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창비 펴냄)의 저자 오인동 선생은, 책 뒤표지의 소개 글에 의하면, "통일과 의업(醫業)의 두 길을 걸어온" 재미 동포 의사이다.
부연하자면 저자는 한국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미국에 유학한 이래 정형외과 의사, 특히 인공 고관절(엉덩이관절) 분야의 전문가로 70대인 지금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처음 평양을 방문한 뒤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는 등 통일운동가로도 크게 활약하고 있다.
이제 북한 방문기는 책으로 출판된 것만 해도 적어도 100종은 될 것이며, 개인 블로그 등에 실린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 세상이 되었다. 그만큼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남북이 가까워진 덕택이다. 하지만 올해에 평양을 방문하여 그곳 소식을 전하는 한글 책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최근 들어 경색되고 악화된 남북 관계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북녘의 구체적인 모습을 처음 우리에게 전하고 그럼으로써 대중적인 통일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재미 동포들이었다. 북한에 대해 정부 발표 이외의 어떤 생각을 하는 것조차 금기였던 한국 사회에 전해진, 양은식·선우학원·최익환 등 재미 동포들의 방북기 <분단을 뛰어 넘어 : 북한 방문기>(1984년)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6월 시민 항쟁" 이듬해인 1988년 서울에서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까지 몇 해 동안 "불법 복사물"의 형태로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면서 읽혔던 이 책이 들려준 메시지는 대체로 북녘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메시지가 충격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오히려 당시 한국 사회의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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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오인동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그 무렵 이런 일도 있었다. 재미 동포인 홍동근 목사의 방북기 <미완의 귀향 일기>가 출판되자 1988년 11월 2일 그 일로 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런데 한 달 뒤 18년 만에 귀국한 홍 목사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재미 동포의 "특권"에 새삼 놀랐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북한 방문을 재미 동포들은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다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요즈음도 해외 동포들은 북녘 고향을 방문하여 헤어졌던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고 있다.)
이듬해에 문익환, 황석영, 서경원, 임수경 등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연이어 북한을 찾았지만 역시나 모두 중형을 받았다. 지난 6월 이 책의 저자인 재미 동포 오인동 선생과 한국인 한상열 목사가 각각 평양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한 목사는 구속되었고 오 선생에게는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
필자가 재미 동포를 시샘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의 그 동안 활동을 폄하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오인동 선생과 같은 사람들이 한국 정부에게서 처벌을 받지는 않더라도 실제 행동이나 생각과는 무관하게 동포 사회 등으로부터 "친북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적지 않은 냉대를 받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남북 관계가 어려울 때일수록 재외 동포들의 역할이 더욱 막중하고 소중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과의 의료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튼 것도 역시 재외 동포들이었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일 동포 의사 김만유 선생이 1986년 평양에 1000 병상이 넘는 대규모 현대식 병원인 "김만유 병원"을 세운 일이다. (김만유 선생 역시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리고 재미 동포 의사들도 1980년대부터 북한을 방문하여 새로운 의료 기술을 전수하고, 필요한 의료 시설과 장비들을 지원하는 협력 사업을 계속해 왔다.
북한이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분야는 의료와 교육이다. 1950년대부터 무상 의료와 무료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물론 그 내용과 수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자부해온 의료와 교육도 1980년대, 특히 1990년대 이래 어려움에 처했다. 북한 당국도 그러한 점을 인정하는 데 그리 인색하지 않다.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가 북한에 대해 본격적으로 협력과 지원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95년 이래 북한에 닥친 극심한 식량 위기가 계기였다. 기왕의, 또는 신설된 시민단체들이 북녘 "인민들"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 처음에는 식량 지원에 집중되었다. 기아로 어려움을 겪는 사회에 사상과 이념을 떠나 식량을 지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민족 이전에 인간에 대한 도리이고 예의였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자연히 알게 된 사실은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북한 사회의 많은 분야가 과거와 달리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의료의 경우도 의료 장비와 시설, 의약품이 크게 부족해졌다. 세운 지 오래 되어 노후해진 병원도 제대로 보수·개축할 수 없었다. 외부 세계와의 교류도 더욱 줄어들면서 의사들은 새로운 의료 지식과 기술에 접할 수 없게 되었다. 보건의료의 총체적인 위기였다. 보건의료의 위기는 곧바로 인간 생명과 건강의 위협으로 연결될 수 있기에 어떤 분야보다도 시급한 복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위기는 어느 사회에든 닥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적인 협력이 중요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과거 어려웠던 시절, 외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보건의료 분야가 특히 그러했다.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도리만도 아니다. 지금 어려운 사람과 사회와 국가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1990년대 중반 이래 국제 사회와 한국 사회는 북한 보건의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초기에는 의약품과 의료 도구 지원 위주였다. 그 뒤에는 그러한 물자를 만들 수 있는 생산 시설과 병원의 증·개축에도 지원과 협력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의료 지식과 기술을 전습하는 사업도 병행되었다. 적지 않은 한국 의사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그곳 의사들과 함께 수술 등의 진료를 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교환해 왔다.
필자도 지난 2001년부터 1년에 몇 차례씩 북한을 방문하면서 보건의료 협력 사업에 작은 힘을 보태어 왔다. 그러면서 가장 절실하게 체득한 것은, 오인동 선생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신뢰와 역지사지와 소통의 소중함이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오랜 동안 떨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오해도 없지 않았던 남북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간에 신뢰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 신뢰가 싹트려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상대방의 자리에 서려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주 만나야 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남북 간의 보건의료 협력 사업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성과는 서로 간에 신뢰가 형성되고 그러면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도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최근 2년 남짓 사이 남북 정부 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보건의료 협력 사업도 거의 중단된 상태이다. 의약품과 의료 소모품 지원도 끊겼고 병원과 약품 시설 증·개축과 신축도 멈추었다. 결핵약 공급이 끊겨 내성 환자가 더 많이 생기는 일조차 일어났다. 물론 그 동안 어렵게 이루어져온 남북의 신뢰가 하루아침에 파탄나지는 않을 것이지만 교류 중단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신뢰 관계에도 위기가 닥칠 수 있다. 그러한 위기를 막아 주고 있는 것이 오인동 선생과 같은 이들의 소중한 활동이다.
이 책을 통해, 1년 반 남짓 만나지 못했던 평양의학대학병원 의사들의 소식을 알게 된 것, 그리고 그 사이 병원이 오히려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아쉽지만 반가운 일이다.
북한의 보건의료를 지원하는 것은 나 자신의 오늘과 내일의 건강을 증진하는 일이다.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21세기에 우리와 바로 붙어 있는 북녘 사회의 건강 상태는 바로 우리의 건강 상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