을 시도해야 하리라.

진주, 목포, 전주에 '녹색'을 칠하자

만약 경상남도 진주, 전라남도 목포, 전라북도 전주에서 오스트리아 그라츠처럼 시민들이 폐식용유를 모아, 지역 기업에서 바이오디젤을 만들고(고용 창출!), 지역 버스의 연료로 사용하는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 이런 실험이 이 땅에서 현실이 될수록 이 책의 저자들의 비전은 '몽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내심 앞으로 5년 후에 나올 이 책보다 훨씬 두꺼운 <착한 에너지 기행 2>를 기대해본다. 그 책에는 온실 기체를 엄청나게 내뿜으며 지구를 덥게 하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는, 이 땅의 "진짜 녹색" 실천 사례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사실, 그런 식으로라도 '구명정'을 만들지 않으면, 지구의 밝은 미래는…글쎄,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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