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이런 것을 아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의정부와 6조? 유향소? 과거 제도? 5위? 현재 대한민국의 행정 부처가 몇 개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조선의 6조를 알게 한다? 무슨 의미일까? 요즘 저는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 아이들과 국사, 역사 교과서를 같이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역사 교사들이 수업 고민을 나누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많은 역사 교사들이 학교에서 역사 수업을 하며 부딪치는 근본적인, 자기 존재 이유에 대해서 아프게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 저 먼 과거를 오늘 가르치는 것이 도대체 아이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어떤 쓸모가 있는가 물으면 답이 참 궁색해지니까.

아, 뭐 어렵게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역사의 가치를 힘주어 말할 것이다. 인류의 지난 삶을 통해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등등. 그리고 앞에서 의미와 쓸모를 병렬시키며 은근히 의미를 실용적인 면에서 바라보는 현실의 한심함을 비판하고 인문적인 깊이에서 역사를 배우는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억지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가 와 닿을 수 있을까, 여기서 역사 교사들은 벽을 만난다. (언젠가는 깨닫겠지 하며 밀고 나갈 수밖에?)


▲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전 5권,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그런데 이 두꺼운 벽을 더욱 두텁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다. 아이들의 책상과 교사의 교탁 위에 펼쳐진 교과서다. 인류의 삶을 이해한다, 오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준다 등등의 말이 얼마나 거짓말인지, 헛소리인지를 증명해 보여주는 그것. 아, 너무 책임을 교과서에 떠넘기는 것 같아 고생했을 저자들에게 죄송스럽다.

개인적으로도 몇 해 동안 검정(정확한 제도 용어로는 2종) 교과서로 바뀐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해 봤다. 핑계일지 모르지만 우리 제도 안의 역사 교과서가 역사의 재미와 가치를 담아서 아이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 전의 국정(1종) 교과서일 때는 저렴한 원고료와 충분치 못한 제작 기간, 학생 수준을 이해 못하는 연구자들의 서술 등등이 많은 문제로 지적되었다.

검정으로 바뀐 다음에는 검정을 통과하기 위해 법적, 제도적으로 주어지는 교육 과정을 비롯한 문서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 또한 무겁게 교과서를 내리누른다. 게다가 제한된 지면은 친절하고 흥미로운 서술 대신 건조하고 딱딱한 글이 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압력이었다.

서평에 다루어야 할 책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교과서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아이들에게 좋은 역사책을 만날 기회가 더욱 풍부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해주었으면 한다. 물론 교과서와 대중 도서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역사를 친근하게, 재미있게 느끼해 줄 수 있는 그런 책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같지 않을까.

5권에 이르는, 쪽수를 모두 합하면 1500쪽에 이르는 역사문제연구소가 펴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전5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를 단지 친근하고 재미있는가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18년 전에 나온 이 책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와 견준다면, 그 시간이 진일보의 시간이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번 책들에 제시된 시각 자료는 한결 컬러풀하고 시원시원하게 편집되어 보는 맛이 제법이다. 편집만으로도 이 책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손을 끌어당길 것 같다. 유물 사진, 옛 그림, 지도나 그래픽들이 눈에 잘 들어오면서도 잘 정리 전시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보는 맛만이 아니라 읽는 맛에서도 훨씬 부드럽고 매력적인 책이 되었다. 글쓴이가 여럿이다 보니 권이나 장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중의 눈높이를 많이 생각한 노력이 보이는 친절하면서 여유 있는 문체를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좋은 역사책을 접하게 해주고픈 역사 교사로서 반가운 책이다.

한편으로 3월 개학 후 새로운 교육 과정으로 만들어진 '한국사' 수업을 준비하면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또 고마운 마음이다. 아이들이 직접 읽기에는 사실 역사학계의 조금 전문적인 내용도 없지 않은데, 그런 내용들이 교과서에 담지 못한 역사들을 알려 주어 수업 준비에 도움이 되었다.

사실 교과서는 제한된 지면이나 이런 저런 이유로 보여주지 않는, 들려주지 못하는 역사들이 적지 않다. 아이들에게 좀 더 역사적 사고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던져 주고픈 내용들이 있는데, 그럴 때 그것을 적절히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교사로서 쉽지는 않다. 한국의 모든 시대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최근의 세부적인 시대 전공 연구를 따라가기는 어렵고, 다시 그것을 아이들 눈높이로 맞추어 다시 정리한다는 것 꽤 공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군현 문제. 요즘 교과서는 국정이나 새 검정 교과서나 슬쩍 넘어가고 만다. 이전 식민사관에 강조되었던 것에 비해 실제 역사적 가치가 높지 않다는 평가의 반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의 '식민지 콤플렉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특강 형식으로 구성된 꼭지 가운데 '한사군, 식민지인가 우리 역사인가'에서 이를 사실에 입각해 다루면서도 우리의 열등감을 넘어 객관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역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임나일본부설 논쟁', '광개토왕비를 둘러싼 한일 역사 전쟁', '식민지 근대화 논쟁' 등등에 대해서도 너무 흥분하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논점을 제시해 주고, 기존의 논점의 한계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해준다.

이렇게 특강 꼭지 중에는 실제 학교 수업 시간에 토론 자료로 제시하고픈 것들이 적지 않다. 역사를 단지 외우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며 토론하는 과정에서 역사 공부의 새로운 의미, 가치를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본문을 읽어가다 오래된 상식과 다른 관점에서 사실을 다루고 있는 내용을 꽤 접하게 된다. 이른바 신라 '중대' 즉 신라 통일 이후의 전제 왕권 강화에 대한 이해가 그렇다. 통일 신라의 안정기, 전성기의 특징으로 바라보던 시각과는 다르다. 과연 그 때가 안정된 시기였을까, 오히려 갈등이 쌓여가던 시기가 아닌가. 왕권의 강화는 일반 백성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기도 한다.

발해에 대한 서술 역시 오래된 상식을 깨고 있다. 발해 건국 이전을 '다민족 융합의 사회로 재정립'하고 말갈족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발해의 민족 구성과 관련해서 "발해는 '고구려 계와 말갈족'이라는 이중성이 아니라,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말갈족의 국가'라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새삼 우리 시대의 한국사 이해가 나갈 방향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도 느껴졌다. 기존의 '국사'가 '우리'를 강조하며 닫혀 있었다면 '한국사'는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세계사의 흐름과도 이해의 끈을 지으며 나갈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특강 꼭지들 가운데, 예를 들면 '하와이로 간 사진 신부'라든가, '조선에 사는 일본인' 이야기, '메이데이: 세계 노동자 연대와 근로자의 날' 같은 것들이 눈에 띈다. 근현대사만이 아니라 전근대사에서도 '중석기 시대 논쟁'이나 '토기의 발명과 지역성' 들이 세계적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보게 해주고 있다.

다섯 권짜리 <한국의 역사>는 교사의 입장에서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세련되고 풍부한 '역사 교사용 지도서'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게 칭찬인가, 비판인가 스스로도 헛갈린다.

요즘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나 10여 년 전 '한국사' 개설서류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어쩌면 좀 낯선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래도 좀 더 참신하면서도 열린 시각의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훨씬 다채로운 이야기로, 옛 사람의 삶의 숨결도 느낄 수 있으면서, 또 '한국사'의 구조적인 이해나 흐름의 파악도 놓치지 않는 책.

그런데 교사로서는 조금 걱정이 남기도 한다. 항상 아이들이 이 말 뜻을,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 걱정하는 버릇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역사에 대한 독서가 어느 정도 쌓여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래도 한국사 연구의 성과들이 알뜰하게 담긴 이 책이 사실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역사를 좋아하고 스스로 이 책을 집어들 이들에게는 지나친 기우일 테지만.

어쨌든 올해 수행 평가 독서 보고서 추천 목록에 이 책을 빼놓으면 안 될 것 같다. 아이들에게 조금 어렵더라도 그게 독서력을 기를 수 있는 경험이 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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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년)의 <전중과 전후 사이 : 1936-1957 정치학의 기원과 사유의 근원을 읽는다>(김석근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가 '드디어' 출판되었다. 여기서 '드디어'라고 쓰는 것은 옮긴이 김석근이 해설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이 마루야마 생전에 단행본으로 출판했던 중요한 연구서 중에서 유일하게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던 책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통나무 펴냄),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 펴냄), <일본의 사상>(한길사 펴냄),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 펴냄) 등의 책은 모두 김석근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따라서 이 책의 번역 출간으로 마루야마의 일본 사상 연구의 큰 줄기를 이제는 한국 독자들도 계통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 <전중과 전후 사이>(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김석근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마루야마는 매우 논쟁적인 인물이다. 경력으로 보자면 그는 좋은 집안에서 자라난 전형적인 엘리트이다. 아버지는 유명 언론인이었고 자신은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 법학부를 거쳐 도쿄 대학 법학부 교수를 지냈다. 이런 성장 배경을 가진 그가 엘리트주의와 무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동시에 엘리트라고 해도 일본이 겪은 시대의 풍랑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유물론 연구회'에 연루되어 경찰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가 하면, 또 전쟁 말기에는 두 차례나 군인으로 소집되어 히로시마에서 피폭까지 당했다. 게다가 1960년대에는 전공투(전학공투회의) 학생들에게 감금까지 당했다. 시대의 최고 엘리트가 겪은 시대와의 불화는 그의 사상의 궤적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를 근대 부르주아 시민사회를 옹호하는 '근대주의자'라 비판한다. 우익들은 그를 "일본 해체를 꿈꾸는 반일주의자"라 비판한다. 탈식민주의자들은 그를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스트"로 명명한다. 평자도 이 입장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사망(1996년)을 보도한 언론들이 "전후 정신의 기둥", "전후 민주주의의 리더"라고 표현했듯이 일본의 전후 사회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지식인 중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옮긴이가 역자 후기에서 소개하고 있듯이 그를 일본에서 "학계의 천황"이라 부르는 것은 천황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천황'이라는 존재를 권위와 권력의 결합이라 본다면, 그는 틀림없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학계에서 독보적인 학문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마루야마는 수없이 많은 비판에 시달렸지만 그 비판에 대해 응답한 적이 거의 없다. 그의 사후에 발견된 메모를 중심으로 출판된 <자기내대화(自己內對話)>를 보면, "내가 해온 지금까지의 학문에 대해 나는 단 한 번도 내 가슴을 찌르는 비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듯이 그는 이런 비판에 대해서 침묵이라기보다는 묵살이나 무시에 가까운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주위의 평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서도 독보적이었다.

<전중과 전후 사이>는 1936년부터 전쟁 기간 동안에 쓴 글 25편과, 전후부터 1957년까지 쓴 글 36편을 모아 1976년에 출판된 책이다. 마루야마가 후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같은 시기에 쓴 글 들 중에서 <현대 정치 사상사 연구>,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등에 수록된 글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을 출판사 미스즈가 모은 것들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마루야마의 저작이면서 미스즈가 편집한 책이라고 해도 좋다.

이 책이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나누어지는 전쟁 기간과 전후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패전을 전후로 한 일본 사회의 '분기점'을 마루야마가 동시대 속에서 어떻게 호흡하고 사유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그러나 마루야마의 사상을 이 책만으로 정리하고 비판하는 작업은 용이하지 않다.

이 책에 추상도와 이론성이 뛰어난 학문적인 글들과 당면한 시대 상황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사정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사회철학자 나카노 도시오가 <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서민교·정애영 옮김, 삼인 펴냄)에서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듯이 그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책을 계통적으로 낸 적이 없다. 마루야마는 과거에 쓴 글들을 나중에 한권의 책으로 묶어내는 형태로 단행본을 출판했다. 게다가 새롭게 단행본을 묶어내면서 후기, 보기라는 형태로 자신의 생각을 다시 추가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후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역시 이 책에 실려 있는 '정치학에서의 국가 개념'이라는 논문일 것이다. 이 글은 마루야마의 첫 번째 논문으로 그가 대학 재학 중이었던 스물세 살에 썼다. 이 글은 도쿄 대학 법학부의 학생자치회가 발행했던 미도리카이(緑会) 논문집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1976년에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는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전쟁과 전후 사이>에 실린 글들 중에 이 논문이 가장 논쟁이 되었던 것은 흔히 근대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마루야마의 사고와는 다른 사유를 이 글에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소 길지만, 논쟁이 된 마지막 부분을 책에서 인용해보자.

"전체주의 국가 관념이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핵심은 결국 표면상 배격하고 있는 개인주의 국가관의 궁극적인 발현 형태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개인이냐 국가냐 하는 양자택일(Entweder-Oder)에 입각한 개인주의적 국가관이나, 개인이 등족(等族) 속에 매몰된 중세적 단체 국가, 양자의 기괴한 절충인 파시즘 국가관이 아니다. 개인은 국가를 매개로 하여 구체적으로 정립되며, 끊임없이 국가에 대해 부정적 독립을 지탱하는 관계에 서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런 관계는 시민사회에 제약을 받고 있는 국가 구조에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다. 여기에 변증법적인 전체주의를 오늘날 전체주의로부터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나온다."

추상도가 높은 이론적인 용어나 글을 구체적인 시대 상황과 직결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마루야마의 글들은 항상 시대 상황이라는 맥락을 고려해 매우 전략적으로 쓰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가 개인주의적 국가나 파시즘 전체주의와 대치시키고 있는 '변증법적 전체주의'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는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힘을 얻고 있는 파시즘이 개인주의적 국가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주의적 국가의 귀결이라 보았다. 즉 한마디로 시민사회가 파시즘을 낳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상정한 것이 '변증법적인 전체주의'이며 이를 파시즘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주의적 국가를 리버럴 국가라 한다면, 파시즘을 리버럴 국가의 '발전'된 형태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1940년 이후에, 특히는 전후에 펼치는 근대주의적 사유와 매우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전체주의'가 무엇을 뜻하는가? 히구치 요이치 같은 헌법학자는 '변증법적 전체주의'를 루소적 자유주의로 해석한다.

혹자는 이를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칭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실제로 마루야마는 '변증법적 전체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개념이라고 그답게 1990년에 '사후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마루야마에게 "반일주의자=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어 하는 우파들의 언설은 논외라 하더라도 마루야마 사상의 계승자인 다구치 후쿠지도 이런 해석을 취하고 있으니 설득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근대 비판'이 전개되던 1930년대 일본의 지적 상황이 그 단서를 제공해준다. 서양과 동양을 대치시키고 투쟁과 대립을 서양적 근대의 필연적인 귀결로 인식하면서 근대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키워가던 근대 비판의 사고가 서양과 군사적 대립을 높여가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사상적 안식처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마루야마가 말하는 '변증법적 전체주의'란 이런 근대 비판의 지적 풍토와 무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논문은 1940년 무렵부터 전개되는 근대주의자 마루야마의 사유와는 이질적인 사유공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중요한 것은 단지 뛰어난 정치학의 고전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이 책을 비롯한 마루야마의 사상이 중요한 것은 일본의 전후 체제를 전전과 단절적으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식하고 싶어 하는가를 '전후 사상의 기둥'인 마루야마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제국 질서(전전)와 냉전 질서(전후)는 단절되어 있지 않다. 서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연속에 대한 성찰적인 사유를 그의 사상에서는 읽어내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에 식민지 인식이 통째로 빠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을 읽을 때는 하나의 사상을 자기완결적인 구조로 이해하는 시점과 동시에 그의 사상이 당시의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였는가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점이 요구된다. 마루야마 저작을 줄곧 번역해온 옮긴이 김석근의 앞으로의 연구에 이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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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철학사를 쓸 만한 학자를 꼽자면 이정우야말로 가장 먼저 떠오를 사람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전공'이라는 좁은 감옥에 갇힌 채 고만고만한 논문들을 써내는 것으로 학자 행세를 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풍경이라면, 저자는 지금껏 그가 내놓은 책들의 목록이 말해주듯이 철학사의 거대한 흐름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면서 자신의 사유를 구축해온 드문 철학자다.

이정우의 <세계 철학사 1>(길 펴냄)은 철학의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역사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철학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단지 철학자들의 어록을 시대 순으로 정리해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로잡았던 물음이 무엇이었는지를 들춰낸다. 그리하여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외우고 밑줄 긋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각하게 한다. 단적인 예로 기존의 철학사 책에서 뜻 모를 암호처럼 여겨질 뿐이었던 그리스 초기 자연철학의 전개 과정이 어떤 철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는지 독자들은 이 책에서 보게 될 터인데, 이는 또한 저자의 철학적 깊이를 엿보는 것이기도 하다.


▲ <세계 철학사 1>(이정우 지음, 길 펴냄). ⓒ길
사실 내가 이정우의 철학사를 기다린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첫 저작인 <담론의 공간>(1994년)에서 "기존의 철학사 연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될" 철학사의 기획을 예고했었다. "철학사는 철학적인 원전들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다. (…) 철학사는 이 책들에 부재하는 것, 그 책들의 행간 사이에, 그 여백에 보이지 않게 씌어 있는 것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이런 의미의 철학사가 어떤 형태일지 궁금해 하던 나는 이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은 셈이다.

<담론의 공간>의 기획이 <세계 철학사 1>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구현되었는지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살펴볼 일이다. 하지만 얼른 일별하기에도 이 책이 기존의 철학사들과 다른 모습을 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1부 1장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지리, 기후, 경제적 환경, 다양한 글쓰기 방식, 정치 체제의 변화, 서정시와 비극 등에 대한 해설을 동원하여 '철학의 탄생'을 설명해낸다. 이런 입체적인 서술 방식은 철학자들의 사유를 역사적 맥락 속에 놓음으로써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이 책의 소중함은 철학적 깊이나 서술 방식의 새로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주목하듯이 이 책은 '세계 철학사'다. 저자의 학문적 여정에 비추어볼 때 이는 우연이 아니다. 역시 초기 저작인 <가로지르기>(1997년), <인간의 얼굴>(1999년)에서부터 이미 저자는 지속적으로 동서 철학을 가로지르는 방법론을 모색하고 실험하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바대로, 그가 대학 강단을 떠난 이유 중 하나가 자기 '전공' 밖의 동양 철학을 강의하다가 동료 교수들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보아 이 책이야말로 저자의 학문 활동의 중간 결산인 셈이다.

물론 <세계 철학사>는 아직 (기존의 분류대로라면) '서양 고·중세 철학'에 해당하는 1권만 나온 상태이니 본격적인 성취는 2, 3권이 나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세계 철학사>라는 낯선 이름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그것은 '세계 철학사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이전에도 <세계 철학사>라는 책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자는 이전의 책들이 "실질적으로 서구 철학사"(7쪽)에 불과했다고 지적하며 자신의 책에 참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 철학사의 지위를 부여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름이 세계 철학사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세계 철학사를 세계 철학사가 되게 하는 걸까?

나 역시 제목에 끌려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를 펼쳤다가 동양 철학이 극히 적은 분량으로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실망했었다. 그러나 동양 철학사와 서양 철학사에 분량을 대등하게 할애한다 해서 저절로 세계 철학사가 성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분량의 공정한 배분이 문제라면 새 책을 따로 쓰는 수고를 생략하고 힐쉬베르거의 <서양 철학사>와 풍우란의 <중국 철학사>, 길희성의 <인도 철학사> 등을 한 데 모아서 '세계 철학사 세트'라고 이름 붙이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세계 철학사는 지역별 철학사라는 낱낱의 부분들을 짜깁기한 합성체가 아니라 온전한 하나의 철학사여야 할 것이다.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그 역시 이름만 세계 철학사일 뿐 각 지역 철학사들의 "단순 병치의 구도"(11쪽)를 넘어서서 못할 것이다. 이제까지는 이런 엉거주춤한 공존으로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세계 철학사라는 하나의 큰 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흐르고 있는 철학들은 고여서 썩고 말 것이다. 철학은 탈레스에서부터 세계 전체에 대한 근본적 탐구였으며 (칸트 시대 독일 학계의 어법을 빌자면) 그 자체로 '세계 지혜'이기 때문이다. 지역 철학사는 세계 철학사라는 "전체와의 산 관련"(함석헌)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채 생명력을 잃고 만다. 그러므로 세계 철학사는 각 지역 철학사들 간의 대화의 가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교를 놓으려는 이런 시도는 자칫 "허구적인 보편화를 통한 등질화"(6쪽)로 빠질 수 있다. 서양 철학이 동양 철학이 비해 월등한 현실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렵게 말할 것 없이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필로소피아(philosophia)의 번역어로서 발명된 개념이다(23쪽). 철학 체계를 이루는 존재론, 인식론, 주체론, 윤리학 등의 구분 방식(236~237쪽), 철학과 종교의 구분과 대립(575~576쪽) 또한 서구적 이해에 연원을 둔다. 이런 학문적 지형 위에서 대등한 만남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세계 철학사는 서구 바깥의 시선으로 서구 철학의 근본 전제들을 뒤흔들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동반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역 철학사들 간의 차이와 고유성을 보존하면서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어떻게 가능하며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 것인가? 이것은 <세계 철학사>라는 제목을 마주한 독자들이 자연히 갖게 될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2, 3권을 통해 제출될 저자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독자들의 또 다른 즐거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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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31호에 실린 머리기사를 읽고서 몇몇 독자가 의견을 주었습니다. 아래 등장하는 'L 친구'도 그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자신을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라고 밝혔습니다. (☞관련 기사 : 일본이 핵에 무너진 날…"우리는 모두 일본인이다!")

L 친구에게,

보내준 메일은 잘 받았습니다. 신학기에 한창 바쁠 텐데, 일본 원자력 발전소 사고 소식을 꼼꼼히 챙기고 이렇게 기사에 의견까지 보내줘서 반가웠습니다. 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해서 미안해요. 친구가 던진 질문이 모두 다 만만치 않았던 터라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답니다.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기는 했지만, 친구는 이렇게 물었지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보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위험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다 주말에 기자님의 기사를 봤어요. 그 기사를 읽고 나서, 저는 더 우울해졌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이 위험한 원자력 에너지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이거든요.

이미 한국은 전기의 30% 정도를 원자력 발전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만약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한다면, 그만큼의 전기는 어떻게 생산하나요? 더구나 기후 변화를 막고자 온실 기체를 줄일 수밖에 없다면,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온실 기체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 에너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닌가요?

저 역시 위험한 원자력 에너지는 싫어요. 하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는 한, 원자력 에너지는 필요악 아닐까요?"

사실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친구뿐만이 아니에요. 원자력 발전소를 한반도에 짓는 것도 모자라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한국 시민 대다수가 친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원자력뿐이야. 다른 대안은 없어!'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혹시 이런 생각이야말로 '원자력 신화' 아닐까요?


ⓒ프레시안(손문상)

원자력 성적표 : 2.3 혹은 39

사람들과 원자력 에너지를 놓고 얘기를 하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사람들이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서 모르는 게 정말로(!) 많거든요. 그럴 때마다, 제가 던지는 질문이 있답니다. 자, 친구도 한 번 다음 질문에 대답해 보세요.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에너지 중에서 원자력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몇 퍼센트(%)나 될까요?"

이런 질문에 대개의 사람들은 "한 40% 아닌가요?" 이렇게 답합니다. 그러나 정답은 이렇습니다. 2007년 현재 난방, 수송, 전기 등 전 세계 소비 에너지 중에서 원자력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2.3%'에 불과해요. 전기를 생산하는 에너지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3.7%에 불과합니다.

질문을 하나 더 해볼게요.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 중인 나라는 몇 개나 될까요?" 이 질문에도 대개는 "한 100개국 아닌가요?" 이렇게 답합니다. 역시 정답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2008년 현재 439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 중인 나라는 고작 31개국뿐이거든요. 이게 1946년에 처음으로 상업 발전을 시작한 원자력 에너지의 초라한 성적표입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얘기를 계속 해볼게요. 친구도 언급한 제임스 러브록은 <가이아의 복수>(세종서적 펴냄)에서 "지구가 열을 받는 지금의 상황에 대응할 유일한 방법은 원자력 발전소를 더 짓는 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러브록은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가로 알려져 있었던 터라서, 이런 주장은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그 동안 "핵은 죽음이다" 이런 구호를 외치며 반핵 운동에 앞장서온 환경운동가 중 일부도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으니까요. 마크 라이너스, 조지 몬비오,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환경 담당 기자인) 프레드 피어스 같은 이들이 대표적입니다. 자, 그렇다면 열 받은 지구를 원자력 에너지로 식히는 게 가능할까요?

원자력 에너지가 이런 역할을 하려면 우선 전 세계 소비 에너지의 11.6%, 전기 생산의 67.8%를 차지하는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를 아주 빠른 시간, 즉 최소한 50년 안에 대체해야 합니다. 화석연료가 전력(온실 기체의 21%), 산업(17%), 수송(14%) 등에 쓰이면서 배출하는 온실 기체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지금 원자력 에너지가 전 세계 소비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비중(2.3%)은 정말로 보잘 것 없어요.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하는 나라도 적고요(31개국). 더구나 지금 가동 중인 439기의 평균 운영 기간은 25년입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수명을 40년으로 가정하면, 앞으로 15년 안에 이들 원자력 발전소는 폐쇄될 운명입니다.

이렇게 조만간 폐쇄할 수밖에 없는 원자력 발전소가 많은 탓에 2025년까지 약 190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해도 전체 에너지에서 원자력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늘기는커녕 지금 수준을 유지하기도 버겁습니다. 그렇다면, 러브록의 기대를 충족하려면 얼마나 많은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 할까요?

앞으로 50년간 영광, 울진의 원자력 발전소(1000메가와트) 2~3000기를 전 세계 곳곳에 지어야 합니다!

대충 계산을 해보니까, 앞으로 50년간 1주일에 하나씩 원자력 발전소를 특히 미국, 유럽, 동아시아 등에 집중적으로 지어야 해요. 그런데, 이렇게 원자력 발전소를 1주일에 하나씩 짓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비교적 원자력 에너지에 호의적이었던 지난 50년간 지어진 원자력 발전소가 439기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해 보세요.

더구나 설사 전 인류가 원자력에 홀려서 기적적으로 수천 개의 원자력 발전소를 짓더라도 온실 기체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화석 연료는 전기 생산뿐만 아니라 산업(17%), 수송(14%) 등에서 적지 않은 온실 기체를 배출해요. 당장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배출하는 온실 기체의 절반은 자동차(40%), 비행기(6%)에서 나와요.

원자력 발전소에서 아무리 전기를 생산한들 전기로 움직이는 자동차, 비행기가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널리 보급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자, 이래도 원자력 발전소가 러브록의 말처럼 '기후 변화의 해결사'인가요? 혹시 우리는 열 받는 지구의 미래가 너무 무서운 나머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원자력'이라는 신화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원자력 쓰레기의 진실


▲ <가이아의 복수>(제임스 러브록 지음, 이한음 옮김, 세종서적 펴냄). ⓒ세종서적
앞으로 50년간 1주일에 하나씩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게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하도 "원자력 에너지는 청정한 에너지"라고 광고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깜박하는 게 있어요.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방사성 독성 물질을 잔뜩 포함한 쓰레기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바로 '방사성 폐기물'이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이번에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곳곳에 임시로 보관해둔 이런 방사성 폐기물에 문제가 생겨서 아찔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왜 후쿠시마에서는 이런 위험한 쓰레기를 발전소 곳곳에 둘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건, 바로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더 해볼게요. "전 세계에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처리장은 몇 곳이나 있을까요?"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 중인 나라가 31개국이니까 최소한 이런 처리장이 31곳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답은 '0'입니다.

앗, 그럼 경주에 짓고 있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은 뭐냐고요? 원자력 발전소에 나오는 쓰레기는 방사성 독성 물질의 양에 따라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과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로 나눕니다. 경주에서 짓는 시설은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아직까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은 만들지 못했답니다.

도대체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이 얼마나 처치 곤란하기에 반세기가 넘도록 변변한 처리장 하나 마련하지 못했을까요?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에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용 후 핵연료와 같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속에는 짧게는 수천 년에서 길게는 수십만 년 동안 격리시켜야 할 방사성 물질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 말로는 수천 년, 수만 년, 수십만 년 해봤자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10년 계획도 버거워하는 보통사람의 시간 감각으로는 수천 년, 수만 년, 수십만 년 동안 통제해야 할 위험이라는 것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유적 중 하나가 이집트의 피라미드입니다.

약 4~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단지 수십만 명이 동원돼 만들어진 왕의 무덤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도 실감이 안 난다면 만들어진 지 채(?) 1000년도 안 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어떤가요?

이런 고대 유적을 염두에 두면, 과연 우리가 수천 년, 수만 년, 수십만 년 동안 통제할 수 있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을 만드는 게 가능할까요? 예를 들어,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나서 이 위험한 곳에 접근하려는 이들에게 '위험' 경고를 어떻게 할까요? 알다시피 인간의 언어는 워낙 빨리 변해서 약 500년이 지나면 거의 이해하기가 어려운데요.

지금 고등학생인 친구의 국어 수업 시간을 떠올려보세요. 선생님의 도움 없이는 조선 시대의 한글을 거의 이해할 수 없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위험'이라고 써놓아도 불과 수백 년이 지나면, 후손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방사성 독성 물질은 계속해서 외부로 나올 텐데요.

설사 수천 년, 수만 년 혹은 수십만 년 뒤까지 경고할 방법을 찾았다고 칩시다. (실제로 글자가 아닌 그림을 이용한 경고가 궁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경고 표시는 어떻게 남겨야 할까요? 수천 년, 수만 년, 수십만 년 뒤까지 풍화작용을 비롯한 온갖 파괴 현상을 견뎌낼 경고판을 마련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자, 이렇게 원자력 에너지는 인류로 하여금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기를 부추깁니다. 당장 지난 반세기 동안 약 30만 톤(t)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이 세계 곳곳의 원자력 발전소에 흩어져 보관돼 있습니다. 여기에 매년 1만 톤이 추가되고 있고요. 당장 인류는 이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상황이 이런 데도 원자력을 필요악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가면을 쓴 원자력


▲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다카기 진자부로 지음,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혹시 드라마를 즐겨 보나요? 저는 시간 날 때마다 미국 드라마를 즐겨 봅니다. 그 중에 지금은 종영한 <24>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2001년부터 10년에 걸쳐서 총 여덟 시즌이 방송되었습니다. 영웅 '잭 바우어'가 온갖 테러에 맞서는 이야기인데, 국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아이리스> 시리즈의 원조 격인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드라마에는 현실에서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테러가 등장해요. 한 번은 첫 번째부터 마지막 시즌까지 어떤 테러가 등장하는지 따져봤어요. 네, 그렇습니다. 드라마 전체에 걸쳐서 온갖 종류의 핵공격이 등장합니다. 특히 다섯 번째 이야기는 원자력 발전소가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끔찍한 핵무기로 돌변하는지 실감나게 보여주지요.

굳이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후쿠시마 사고를 생각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만약에 테러리스트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접수한 다음에 냉각 기능에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오싹하지요? 유럽의 환경운동가들이 심심찮게 원자력 발전소에 잠입해 깃발을 꽂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도 이런 테러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서랍니다.

지난 50년간 원자력 발전소가 많이 안전해진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이번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사고를 막을 수 없었어요. (지난 기사에서 이 얘기는 길게 했었지요.) 더구나 원자력 연료의 수송, 원자력 발전소 테러 등의 위험을 염두에 두면 원자력 발전소는 여전히 위험합니다.

이뿐만이 아니에요. 최근에 북한, 이란의 핵무기 개발에서 보듯이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원자력 발전소)'과 '군사적 이용(핵무기)'의 경계는 모호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프랑스의 원자력 에너지 의존도가 핵무기 보유 욕심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번에 후쿠시마 사고로 참담한 상황에 빠진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자력 전문가로 이례적으로 반핵 운동에 앞장선 일본의 지식인 다카기 진자부로(1938~2000년)는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녹색평론사 펴냄)에서 그 이유를 "거대한 힘을 손에 넣고 보자"는 욕망으로 설명합니다. 세계 최초이자 최후의 원자력 피폭 국가인 일본이 역설적으로 원자력 에너지에 집착하게 된 데는 "거대한 힘"을 상징하는 원자력(핵무기)을 보유하려는 욕심 탓이었습니다.

앞으로 전 세계 곳곳에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선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해서 생산한 플루토늄은 언제든지 핵무기 생산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핵무기의 위력을 목격한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핵무기 확보에 나섰던 것처럼, 누군가 한 번 더 핵무기의 방아쇠를 당긴다면 또 다시 전 세계적인 핵 경쟁이 벌어지겠지요.

걱정스럽게도 그 경쟁은 동북아시아에서 시작할 가능성이 큽니다. 막무가내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북한은 물론이고 원자력 에너지 확대에 매진하는 한국, 일본, 중국이 버티고 있으니까요. (사실 원자력 에너지를 사랑하는 점에서는 남쪽의 지도자와 북쪽의 지도자가 너무나 똑같습니다.) 어쩌면 이번 후쿠시마 사고는 그런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 클리오(역사의 여신)의 경고 아닐까요?

'아톰의 시대'를 넘어서


▲ <기후 변화의 유혹, 원자력>(이유진 외 지음, 도요새 펴냄). ⓒ도요새
얘기가 길었습니다. 사실 원자력 에너지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최근에 나온 <기후 변화의 유혹, 원자력>(도요새 펴냄)은 원자력 에너지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으니 많은 참고가 될 거예요. (단, 쉽게 쓰려고 저자들이 노력은 했습니다만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여전히 어려운 내용이 많습니다.)

이제 긴 편지를 마칠 때가 되었네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원자력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안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풍력, 태양 에너지 등 말은 무성하지만 그것이 대안이 되기에는 힘이 너무 약해 보이니까요. 마지막으로 독일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독일은 총 17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 중입니다. 설비 용량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나라입니다. (한국은 설비 용량 크기로 따지면 다섯 번째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2000년에 원자력 포기를 선언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가동 중인 원자력 발전소의 수명이 다하면 원자력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2010년 9월에 현재 운영 중인 원자력 발전소의 평균 수명을 12년 더 연장하기로 결정했습니다만, 그 때 내세웠던 이유도 "풍력, 태양 에너지와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할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어요. 그나마 이번 후쿠시마 사고로 독일 정부가 이 결정을 번복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독일에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체르노빌 사고로 시민들이 원자력 에너지가 아닌 다른 대안을 갈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힘이 모아져 결국 2000년의 원자력 포기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원자력 에너지를 부활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원자력 에너지가 아닌 풍력, 태양 에너지와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를 당연하게 여기는 시민들, 그들의 지지를 받아서 국회의원 배지를 단 정치인들, 그런 재생 가능 에너지로 돈을 버는 기업인, 그런 산업에서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시 원자력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지요."

2007년 한국을 방문한 독일의 녹색당 의원이 저에게 들려준 답입니다. 이런 독일의 경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체르노빌 사고가 독일 에너지 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후쿠시마 사고가 에너지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도 지금부터 변화에 대한 의지를 모은다면, 한 10년 후에는 원자력 에너지 포기 선언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제 넘는 부탁입니다만, 이번 변화의 맨 앞에 친구와 같은 10대들이 큰 역할을 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고 보니, 과학기술자가 되고 싶어서 2학년이 되면서 이과를 선택했다고요? 앞으로 풍력, 태양 에너지와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나 혹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과학기술에 인생을 걸어보면 어떨까요?

그런 움직임이 하나둘 모아졌을 때, 우리는 '아톰의 시대'를 넘어서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질문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카기 진자부로의 얘기를 전합니다. 이제 친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원자력 문제는) 앞으로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는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핵 없이 살자는 우리의 희망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때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런 믿음 속에서 희망이 다시 용솟음쳐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3월 25일

강양구 드림.


함께 읽기

원자력 에너지의 문제점과 대안 에너지의 가능성을 다룬 책은 정말로(!) 많아서 셀 수조차 없습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부정확한 정보를 담은 책도 많지요.

우선 원자력 에너지의 문제점을 한꺼번에 조감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앞에서 언급한 다카기 진자부로의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을 권합니다. 이 책을 31호 머리기사에서 소개한 '과학기술과 불확실성'이라는 관점을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읽으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조만간 개정판이 나올 예정입니다.


▲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강양구 지음, 프레시안북 펴냄). ⓒ프레시안북
앞에서 언급한 <기후 변화의 유혹, 원자력>(김수진·오수길·이유진·이헌석·정용일·정희정·진상현 지음, 도요새 펴냄)은 비교적 최신 정보를 토대로 원자력 에너지의 문제점을 전체적으로 짚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짧은 글로는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강양구, "원자력을 둘러싼 일곱 가지 신화", <녹색평론> 2010년 5-6월호(제112호))

독일 에너지 전환의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는 책으로는 <에너지 전환의 현장을 찾아서>(이필렬 지음, 궁리 펴냄)가 있습니다. 2001년에 나온 이 책이 아쉽다면 다음 책도 참고할 만합니다.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강양구 지음, 프레시안북 펴냄)). 헤르만 셰어의 <에너지 주권>(배진아 옮김, 고즈윈 펴냄)도 고민을 자극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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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사는 곧 전쟁의 역사다. 한 전쟁 연구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황허 유역 등에서 문명사회를 이루기 시작한 이래로 지난 34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겨우 268년이다.

지난 20세기도 100년 내내 전쟁으로 얼룩졌다. <파리 대왕>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 소설가 윌리엄 골딩이 "20세기는 폭력의 세기"라고 한탄했듯이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쟁, 발칸내전 등 유혈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70억 인구가 살아가는 21세기 오늘의 세계도 평화와 거리가 멀다. 한 해 동안에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은 전쟁들이 해마다 15건쯤 벌어지고 있다. 전쟁이 낳는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민간인 희생자가 군인 사망자보다 더 많다는 점이다.

한 전쟁 연구를 보면, 1900~95년 사이의 전사자는 1억970만 명이며, 이 가운데 민간인이 6200만 명으로 전투원보다 더 많이 죽었다. 민간인 희생자의 상당수는 무차별 포격과 공습에 따른 것이다.

"2000년 이후 30개의 전쟁이 벌어졌다"


▲ <오늘의 세계 분쟁 : 국제 분쟁 전문가 김재명의 전선 리포트>(김재명 지음, 미지북스 펴냄). ⓒ미지북스
국제 분쟁 전문 기자인 김재명(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 정치학 박사)의 <오늘의 세계 분쟁>(미지북스 펴냄)은 중동, 발칸반도, 서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지역 등 전 세계 15개 분쟁 지역을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쓴 전쟁과 평화론이다. 저자가 직접 보고 겪고 느꼈던 분쟁 지역의 참상을 직접 찍은 140장의 사진과 함께 전쟁의 속살을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는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다. 전쟁을 모르고 살던 보통사람들도 어느 날 내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책에서 "2000~09년 한 해에 1000명 이상 희생자를 낸 유혈 분쟁을 지역별로 모두 더하면 30곳이나 된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사이의 전쟁을 빼면 모두 내전이다. 지금 전 세계 언론의 눈길이 쏠린 리비아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내전 양상으로 번지는 중이다.

유혈 투쟁 한복판에 놓인 사람들

지구상에서 왜 유혈 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는지를 분석한 이 책은 저자가 2005년에 출간했던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지형 펴냄)를 전면적으로 수정 보완한 책이다. 팔레스타인, 이란, 레바논 등 지난 6년간 거듭 취재한 분쟁 지역들에 대한 분석을 더하고 그 동안의 국제 정세의 변화를 담아내 200쪽 가까이 책의 두께를 늘렸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분쟁 지역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뿐 아니라 전쟁 피해자, 난민, 정치 지도자, 병사, 국제 기구 요원들의 인터뷰를 통해 유혈 투쟁의 한복판에 놓인 사람들의 생각을 담아냈다.

특히 한국인이 만나기 어려운 사람과의 직접 인터뷰 내용이 눈길을 끈다. 팔레스타인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고(故) 야세르 아라파트,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고 셰이크 아메드 야신, 다이아몬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도끼로 손목을 치는 잔혹한 내전의 땅 시에라리온 반군 지도자 포데이 산코, 체 게바라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5개국 여행길에 올랐던 고 알베르토 그라나도 등을 만나 그들의 귀한 말들을 전하고 있다.

"전쟁의 원인은 전쟁 숫자만큼 다양하다"

책은 모두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짚어보면서, 특히 1990년대 초 동서 냉전이 막을 내린 뒤 봇물처럼 터진 내전을 통해 인종 청소와 대량 학살의 참극이 왜 일어났는지를 살펴본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리버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에 관한 설명들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 수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했다. 저자는 정치학자들의 전쟁 연구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면서, 역사 이래 우리 인류가 벌여온 전쟁들, 특히 1990년대 이후 벌어진 전쟁들의 특성을 면밀히 분석한다.

제2부는 저자가 15년 동안 취재해 온 지구촌 분쟁 지역 가운데 15개 지역을 골라 새로 쓴 글이다. 중동 지역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이란,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 동남아시아의 동티모르와 캄보디아, 유럽의 화약고라 일컬어지는 보스니아와 코소보,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북아메리카의 볼리비아, 쿠바 관타나모, 미국 등이 저자가 다룬 지역들이다. 미국이 분쟁 지역에 포함된 것은 9·11 테러를 겪은 뒤 지금껏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사들이 전투 중인 교전 국가이기 때문이다.

제3부에서는 9·11 테러 뒤 주요 시사용어로 떠오른 '테러와의 전쟁'을 다루면서, 미국이 벌여온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자살 폭탄 테러가 지닌 복합적인 성격과 자폭 테러범들이 누구이며 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지를 살펴본다.

끝으로 저자는 국지적인 내전과 자원을 둘러싼 이권 전쟁들, 강대국들의 군비 증강과 핵무기 보유 실태를 살펴보면서, 21세기 지구촌에 평화가 찾아오기 위해선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타 지역 분쟁은 한반도의 거울

지금껏 많은 국가와 집단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를 죽이고 피를 흘려왔다. 미국의 정치학자 케네스 왈츠는 전쟁이 우리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뜻에서 "전쟁에서 누가 이겼느냐고 묻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지진에서 누가 이겼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책은 현대 전쟁과 테러가 왜 끊임없이 일어나는가, 누가 그 전쟁으로 이득을 챙기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전쟁학 교과서'이다.

우리 한국도 세계적으로 관심이 쏠리는 분쟁 지역이다. 저자는 "다른 지역의 국제 분쟁은 곧 한반도 분단 극복을 위해 관심 있게 비춰볼 거울"이라 말한다. 그 분쟁이 왜 일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평화를 가져왔는지(또는 지금도 혼란 속에 있는지), 무엇이 전쟁과 평화를 갈랐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평화·통일의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 큰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국제 분쟁과 내전이 끊이지 않는 지구를 가리켜 '전쟁 행성'이라고 불렀다. 21세기 문턱을 넘어선 지도 벌써 10년, 오늘의 세계는 분쟁과 폭력으로 어수선하다. 따라서 저자는 "한반도를 포함한 21세기 세계의 기상도는 여전히 흐림"이라고 진단하면서, 지구촌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평화의 비둘기가 날아들길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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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now 2011-03-2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프레시안에 직접 접속해 보아왔던 글들을
알라딘 서재에서도 편하게 볼 수 있으니 반갑습니다.

다만, 글마다 '글쓴이'가 하나도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수 많은 분들이 프레시안 books에 글을 올리고 계시는데
'누가 이 글을 썼는가' 정도는 명확하게 기재해 두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서재에 퍼올리는 글 끝부분에
(1) 글쓴이와 (2) 원래 사이트의 URL 링크 정도는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페이퍼를 담당하시는 분의 검토를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